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잡는 회귀검사-109화 (109/174)

109화 연극의 끝

자유당 의원들이 TV에 나오는 전 대한보육원장 강종팔을 발견한 그 시각.

박영동 대표를 포함한 평화당 의원들도 TV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그 인물이라는 게…….”

박영동 대표가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중얼거리자 도윤이 옅게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타이밍이군요. 아마 지금  쯤이면…….”

“대표님!”

순간 회의실 출입문이 벌컥 하고 열리더니, 한 중년 사내가 헐레벌떡 회의실 내부로 들어선다.

“김 보좌관……?”

지금 막 회의실로 들어서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자신의 수석 보좌관을 보며 박영동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급하게…….”

“인터넷, 인터넷 보셨습니까?”

“인터넷?”

박영동 대표가 반문하자 수석 보좌관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지금 인터넷이 난리가 났습니다! 국내 1위의 포털 사이트 메인 페이지가 완전히 도배가 되었습니다!”

“인터넷? 도배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이거, 이걸 보십시오!”

수석 보좌관이 미리 프린트를 인쇄해 왔는지, 손에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박영동에게 내밀었다.

“이건……?”

잠시 종이뭉치를 들여다보던 박영동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수석 보좌관의 말대로, 포털사이트 메인 페이지는 공통된 주제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단독! 김문성 의원의 투서, 모두 조작으로 밝혀져…….>

<충격! 자유당의 음해, 국민들에 대한 기만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전 대한보육원장 강종팔, 긴급 기자회견으로 사건 내막을 밝히기로 해…….>

단독 보도라는 이름으로 나온 기사들은 그 출처가 모두 같았다.

메이저 언론사가 아닌, 중소규모의 언론사 기사들이었기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될 듯싶지만, 그 내용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내용은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지금 이 포털 사이트를 도배하고 있는 기사들은 모두 한 가지만을 말하고 있었다.

자유당이 벌인 이 모든 일들이, 하나의 잘 짜여진 정치적 연극이었다는 것.

그것도 톱급 배우들과 최상의 준비물,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로 완벽한 시나리오까지 갖추어진, 역대급 연극 말이다.

그리고, 이제 그 연극에 악당이 등장할 시간이다.

“이 더러운 연극을 끝내려면, 슬슬 움직여야겠군.”

TV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의원들을 잠시 바라보던 도윤이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 *

전 대한보육원장 강종팔이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자, 준비하고 있던 남자가 곧바로 마이크 단상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을 기준으로 단상을 준비해 놓았었기에 조정은 불가피했다.

이윽고, 휠체어를 밀던 남자가 마이크를 건네받아 강종팔의 입 바로 앞에 가져다 대 주자, 작게 기침을 쿨럭이던 강종팔이 입을 열었다.“쿨럭…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 대한보육원장, 강종팔이라고 합니다.”

노인의 힘없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조용히 울려 퍼졌다.

어느새 기자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메모지와 펜을 꺼내 들어, 강종팔이 하는 모든 말들을 받아 적을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강종팔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의아함을 지울 수 없던 기자들이었다.

국민들의 이목이 모두 한 곳에 쏠려 있는 지금, 어지간한 인물의 기자회견 요청 따위는 충분히 뒤로 미룰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요청자라는 사람이 다름 아닌 서울중앙지검장 정승만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 검찰에 접수된 상황에서, 그 사건을 담당하게 될 기관장의 긴급 기자회견 요청.

어느 언론사가 그런 기자회견 요청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번 사건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기자회견이라는 언질까지 줬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기자들이 안다.

기자들도 눈과 귀가 있는 만큼, 포털 사이트에 도배된 기사들의 소식들을 모두 들었다.

지금부터 단상 위의 노인이 하는 말들이, 어쩌면 이 나라의 역사, 그 한 획을 그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 엄청난 기회를,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놓칠 리가 없다.

기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강종팔이 말을 잇는다.

“약 10여 년 전… 저는 모 기업과 전국에 수십여 개의 보육원을 추가로 설립하는, 그런 사업을 진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몇몇 기자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분명히 자신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일이었으니까.

“다들 아시겠지만 그 기업은, 지금도 세계에 그 위명이 대단한, 명성그룹입니다.”

이번에는 몇몇 기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기자들.

모 기업이 어느 곳인지 짐작하지 못하고 있던 그 기자들은, 명성이라는 이름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쾌한 거부감이 생겼다.

비판 의식이 그 누구보다 강한 것이 기자라는 이름의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명성이 해온 일들만 상기 해 봐도, 속이 뒤집어지는데 여기서 또 명성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도대체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연관이 되어 있을까?

기자들의 그런 의문점을 풀어 주기 위해, 강종팔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당시 사업 추진 예산이 100억 원이  훌쩍 넘었었죠. 명성 그룹을 포함하여, 몇몇 중소기업과 시민 단체들까지, 제법 많은 곳에서 사업에 동참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숨이 차는지 강종팔이 잠시 헐떡이자, 마이크를 손에 쥐고 있던 사내가 다른 손으로 물을 건넸다.

조용히 건네받아 물로 목을 축인 강종팔이 한차례 한숨을 내쉬곤 말을 잇는다.

