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축제
“이거, 이제는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배영준 기자가 제 팔을 쓰다듬으며 소름이 돋는다는 듯 중얼거리자, 호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안 본 배 기자님이 그렇게 느끼실 정도인데, 저는 오죽하겠어요?”
“하… 그것도 그러네요.”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린 배영준 기자가 TV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TV에서는 한참 김문성 의원의 긴급 기자회견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배영준 기자를 따라 잠시 TV를 들여다보던 호식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도윤이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는데, 저희는 앞으로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글쎄요… 강 검사님이 신호를 주기로 했으니, 스탠바이만 제대로 하고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이쪽이야, 전화 한 통만 하면 언제든지 준비된 기사가 포털 사이트 메인 페이지를 장식할 거예요. 물론, 배 기자님이 멋지게 써 주신 기사로 말이죠.”
호식의 말에 배영준 기자가 옅게 미소 지었다.
“저희 데스크에서도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단독 특종을 잡을 수 있는 기회인데, 떠먹여 주는 것도 못 먹으면 이쪽 바닥에서 떠나야죠. 이참에, 악(惡)에 굴하지 않는, 정의로운 언론사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도 있고 말이죠.”
“…도윤이 말대로, 말이죠?”
호식의 반문에, 배영준 기자가 옅게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악에 굴하지 않는 정의로운 언론사.
어떠한 외압에도, 오로지 객관적인 진실만을 밝혀,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는 믿음직한 언론사.
모두 도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회귀 전 도윤의 경험상, 흔히 말하는 국내 3대 메이저 방송사가 아닐지라도, 진실한 이미지의 한낱 케이블 방송이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충분히 경험한 바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물론, 도윤에게 완전히 매료된 배영준 기자는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데스크를 설득했고 말이다.
“이쪽도 제 전화 한 통이면, 회사에서 곧바로 기사를 내보낼 겁니다. 손가락들이 근질근질할 거예요. 언제 제 전화가 올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걸요?”
“뭐, 우리 둘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실세가 이렇게 소식이 없는데…….”
호식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 휴대폰을 흔들어 대자, 배영준 기자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도윤이 성격상, 아마도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극적인 상황에서 터뜨리려 할 거예요. 국민들의 불안감이 커질수록, 뒤통수를 맞았을 때의 분노 또한 커질 테니까요.”
배영준 기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빨리 대응하면 펜 굴리는 저희 기자들도 재미없죠. 세상에 충분히 알려지고 이제는 돌이킬래야 돌이킬 수 없는 상황,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 속에 찬물을 끼얹어야 저희 기자들도 희열을 느끼는 법이죠.”
“…….”
진심으로 흥분된다는 듯 온몸을 자르르 떠는 배영준 기자를 호식이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배 기자님도 조금 끼가 보이시네요.”
“예?”
“아닙니다.”
자신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배영준 기자를 보며, 호식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호식의 생각에, 도윤은 물론, 배영준 기자도 정상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상대 지위를 막론하고 일단 들이받고 보는 도윤이나, 이런 상황에 희열을 느끼고 있는 배영준 기자나…….
지금 자신은, 혹시나 일이 잘못될까 살이 떨려 미칠 지경이건만.
‘역시 내가 제일 정상이야.’
속으로 중얼거린 호식이 연신 ‘음, 음’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호식을 잠시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배영준 기자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어, 저기……!”
배영준이 손가락을 가리키는 TV 화면을 향해 시선을 돌린 호식도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막 새로운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다.
“…생쇼를 하고 있네.”
호식이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기자회견 때 발언대로, 곧바로 검찰청에 도착한 김문성 의원이 준비된 고소장을 검찰에 접수하고 있었다.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 검찰청까지 도착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이미 기자회견 전부터 변호사단을 꾸려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고 봐야 했다.
곧이어, TV 화면에 김문성 의원이 검찰에 전달하는 종이 뭉치가 클로즈업되기 시작한다.
일견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종이뭉치 가장 앞장에는 ‘민수성 의원 등 평화당 의원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수사 의뢰’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말이 좋아 수사 의뢰지, 야당이 여당을 상대로 제출한 고소장이나 다름없었다.
“저건 또 뭐야?”
또다시 뒤바뀌는 TV 화면을 보며, 호식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분명히 세상에 알려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건이건만, 서울 광장을 포함한 거리 일대에 태극기를 두른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나와 시위를 시작했다.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현 정권을 규탄한다’라는 자극적인 문구의 피켓을 든 채,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경찰들까지 미리 대기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불법 시위도 아닌 듯했다.
일반적으로 합법적인 집회·시위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 48시간 전에 해당 관서에 신고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저기 있는 사람들 또한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자유당에서 준비를 상당히 많이 했는데요? 저런 대규모 인력 동원이라니…….”
눈썰미가 좋은 배영준 기자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호식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식이면 별생각 없던 국민들까지 반공정신으로 무장을 하겠네요. 조금… 씁쓸하네요.”
호식의 말에 배영준 기자가 쓰게 웃었다.
남북이 분단되어 같은 민족끼리 으르렁거리고 있는 이 나라의 아픈 현실.
그리고, 그 상황을 이미 오래전부터 정치적 도구로 이용해 온 현재.
누구보다 비판 의식이 강한 배영준 기자 또한 호식과 같은 마음이었다.
“…바꾸기 쉽지 않을 거예요. 남북이 분단된 이래로, 긴 세월 동안 고착되어 온 문제니까요. 누군가, 정말로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밑바닥에서부터 뜯어고치지 않는 한…….”
