106화 연극
일단 판이 만들어지자, 제1야당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박건우를 포함한 명성 쪽 사람들과 물밑에서 시나리오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는 한편, 바쁜 당 대표를 대신하여 김문성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회 내에서는 각종 집기류들이 날아다니며 설전이 오갔고, 매일 밥 먹듯이 기자회견이 열리던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김문성 의원의 갑작스러운 기자회견에 대해, 기자들 또한 큰 의문을 품지 않았다.
바로 지금, 기자회견이 열리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 * *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중대한 발표를 하고자 합니다.”
으레 있던 기자회견을 예상하고, 별생각 없이 김문성 의원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기자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이 시기에 중대한 발표라니.
총선에서 제1당이 완전히 패배했고, 제2당과 제3당은 10석도 채 확보하지 못해 당 자체가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부족하기는 하지만, 제1, 2, 3당 의원을 모두 합쳐야 그나마 여당 측 의원들과 비벼라도 볼 수 있는 상황.
이미 탄핵 심판마저 기각된 지금, 야당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잠시 목을 가다듬던 김문성 의원이 이내 주변을 둘러보며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우선 저희를 지지해 주셨던 국민 여러분께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저희는… 결국 불의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불의에 무릎을 꿇었다.
탄핵심판이 기각되고, 총선에서 참패를 면치 못한 현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리라.
말을 마친 김문성 의원이 깊이 허리를 숙이자,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수많은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다시 고개를 든 김문성 의원이 말을 잇는다.
“하지만, 저희는 이번 패배가 완전한 패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정권과 자유 민주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특정 세력들의 갖은 모략과 모함 속에서도, 지난 총선에서 과반에 가까운 의원석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요.”
웅성, 웅성, 웅성.
이 시점에서 잠시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김문성 의원의 말대로 제1야당이 120여 석 이상의 의원석을 확보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전에 제1야당의 명성을 생각하면, 패배도 그냥 패배가 아닌 대패(大敗)라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김문성 의원은 완전한 패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잠시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던 김문성 의원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저희가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발의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국민들이 총선에서 특정 정당을 지지해 줬으면 좋겠다는 대통령의 발언. 누구보다 정치적 중립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대통령으로, 저희는 그 자질이 의심되었으며…….”
김문성 의원이 두 눈을 차갑게 가라앉히며 계속 말한다.
“뇌물수수 의혹을 완벽히 해소하지 못한 상황에서, 결국 재계의 인사가 자살까지 하게 되었던 점. 그런데… 비단 대통령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말을 잇던 김문성 의원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김문성 의원이 말을 잇는다.
“국민들의 대표라는, 특히나 그 영향력이 더욱 막강한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들이 지금,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웅성, 웅성, 웅성, 웅성.
기자들의 소란스러움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기자들 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여당이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리가 들려온 기자를 향해 시선을 돌린 김문성 의원이 곧바로 대답한다.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 이 순간, 탄핵 기각과 대량의 의원석을 확보함으로써, 이제 여당은 누구도 무시 못 할 막강한 권력을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지금 국민들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또 다른 기자가 소리치자 김문성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사실만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만큼 무서운 것은 세상에 없으니까요. 여당이 합심이라도 한 듯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에 그토록 영향력을 키우려 했던 이유, 저는 그 진실을 얼마 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속한 당의 힘을 키우려 하는 것은, 어느 정치인이든 마찬가지 아닙니까!? 지금 그것을 부정하시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여당은 지금… 대한민국 전체를 빨갛게 물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
김문성 의원의 충격적인 발언에 모든 기자들이 일시에 눈을 크게 떴다.
차기 당 대표라는 사람이 대놓고 색깔론을 운운하고 있다.
김문성 의원의 위치를 생각하면, 미치지 않고서야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저 정도 수위의 발언은 절대 할 수 없다.
선거 전이나, 탄핵 심판이 기각되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 어설픈 색깔론을 펼쳐 봐야 국민들의 공분만 살 뿐이다.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김문성 의원의 말에 몇몇 기자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저 입에서, 과연 어떤 폭탄 발언이 나올 것인가?
기자회견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자들은 김문성 의원이 말한 중대 발표를 ‘삼당 합당’ 정도 수준으로 생각했다.
여대야소 현상이 극심해진 상황에서, 제1야당의 승부수라고 해 봐야 그 정도 수준에서 뻔하게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까놓고 보니 그런 뻔한 스토리는 아니었나 보다.
기자들이야, 별 영향력도 크지 않은 나머지 두 당과 제1야당이 합당이니, 담합이니 해 봐야 큰 관심도 없었다.
현직 국회의원이 공식석상에서 대놓고 상대 당의 누군가를 빨갱이라 칭할 상황이라면, 무언가 더 큰 카드를 쥐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제는 한 명의 기자들도 빠짐없이 한 사람의 입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을 때, 김문성 의원이 상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것.”
“……?”
김문성 의원이 갑작스레, 정체를 알 수 없는 통장을 꺼내 들자, 기자들 대부분이 고개를 갸웃한다.
“평화당 민수성 의원의 통장입니다.”
“……!”
김문성 의원의 발언에 몇몇 기자들이 작게 술렁였다.
민수성 의원의 통장이라니?
여당의 차기 당 대표로 거론되는, 실세 중의 실세의 통장이, 어떻게 상대 당인 김문성 의원의 수중에 들어 있는가?
