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암시장
“11억. 문제없는 통장에 도장과 함께 동봉하여, 제가 말하는 장소에 묻어 주시기 바랍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박건우가 조금 귀찮은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그냥 계좌이체를…….”
“우리는, 당신과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시 눈을 크게 뜬 박건우가 뿌득 이를 갈았다.
가볍게 심호흡한 박건우가 말을 잇는다.
“후우… 좋습니다. 장소만 얘기해 주면, 사람을 보내 적당한 곳에 잘 묻어 두겠습니다.”
“감사…….”
남자가 채 입을 떼기도 전에 박건우가 말한다.
“그런데… 선수금은 분명 10억으로 얘기가 되었던 것 아닌가요? 나머지 1억은…….”
“이번 주 내로, 작업을 진행할 청소부들이 연변에서 국내로 밀입국할 예정입니다.”
“…….”
“입국 문제야 그쪽에서 공안을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알아서 하겠지만, 출국 문제는 의뢰자와 브로커 측에서 미리 준비해 주는 것이, 이곳 관례거든요.”
“…….”
“확실한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쪽에서 먼저 의뢰를 파기할 겁니다.”
‘그깟 관례 따위…….’라고 말하려던 박건우가 사전에 차단이라도 하듯 내뱉는 남자의 말에 움찔 몸을 떨었다.
이내 한숨을 내쉰 박건우가 말한다.
“그 짧은 기간 사이에, 정밀한 위조 여권을 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국내에서 열리는 암시장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자신의 물음에 도리어 되묻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박건우가 생각에 잠겼다.
암시장.
마약과 장기, 문화재나 국고에서 빼돌린 각종 예술품, 총기.
뿐만 아니라 성과 인간 노예까지 거래되곤 하는 곳이 바로 암시장이다.
물론 박건우도 암시장의 정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전부터 명성의 식구들이 싸질러 놓은 똥들을 뒤처리하는 것은, 모두 자신의 몫이었다.
한때 마약과 장기거래 분야에 있어서, ‘큰손’이라 불렸던 명성인 만큼, 암시장의 정체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다.
“국내 암시장이라면, 이번 달은 이미 폐장했을 텐데?”
국내에서 열리는 암시장은 한 달에 단 한 번 개장된다.
정해진 개장 날짜가 따로 없었으며, 그 장소 또한 항상 바뀌었기 때문에 초대받지 않은 고객은 애초에 언제, 어디서 암시장이 개장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역시…….”
수화기 너머로 잠시 감탄한 기색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사내가 말을 잇는다.
“이번 달은 암시장 개장이 두 번 있는 날입니다.”
“그게 무슨…….”
처음 듣는 얘기였기에, 박건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팬스 조직이 오늘 밤, 국내로 들어옵니다.”
“……!”
사내가 말한 팬스는 다국적 대규모 장물아비 조직을 말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박건우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팬스가 이곳으로 온다고……?”
“예. 팬스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사람들만 참가할 수 있기에, 아마 모르실 겁니다. 중요한 건, 팬스에는 지금 저희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 있다는 거죠.”
“복사기!”
박건우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쳤다.
복사기.
신분증이나 여권 따위를 전문적으로 위조하는 업자를 지칭하는 은어다.
국내에도 이런 업자들이 제법 많이 있지만, 그 능력 면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세계적 규모인 팬스의 업자들보다는 질이 떨어졌다.
무엇보다, 청부살인과 같은 사회적 이목을 끌 만한 일들이 발생하면, 공항이나 항구의 보안 검색이 한층 강해지기 때문에 특히 신경 써야 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박건우가 입을 열었다.
“그 암시장, 나도 참가할 수 있습니까?”
“예?”
“일전에 얘기했었죠. 작업을 할 때에는, 나도 꼭 함께 가고 싶다고.”
“하지만 그 일은…….”
브로커 사내가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복수심이 상당히 강한 사람이나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고객들이 간혹 이런 부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브로커의 권한 밖의 문제였다.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업자들이 따로 있는데, 자신이 무슨 수로 의뢰자에게 확답을 줄 수 있겠는가.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업자들이 고려할 문제입니다. 의뢰 조건이 바뀐 것을 알면, 그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두 배.”
“……?”
“그 조건 받아들이면, 의뢰금을 두 배로 드리겠습니다. 선수금 20억에, 성공 보수 40억. 총 60억짜리 의뢰입니다.”
“……!”
박건우의 말에 브로커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대어다.
이 정도 수준이면, 정부 고위인사급 규모의 의뢰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브로커 사내가 대답한다.
