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대국민 사기극의 전말
지금 막 출입문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발견한 몇몇 기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장발에,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
언제 씻었는지, 얼굴 여기저기에는 거뭇거뭇한 때가 묻어 있었고, 입고 있는 옷 또한 반누더기나 다름없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노숙자 행색의 사내였다.
“으윽…….”
벙거지 모자까지 푹 눌러쓴 그 사내가 바로 앞을 지나치자, 한 기자가 코를 틀어막았다.
참을 수 없는 악취가 후각을 찔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뭐지……?’
사내를 발견한 박건우 또한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한창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던 도윤이 갑작스레 누군가를 불러들이기에, 이번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또다른 누군가 있나,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등장한 남자는 누가 봐도 역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숙자가 아닌가?
내심 긴장하고 있던 박건우는 탁 하고 맥이 풀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통장 수사니 뭐니, 신경 쓰이는 말만 골라서 하더니…….’
속으로 중얼거린 박건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회 하층민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저 따위 노숙자가, 이번 일에 대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이번 일의 정확한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과 일부 자유당 의원들을 포함하여, 회사의 초 극소수 인물들뿐이었으니까.
‘가만, 노숙자?’
한껏 비웃음을 입에 물고 있던 박건우가 문득 든 생각에 멈칫한다.
‘설마…….’
순간 제 팔뚝을 쓱 하고 문지른 박건우가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어느 누가 봐도 노숙자임이 틀림없는 사내.
지금 이 상황에서 등장할 수 있는 노숙자라면…….
어느새 도윤의 손짓에 따라 단상 위로 올라선 남루한 행색의 사내가, 연신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빨리, 이쪽으로…….”
“아니, 돈은 언제 줄 거요? 10만원이나 되는 돈을 선뜻 적선하기에, 혹시나 했더니 설마…….”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사내의 말에 도윤이 옅게 미소 지었다.
“제가 묻는 말에만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면, 아저씨뿐만 아니라 같이 있는 동료 분들까지, 충분히 먹고 마실 수 있는 술과 고기를 대접하겠습니다.”
“정, 정말이요?”
술이라는 말에 혹한 표정을 지은 사내가 반문하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반드시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여기, 많은 분들이 아저씨의 얘기를 들을 테니까요.”
도윤이 마치 들으라는 듯 ‘사실’ 이라는 단어를 유독 힘주어 말했다.
“알, 알겠소. 나 따위가 알고 있는 사실이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 만은…….”
이내 사내가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자, 도윤이 미소를 입에 문 채 묻는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자기소개라니…….”
“이름이랑 나이, 지금 하고 있는 일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말한다.
“공, 공상기라고 합니다. 나이는 올해 사십둘이고, 하는 일은 따로 없고, 주로 서울역 안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공상기? 공상기라면…….”
분명 들은 기억이 있는 이름이었기에 일부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아! 통장 명의자!”
사내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챈 한 기자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민수성 의원의 통장으로, 10억 원이나 되는 거금을 입금한 통장의 명의자.
그 이름이 분명 공상기라고 했다.
만약 눈앞에 있는 인물과 그 통장 명의자가 동일 인물이라면, 이번 일에 대포 통장을 이용하였다는 검찰 측 주장이 사실로 입증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10억이나 되는 돈을 유통시킬 수 있는 인물이, 길바닥에 신문지를 깔아 놓고 생활할 일은 없을 테니까.
“모두가 예상하신 대로, 민수성 의원의 통장에 10억 원을 입금한 통장 명의자와 눈앞에 있는 공상기 씨는 동일 인물이 맞습니다.”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중얼거리는 도윤의 말에, 기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
기자들의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도윤의 말대로라면, 사건이 검찰에 접수되고 하룻밤 사이에 그 많은 노숙자들 중, 공상기라는 인물을 찾아냈다는 거니까.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기자들이 빠르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자, 플래시 세례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공상기 씨는 노숙자입니다. 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 명의의 대포 통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죠.”
말을 마친 도윤이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공상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최근에, 본인 명의의 통장을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넘겨준 사실이 있죠?”
“그, 그게…….”
공상기가 우물쭈물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도윤이 안심하라는 듯 옅게 미소 지었다.
“본인에게 무슨 불이익을 주려고 묻는 게 아닙니다. 아까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저는 검사입니다. 만약, 이게 추후 문제가 된다면 제가 책임지고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도윤의 말에 고민에 잠겨 있던 공상기가 이내 결심을 굳힌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로 일이 커졌다면, 어차피 곧 들통나게 될 문제였다.
여기서는 차라리 사실대로 얘기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현명했다.
“그… 죄, 죄송합니다. 검사님 말씀대로, 얼마 전에 20만원을 받고 통장을 넘겨준 적이 있습니다.”
“혹시, 통장을 건네받은 사람, 이 남자가 맞나요?”
공상기의 말에 도윤이 기다렸다는 듯 품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 앞에 내밀었다.
잠시 휴대폰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공상기가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
“맞, 맞아요! 이 남자, 분명히 맞습니다! 일반적인 거래가보다 2배는 높게 쳐 주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조금 자세히 봤었어요. 워낙 인상이 험악해서, 확실히 기억납니다!”
이번에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기자들 또한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공상기가 통장을 누군가에게 팔아 치운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도윤이 그 통장을 매입한 사람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기자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 도윤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기자님들도 아시겠지만, 검사들에게는 각각 전문 분야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폭, 마약, 경제 사범, 통신 수사… 수없이 많은 수사 기법과 분야가 있고, 실력 있는 검사들은 제 나름대로 그 분야에 대한 정보망도 구축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 또한, 마찬가지고요.”