배영준 기자가 씁쓸한 미소를 입에 문 채, 말끝을 흐렸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도 힘들지도요. 뛰어난 한 사람만이 무언가를 바꾸려 하는 것을, 이 나라는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을 테니까요.”
“…….”
배영준 기자가 입을 다문 채 조금 서글픈 낯빛으로 다시 TV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전 국민적인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만큼, 검찰에서도 발 빠르게 대응했다.
검찰총장인 김관우가 직접 나서 국민들에게 유감 성명을 발표하는 한편, 국정원과 최대한 협력하여 진실을 명백히 밝혀낼 것을 천명했다.
수천 명쯤 되던 거리의 사람들이 이제는 수만으로 불어, 국회 앞을 향해 대규모 이동을 시작했다.
자유당의 대표는 이제, 공개적으로 공식석상에 나와 여당을 비난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 * *
“난리네요. 자유당은 지금 축제 분위기겠죠? 딱 배 기자님이 원하는 상황이 되었네요.”
“네. 그래서 저도 지금 손이 근질근질해요. 이제 이 통화 한 통이면…….”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는 배영준 기자를 보며, 호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로 그때.
우우웅, 우우웅.
진동음이 3번이 채 울리기 전에, 호식과 배영준 기자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이내 발신자를 확인한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맞추곤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폰을 집어 든 호식이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누른다.
“어, 도윤아.”
“전화를 뭘 이렇게 빨리 받아?”
“몰라서 묻냐?”
“어지간히 흥분했나 보네?”
“흥분이야 나보다, 배 기자님이 더 했지. 조금만 더 있었으면, 아마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를걸?”
호식이 마치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자, 배영준 기자가 멋쩍게 미소 지었다.
“큭, 큰일 날 뻔했네. 그 양반, 한 번 꽂히면 니 말대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도윤이 실소를 터뜨렸다.
“알면 됐고… 지금 터뜨려?”
“…….”
호식의 물음에 도윤이 입을 다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한참 동안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호식이 고개를 갸웃한다.
“…강도윤?”
“…아, 그래.”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던 듯, 호식의 부름에 이내 정신을 차린 도윤이 대답한다.
“터뜨려.”
기다리던 대답이 들려오자, 마침내 호식이 씨익 미소 지었다.
“오케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호식이 배영준 기자를 돌아본다.
“…지금, 이죠?”
자르르 떨며 묻는 배영준 기자를 보며, 호식이 입에 미소를 베어 문 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 * *
“하하하하하. 다들 고생 많았어요. 정말로 고생 많았어요.”
기자회견을 마치고 뒷짐을 진 채, 회의실 내부로 들어서는 현 자유당 대표, 박태산을 발견한 자유당 의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님.”
“고생하셨습니다!”
자유당 의원들이 함박웃음을 지은 채 박태산 의원을 맞이했다.
“벼랑 끝에 몰려도 살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하늘이 이렇게 우리를 돕는군요. 하하하하하하!”
박태산 의원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우측에 서 있는 중년의 남자 의원을 돌아본다.
“박 의원.”
“예, 대표님.”
“이번 일 마무리되는 대로, 박 의원이 명성에 책임지고 직접 찾아가 감사표시하세요. 몇 가지, 원하는 요구도 좀 들어주고요.”
“알겠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거라고 해 봐야, 아마 일전에 있었던 컨밴션 센터 정책 지원 건이랑 이번 탄핵 기각으로 인한 손해 회복, 그리고, 이제는 늙은 오춘화 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문제. 이 정도겠지요.”
“제 생각도 그 정도 수준일 거라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요구하는 건 다 들어주는 방향으로 보답해 줘요. 이번 일.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니까. 그쪽에서 입 벌리면, 우리 쪽도 상당히 귀찮아질 테지.”
“…….”
“그들이 최대한 섭섭한 감정이 들지 않게. 내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알겠죠?”
“예, 대표님.”
박 의원이 짧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 의원.”
“네, 대표님.”
이번에는 좌측에 있던 상당히 단아하게 생긴 중년의 여자 국회의원이 대답했다.
“지금 거리에 동원된 집회·시위 인력, 몇 명이나 되죠?”
“저희가 동원한 인력이 정확히 9,837명. 분위기에 휩쓸려 섞여 든 국민들까지 합치면, 현재 집회, 시위 인원들은 2만 명은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2만이라…….”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 박태산 의원이 말을 잇는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가용 인원은 모조리 쓰도록 하세요. 자금이 부족하면, 명성이나 우리 쪽 기업들에 요청 좀 하면 되니까.”
“예. 알겠습니다. 먼젓번 일부 기업의 유령회사 설립 건 문제로 받아 둔 돈이 제법 남아 있어서, 아마 자금 융통은 크게 문제없을 겁니다.”
“모든 게 완벽하군.”
크게 고개를 끄덕인 박태산이 주변을 둘러본다.
“이번 일을 발판 삼아, 우리 자유당은 또 한 번 도약할 겁니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주세요.”
“예! 대표님!”
의원들이 큰 소리로 대답하며, 힘차게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짝, 짝, 짝, 짝, 짝, 짝.
아름다운 멜로디라도 되는 것처럼 그 박수 소리를 음미하던 박태산이 순간 멈칫한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상의 주머니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폰 진동음을 느낀 박태산이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박태산이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응, 나야.”
기분 좋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박태산의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변해 가기 시작한다.
이내, 1분의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뭐라고?”
박태산이 완전히 굳은 얼굴로 반문하는 소리가 회의실 내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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