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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110화 (110/174)

110화 주객전도

박건우가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는 장소에 도착했을 무렵, 그와 비슷한 시간에 도윤도 그 장소에 도착을 했다.

그리고, 박건우가 단상 위로 올라가 입을 열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가 하는 말들을, 도윤은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단상 위의 박건우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과 언행은, 이제 육신이 스러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약한 노인의 마음마저 짓밟는 짓이다.

저 나이의 노인이 무슨 큰 꿈이 있고, 야망이 있겠는가?

그저 지난 세월, 자신의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곱씹으며, 저물어 가는 황혼의 마지막만을 기다리고 있는, 평범한 노인일 뿐이다.

그래서 화가 났다.

노인의 마음이 처참하게 짓밟힐 것을, 크게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노인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도.

애써 합리화하며 그런 상황들을 이용하려 하는 자기 자신에게도.

마음속 불꽃이 뜨겁게 타올라, 그 분노가 극에 달하면, 머리는 도리어 차갑게 식는다고 했던가?

박건우가 노인을 직접적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하자, 마침내 도윤이 나섰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여 대는군.”

걸음을 옮기며 낮게 중얼거리는 도윤의 목소리가 기자회견 장소에 모인 사람들의 귀에 분명하게 틀어박혔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도윤에게 집중될 무렵,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박건우가 신음하듯 말을 내뱉는다.

“강도윤…….”

“너희 명성에서 하는 일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미칠 것 같아.”

“……!”

여러 사람이 모인 기자회견 장소임에도,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쏟아지는 도윤의 과격한 발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박건우가 한차례 소리 나게 이를 갈자, 그때야 정신을 차린 선임 경비원이 크게 고함친다.

“뭣들 하는 거야!? 한 번도 아니고, 돌발 상황에 또 이렇게 어리바리하고 있을 거야!?”

선임 경비원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경비원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자회견 장소입니다! 나가 주시죠. 밖에 대기하고 있는 인원들은 뭣들 하는 거야!?”

선임 경비원이 재차 큰 소리로 외쳤다.

“그, 그게…….”

사내의 외침에 출입문 밖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한 경비원이 들어서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 뒤로 또 한 사람이 기자회견 장소 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자회견 장소에, 기자회견 주최자가 없으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내부로 들어서는 중년의 사내를 발견한 선임 경비원이 눈을 크게 떴다.

“정승만 검사장……!”

기자 중 한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그 목소리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또렷이 박혀 들었다.

경비원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누구보다 빨리 판단을 마친 선임 경비원이 재차 외친다.

“물러서!”

경비원들이 뒤로 물러서는 것을 확인한 정승만 검사장이 거침없이 단상을 향해 걸어간다.

그런 정승만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기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기자의 얼굴에는 다분히 참다못해 터뜨린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검사장님, 아무리 기자회견 요청자가 검사장님이시라지만, 이런 법은 없습니다.”

“……?”

순간 고개를 갸웃하는 정승만을 보며, 기자가 말을 잇는다.

“사전 계획에도 없이, 그것도 기자회견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끼어들어, 이렇게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드시다니요?”

“…….”

입을 다문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정승만을 보며, 그 기자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 조금 소리를 높여 계속 말한다.

“매스컴을 타고 지금 이 모든 상황들이 실시간으로 전국에 생중계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국민들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

“저희 기자들은 그런 국민들이 눈살 찌푸리지 않도록, 기자회견을 원활히 진행할 책임이 있습니다. 국민들은 이런 검사장님의 방해를 원치 않습니다.”

말을 마친 기자가 도윤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기자회견 요청자이신 정승만 검사장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쪽 분은 이만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보시다시피, 지금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한 상태입니다.”

“…….”

“이 기자회견을 지켜보고 계시는 국민 분들을 위해, 부탁드립니다.”

기자가 도윤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뒤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승만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통상적으로 기자회견이라 함은, 요청자, 다시 말해 기자회견 주최자가 직접 사전에 기자들과 논의하고, 회견을 진행함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주최자인 자신이 기자회견 장소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는 것이다.

평화당 의원들과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진 것도 있지만, 전 대한보육원장인 강종팔의 입장 표명부터 진행하는 것으로 사전에 기자들과 논의한 상태였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강종팔의 입장 표명이 끝나고, 예정된 대로 자신과 도윤이 나서, 기자회견을 정상적으로 끝마쳤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박건우가 기자회견 장소에 도착하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명성 쪽 인물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기자로서의 직업의식 때문인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남자는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기자회견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려 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정승만도 처음이었다.

마치 검찰 측 기자회견이, 강종팔과 박건우에 대한 기자회견으로 바뀐 듯한 모양새다.

뒤바뀐 기자회견을주도하는 것은 기자들이었고 말이다.

‘낭패다.’

정승만이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분위기로 봐서는, 여기서 도윤이 퇴장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상황이다.