사실, 도윤과 같이 검찰 경력 자체가 얼마 되지 않는 신임 검사들에게 전문 분야를 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해내기에도 벅찬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단, 수십 년간 형사로서의 커리어를 가진, 도윤만은 예외였다.
굳이 전문 분야를 따지자면, 도윤은 조폭 범죄 전문가에 가까웠다.
“정보망이라면, 어떤 것을 말하는 건지요?”
한 기자가 조용히 손을 들며 질문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도윤이 박판섭을 앞세워 전국에 있는 모든 조직들을 통합하면서, 그쪽 바닥에 관한 정보들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그 아래에 있는 조직원들의 숫자만 족히 수만 명.
삼 면이 바다인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이름과 나이만 가지고도 찾고자 하는 사람을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 조폭들이었다.
하물며, 동종 업계(?) 종사자를 찾아내는 일 정도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기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말할 수야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조폭과 타협하는 검찰로 손가락질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정리한 도윤이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마약 범죄든, 재산 범죄든, 치정 살인과 같은 충동적인 범죄를 제외하고, 어떤 범죄에든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이 대포 통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윤의 말에 몇몇 기자들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동료 검사들이 국내에서 이름을 날리는 조직폭력배들의 계보를 외우고 있을 때, 저는 주로 대포 통장을 매입하고 되파는, 다소 급이 떨어지는 소규모 조직들에 대한 수사를 해 왔습니다.”
도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한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제 갓 들어온 신임 검사뿐만 아니라, 어떤 검사든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 커리어를 쌓고 싶어 한다.
국내 최대 규모의 조직 폭력 집단 혹은 마약 조직 일망타진이나 고위 공무원 비리 등과 같은 규모가 큰 사건의 해결이 그 대표적인 예다.
고작 대포 통장이나 거래하는 소규모 조직들에는, 그 어떤 검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엮어 넣을 수 있는 죄라고 해 봐야, 고작 벌금 얼마짜리 범죄였으니까.
도윤은 그런 생각을 가진 검사들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덤덤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대포 거래의 특성상 워낙 점조직 형태의 조직들이 많아, 그 모든 조직에 대한 정보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거든요.”
“…….”
“하지만, 이런 수년간의 노력이 헛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번에 비로소 느끼게 되었습니다.”
말을 잇던 도윤이 순간 출입문을 향해 크게 고함친다.
이 모든 일들의 마지막 퍼즐 조각.
“박상철 씨! 들어오세요!”
도윤의 외침과 동시에 출입문 밖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살짝 열린 출입문 틈 사이로, 한 남자가 경비원들과 가볍게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들여보내 주세요!”
재차 외치는 도윤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리자, 문밖에 있던 경비원들이 멈칫했다.
무어라 대화를 나누던 경비원들이 이내 조용히 비켜서자, 그 틈 사이로 한 사내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저런…….”
“세상에…….”
사내의 얼굴이 워낙 인상적이었기에, 기자들 또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상당히 작은 체구의 사내였는데, 빡빡 깎은 대머리 위로 호랑이 한 마리가 아가리를 쩍 벌린 채 포효하고 있었다.
아무리 조폭이라지만, 자신의 얼굴에 문신을 하는 것은 거부감이 들기 마련인데,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맞, 맞아요! 저, 저 사람!”
사내를 발견한 또 한 사람, 공상기가 크게 소리쳤다.
“저, 저 사람한테 돈을 받고, 통장을 팔았었어요! 분명히 기억해요, 저 호랑이!”
“……!”
공상기의 외침에 기자들의 눈이 더더욱 커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눈앞에 있는 사내가 이 일련의 사태를 해결할 황금 열쇠가 될 것이다.
찰칵.
한 기자가 조심스럽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자, 그게 신호가 되어 나머지 기자들 또한 분분히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눈살이 찌푸려지는 플래시 세례에도 거침없이 걸음을 옮긴 사내가 이내 단상 위에 섰다.
사내가 자신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도윤이 말없이 마이크를 가리킨다.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이내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댄다.
“아, 아.”
테스트라도 하듯, 가볍게 중얼거리던 사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박상철이라고 합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통장이나 거래하는, 밥버러지 같은 놈이지요.”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기자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상철이 말을 잇는다.
“저기 있는 사장님 반응을 봐서 아시겠지만, 저 사장님의 통장을 사들인 것 또한 제가 맞습니다.”
“…….”
“한때, 워낙 큰돈을 약속받아서 그대로 꿀꺽하고 중국이나 일본으로 잠수 탈까,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개똥밭이라도 제집이 좋다고, 차마 그러지는 못하겠더군요. 나라가 시끌벅적해지니, 죄책감마저 들었습니다.”
말을 잇던 박상철이 힐끗 옆에 서 있는 박건우를 바라본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꽈악 깨문 채, 부르르 떨고 있는 박건우를 보며 한차례 피식 미소 지은 박상철이 말을 잇는다.
어느새 그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매입한 통장은 곧바로 거액의 돈을 받고 되팔았습니다. 바로…….”
몸을 돌린 박상철이 손가락을 들어 박건우를 가리켰다.
“저기 있는 명성그룹의 부사장님에게요.”
“……!”
기자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쩍 하고 입을 벌렸다.
대포 통장을 매입한 사람이 명성그룹의 박건우였다!
그 말은,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이 정치적 공격을 위한 자유당과 명성그룹의 작전이었다는 소리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기자회견이 카메라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