기자들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김문성 의원이 곧바로 말을 잇는다.
“저는 얼마 전, 한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이 통장과 함께 투서를 하나 받았습니다.”
“투서라니, 대체 무슨 투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성격 급한 기자 한 사람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질문을 던진 기자에게 시선을 돌린 김문성 의원이 곧이어, 통장 첫 번째 장을 펼쳐 넘겼다.
마치 정말로 민수성 의원 명의의 통장이 맞다는 듯, 기자들을 향해 명의자 란을 내보인 김문성 의원이 다시 한 장을 더 펼쳐 넘겼다.
한쪽 손가락을 들어 통장의 한 부분을 가리킨 김문성 의원이 말을 잇는다.
“이곳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보시면 아시겠지만 불과 얼마 전, 장수일이라는 사람이 민수성 의원의 통장으로 돈을 보낸 기록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금액은 자그마치…….”
김문성 의원이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눈이 좋은 몇몇 기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
0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불과 하루아침에 민수성 의원의 통장에 들어간 돈은…….
“10억.”
“……!”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현직 국회의원의 통장에 입금시킨 돈이 자그마치 10억입니다. 그것도, 탄핵심판이 끝난 직후에 말입니다.”
“그 10억 때문에 민수성 의원이 북측과 어떤 모략을 꾸몄다, 이 말씀이십니까? 너무 지나친 억측 같은데요!”
진보 성향이 강한 언론사의 기자가 소리치자, 몇몇 기자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런 미묘한 시기에 그 정도로 큰돈이 현직 국회의원의 통장으로 입금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스럽지만, 그 정도 이유만으로 빨갱이 운운하기에는, 임팩트가 너무 부족하다.
“물론, 이 사실뿐이라면 저도 조금 단순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김문성 의원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또 꺼내 들었다.
온통 붉은색에, 상당히 자극적인 문구가 적힌 종이 한 장과 편지지 하나를 꺼내 든 김문성 의원이 소리쳤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삐라입니다. ‘현 정권을 타도하고,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하자!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 투서.”
김문성 의원이 이번에는 투서를 높이 치켜들며재차 소리쳤다.
“자신을 익명의 제보자라고 밝힌 이 투서에는, 평화당 의원들이 이번 탄핵 결과에 따른 북측의 보상금을 지급받았으며, 전 한반도를 적화시키기 위한 계획들을 상세하게 적어 놓았습니다.”
“……!”
“저는 오늘. 이 투서와 통장 모두를 정식으로 검찰에 수사 의뢰할 예정입니다.”
몇몇 기자들이 쩍 하고 입을 벌렸다.
특종이다.
그저 으레 있는 색깔론 전략을 펼치는 줄 알았더니, 제법 신빙성 있는 증거까지 가지고 왔다.
통장 자체가 조작되었다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다.
본인이 아니면 통장을 개설조차 하지 못할 뿐더러, 은행에 전화 한 통이면 통장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위조통장을 가지고 나왔을 리도 없다.
다시 말해, 김문성 의원의 수중에 있는 통장은 실제 민수성 의원의 통장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민수성 의원의 통장을 같은 당도 아닌 상대 당 의원, 김문성 의원이 가지고 있을까?
김문성 의원의 말대로, 수사기관에서 직접 확인을 해 봐야 알 수 있는 문제겠지만, 지금까지의 상황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특종이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이윽고 정신을 차린 기자들이 쉼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기 시작했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강렬한 플래시 세례 속에서도, 김문성 의원의 미소는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 * *
김문성 의원의 기자회견이 벌어지고 있는 그 시각.
여당인 평화당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의원들 개인 사무실은 물론 휴대폰 또한 쉴 틈 없이 벨소리가 울려 댔고, 각 보조관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이에 대응했다.
물론, 평화당 측 의원들도 곧바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근거 없는 모략을 펼친 야당의 행동을 비난하는 한편, 진위 여부를 확실히 밝혀 명예훼손죄로 처벌하겠노라,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평화당의 이런 발 빠른 대응에도 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국민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내재된 반공(反共) 감정과 두려움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검찰에서 곧바로 수사를 진행하더라도 진실을 확실히 밝혀내는 데는 최소 수 개월.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국민들의 지지도는 더욱 더 떨어질 것이다.
콰아앙!
현 평화당 대표, 박영동 의원이 책상을 내리쳤다.
박영동 의원은 과거부터 자신의 윗사람에게조차 쉽게 허리를 굽히지 않아, 꼿꼿장수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별명으로 알 수 있듯, 자신의 고집 또한 상당히 강한 인물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
박영동 의원의 외침에 평화당에 속한 나머지 의원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입이 있으면 누구, 말 좀 해 보세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의원들을 보며, 박영동 의원이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탕탕 쳤다.
“민수성 의원! 그는 지금 어디 있어요!?”
“그게… 지금 연락이 안 되고 있어서…….”
“그걸 지금 말이라고……!”
벌컥.
바로 그때, 한참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회의실 출입문이 조용히 열렸다.
의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모아졌고, 이내 회의실 내부로 들어서는 인물을 확인한 박영동 의원이 큰 소리로 고함쳤다.
“민 의원!”
“늦어서 죄송합니다.”
작게 고개를 숙인 민수성 의원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민수성 의원의 뒤를, 정승만과 도윤이 옅게 미소 지은 채 뒤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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