이번 일을 처음부터 모두 계획한 도윤이 여기서 빠져 버리면 곤란했다.

물론 기자회견이 끝난 이후라도 지금 명성과 자유당의 모략을 저지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실시간으로 국민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상황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임팩트가 부족했다.

어느새 단상 위의 박건우도 비릿한 미소를 입에 문 채, 지금 이 상황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도윤이 등장했을 때부터 내심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박건우였다.

지난 수년 동안, 자신이 지켜봐 온 강도윤이라는 인물은 결코 의미 없는 행동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인물이 지금 이 장소에 나타났다는 말은, 무언가 숨은 한 수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빨리 나가라!”

묘한 분위기 속에, 기자 중 한 사람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 외침을 시작으로, 기자회견 장소가 떠들썩해지기 시작한다.

“그래, 이건 아니지! 무슨 중학교 토론회도 아니고, 기자회견 중인데 아무나 다 들어와서 자기들 할 말만 하고 있어!”

“지금까지 있었던 기자회견 중에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본다고!”

“빨리 나가라! 국민들은 알 권리가 있다!”

“더 이상 기자회견을 방해하지 마라!”

똑같은 행동이라도, 행하는 시점에 따라 주변의 반응도 천차만별이다.

분위기를 봐 가면서 행동해야 된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이만 나가셔야 할 것 같은데?’

자신을 바라보는 도윤을 향해, 박건우가 약이라도 올리듯 입 모양만 뻐끔거리며 말했다.

“…….”

그럼에도 도윤은 못이라도 박힌 듯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가라!”

“우리는 절차도 지키지 않는 몰상식한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게 아니다!”

“국민들을 기만하지 마라!”

분위기가 조금씩 험악해지자, 이내 정승만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거기까지!”

출입문 방향에서 우렁찬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마이크에 대고 외치는 듯, 그 엄청난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돌아갔다.

“무, 무슨 사람 목소리가…….”

한 기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소리의 주인공이 이내 내부로 들어선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큼직큼직한 이목구비.

전체적으로 붉은빛이 감도는, 건장한 체격의 중년 사내.

이제 그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누구도 경시(輕視)하지 않는 인물.

현 검찰 총장, 김관우였다.

“검, 검찰 총장님……!”

“논점을 흐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기자님.”

“……!”

김관우의 말에 정승만을 몰아붙이던 기자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기자님 말씀대로, 이번 기자회견의 주최자는 저기 있는 정승만 서울중앙지검 검사장. 다시 말해, 저희 검찰 측 입장 발표를 위한 기자회견입니다.”

“…….”

“다시 말해, 지금까지 강종팔 씨의 발언은 하나의 증언. 저희 측 발언에 힘을 싣기 위한 증인일 뿐, 강종팔 씨에 대한 기자회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김관우가 말끝을 흐리며 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단상 위를 바라본다.

“…….”

그 시선을 받은 박건우가 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명성그룹의… 박건우 씨에 대한 기자회견도 아니고 말이지요.”

“하지만…….”

“만약에!”

기자가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 김관우가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자님 말씀대로, 이에 대해 국민들에게 어떤 의문점이 남는다면,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의문 사항이 완전히 해소될 때까지 기자회견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김관우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기자가 입을 다물었다.

시간은 한정적이기에, 어느 기자회견이든 미리 정해 놓은 제한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김관우는 그런 제한시간 따위는 상관없이, 국민들의 의문점이 풀릴 때까지 기자회견을 진행하겠다고 한다.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느새 시끌벅적하던 건물 내부도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그 침묵 속에, 김관우가 조용히 말을 잇는다.

“다른 의견 없으시면, 다시 기자회견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박건우 부사장님도, 이만 내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

김관우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박건우도 결국 한숨을 내쉬며, 단상 밑으로 내려섰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도윤이 속으로 감탄했다.

존재감 하나로 분위기를 압도하는 인물.

도윤이 바라보는 김관우는 그런 인물이었다.

곧바로 손에 쥔 카드를 내보여, 상황을 반전시키려 했던 자신이 한심할 지경이었다.

도윤이 감사의 눈인사를 건네자, 그 눈빛을 받은 김관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

김관우가 말끝을 흐리자, 기자들의 시선이 다시 김관우의 입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자유당 김문성 의원이 제출한 증거와, 방금 있었던 전 대한보육원장 강종팔 씨의 증언이 있기 전부터, 저희 검찰은 이번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수사를 이미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

이번에는 내부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 그게 무슨…”

한 기자가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건을 접수받기 전부터, 이미 검찰에서 이를 알고 있었다니?

사건에 대한 진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인가?

기자들의 의문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 김관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자세히 설명드릴 예정입니다. 바로 저기…….”

김관우가 말끝을 흐리며 손가락으로 도윤을 가리켰다.

“이번 사건 담당자인, 유능한 강도윤 검사가요.”

김관우의 목소리가 건물 내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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