“…그 돈들을 모두 모아, 사업 추진 주체인 명성그룹에서 본격적으로 보육원 설립 사업을 진행하였죠. 현금을 바리바리 싸서 건네는 분들도 있었고, 집에 남은 금붙이를 모조리 긁어모아 건네는 분, 통장을 통째로 넘겨주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때 저는 ‘아, 세상은 아직 따뜻하구나, 살 만하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강종팔이 말을 잇기 힘든 표정으로 잠시 말끝을 흐렸다.

“이제는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의 마음을, 이토록 처참하게 짓밟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명성에서…….”

성격 급한 기자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강종팔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업을 위해 통장을 건넸던 사람 중에는, 현 평화당 소속 민수성 의원님도 있었습니다.”

“……!”

강종팔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기자들이 쩍 하고 입을 벌렸다.

민수성 의원이 통장을 건넸고, 사업 총괄 역할을 맡은 명성에서 그 통장을 받았다.

연신 기침을 쿨럭이고 있는 강종팔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이제 기자들은 모든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민수성 의원 본인도 모르는 사이, 명성의 수중에 있어야 할 그 통장이 다른 경로로 유통되었다.

언제, 어디서, 누군가를 통해 유통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 최종 도착지가 바로, 자유당 김문성 의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민수성의 통장을 다른 사람도 아닌, 상대 당 김문성이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충격에서 빠져 나온 기자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기 시작할 때,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던 대회의실의 출입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모함입니다!”

순간 출입문 쪽에서 터져 나온 우렁찬 고함 소리에, 회의실 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앙다문 입매와 고집스러운 눈빛, 젊은 나이임에도 윗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당당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인물.

현 명성그룹의 실세, 박건우였다.

박건우의 정체를 알아챈 몇몇 기자들이 재빨리 카메라 렌즈를 출입문을 향해 돌렸다.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박건우가 죽일 듯한 눈초리로 단상을 바라본다.

곧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늙은이.

저 미친 늙은이 때문에, 다 된 일을 망치게 생겼다.

아니, 일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기업의 존속을 위협할 수 있는 심각한 위기까지 찾아왔다.

당장이라도 단상 위의 노인을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을 꾸욱 눌러 참은 박건우가 단상 위를 오르려고 하자, 대기하고 있던 경비원들이 그 앞을 막아선다.

“공식 기자회견입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명성그룹의 박건우입니다.”

“……!”

박건우의 짧은 한마디에 경비원들이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는 경비원들을 향해, 박건우가 품 안에서 신분증을 꺼내 들었다.

“저희 회사가 근거 없는 모함을 받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입장 표명을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지금 당장.”

낮게 중얼거린 박건우가 한 발 앞으로 나서자, 경비원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어, 어떻게…….”

“물러서 봐.”

순간 들려오는 현장 책임자의 말에 이내 경비원들이 조용히 물러섰다.

그쪽을 향해 잠시 감사의 눈빛을 보낸 박건우가 천천히 단상 위를 올라선다.

‘빌어먹을…….’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한 걸까?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박건우가 옆쪽에 비치된 또 다른 마이크를 거칠게 손에 쥐었다.

짧게 심호흡한 박건우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명성그룹의 부사장 직을 맡고 있는, 박건우라고 합니다.”

이제 주변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그 숨 막힐 듯한 침묵 속에, 박건우가 조용히 말을 잇는다.

“…지금 강종팔 씨는 저희 그룹 전체를,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국민들을 위해 힘쓰고 있는 의원님들을 모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존경하는 국민분들마저 기만하고 있습니다.”

“전 대한보육원장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성격 급한 기자의 외침에 박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대로입니다. 분명 강종팔 씨 말씀대로, 10여 년 전, 저희가 전국에 있는 보육원 설립 사업을 추진한 사실은 있습니다.”

“…….”

“어디까지나 불쌍한 아이들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고자 하는 취지에서 진행했던 사업이고, 좋은 취지의 사업이었던 만큼 많은 분들이 저희 사업에 동참을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박건우가 말끝을 흐리며, 한쪽 손에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들어 올렸다.

“저희 기억에도 없는 일일뿐더러, 그 어디에도 평화당 민수성 의원이 저희 사업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

“제가 손에 쥐고 있는 이 서류들이 그 사실을 증명하죠. 이 서류들에는, 당시 저희 사업에 동참했던 기업, 단체, 특정 인물까지, 모조리 기재가 되어 있습니다.”

잠시 종이뭉치들을 손에 쥐고 흔들어 보이던 박건우가 그 서류들을 탁하고 소리 나게 단상 위에 내려놓았다.

“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묻겠습니다.”

씹어 내뱉듯 중얼거린 박건우가 천천히 강종팔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종팔 씨는, 대체 무슨 근거로 민수성 의원이 저희 명성그룹에 자신의 통장을 건네줬다, 말씀하시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

“근거 없는 모함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 주신다면, 그 증거가 정말로 진실하다면, 저희도 다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박건우가 여전히 강종팔을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만약 그게 거짓이라면, 허위 사실 유포 죄가 되겠지요. 그때는 저희도 그룹 차원에서 정식으로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강종팔의 두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마치 충격을 받은 듯한 그 모습에 박건우가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증거?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이미 그때에 대한 기록 또한 모조리 말소해 버린 상태다.

그따위 것, 찾을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박건우의 미소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하는 그때.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여 대는군.”

한 남자가 회의실 내부로 들어서며 말했다.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박건우가 이내 사내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신음하듯 중얼거린다.

“강도윤…….”

박건우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청을 때리자, 피식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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