“바로 연락해 보고,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이 바뀌기 전에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박건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나.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
사람도, 자리도, 권력도.
원하는 건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다.
단 하나, 갑작스레 찾아오는, 암세포 같은 것들을 제외하고는.
“확실하게 도려내 주마.”
스산하게 중얼거린 박건우가 하얗게 미소 지었다.
* * *
덜컥!
“배 기자님!”
“어억……!”
사무실 출입문이 거칠게 열림과 동시에 터져 나온 고함 소리에, 에이 포 용지에 열심히 기사를 써 내려 가고 있던 배영준이 화들짝 놀랐다.
“심, 심장 떨어지겠습니다. 장 변.”
빠직.
호식의 이마에 십자마크가 선명하게 아로새겨졌다.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죠?”
“…정감 가고 좋지 않습니까? 자고로 애칭이란,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 친밀감도…….”
“제가 배 기자님한테, 배레기라고 하면 어떨 것 같아요?”
“뭐, 뭐요? 배레기?”
호식의 말에 이번에는 배영준이 발끈했다.
“지금 두 발 벗고 뛰는 기자들을 모욕하시는 겁니까!?”
“아, 그러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라고요!”
“에라이, 똥이다!”
“이… 이……!”
호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하려 할 때, 갑작스레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어머? 배 기자님도 계셨네요?”
“신… 신혜 씨!”
배영준의 말에 호식의 고개가 홱 하고 뒤로 돌아갔다.
어느덧 허리까지 기른 긴 생머리와 늘씬하게 쭉 뻗은 각선미가 뭇 사내들의 감탄사를 자아낼 만한 미인, 황보신혜가 그곳에 서 있었다.
“신, 신혜야, 말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야?”
“지나가다 오빠 생각나서 왔지. 요즘 둘 다, 사무실에서 아예 살다시피 하고 있는 것 아니까.”
말을 마친 황보신혜가 두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층층이 쌓인 도시락이 양손 가득 들려 있었다.
“안 들어 줄 거야?”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가지고 왔어!? 줘, 당장 줘.”
잽싸게 달려간 호식이 황보신혜의 손에 들려 있는 도시락들을 빼앗듯 넘겨받았다.
“배 기자님도 식전이시죠? 밥 먹고 하세요.”
황보신혜의 말에 배영준이 옅게 미소 지었다.
“신혜 씨가 직접 만든 겁니까?”
“네.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손재주가 그리 좋지 않아서…….”
“무슨 소리! 우리 신혜만큼 손재주 좋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먹기 싫으면 먹지 말라고 해!”
흥분하여 소리치는 호식을 보며, 배영준이 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여기서 한 마디 더했다가는, 내일 해가 뜨는 것도 못 보겠네요.”
“오빠!”
빼액 하고 소리치는 황보신혜를 보며 호식이 움찔했다.
“미, 미안…….”
“배 기자님 무안하시게 자꾸 그럴 거야!?”
“안, 안 그러겠습니다.”
호식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배영준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장 변도 나처럼…….’
속으로 중얼거린 배영준이 왠지 모를 측은지심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신혜 씨. 요즘 너무 바빠서, 예민해져 있는 상태일 거예요. 신혜 씨가 장 변… 호사님, 잘 좀 케어해 주세요.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잤거든요.”
“어머, 그래요?”
순식간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변한 황보신혜가 호식을 바라본다.
“미안해, 오빠.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니야, 아니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넘치는 게 체력뿐인데, 뭘!”
순간 호식과 눈이 마주친 배영준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잠시 황보신혜의 눈치를 살피던 호식도, 배영준을 향해 가볍게 마주 윙크한다.
‘당신의 죄를 사하겠습니다.’
속으로 중얼거린 호식이 황보신혜의 손을 잡고 재빨리 소파로 이끌었다.
“자, 자. 배가 등가죽에 붙을 것 같은데, 일류 쉐프가 만든 음식부터 들고 합시다.”
“영광입니다, 쉐프.”
호식의 말을 배영준이 받자, 황보신혜가 살포시 얼굴을 붉혔다.
“두 사람 다, 정말…….”
“그럼, 어디…….”
이윽고 호식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도시락 뚜껑을 활짝 열었다.
“오, 오……!”
호식과 배영준이 동시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마치 황금빛깔과 같은 샛노란 계란말이.
금방이라도 지글거릴 듯한 떡갈비 사이사이에는 그냥 보기에도 쫄깃해 보이는 자그마한 떡들이 드문드문 붙어 있었다.
압권은 그 아래층, 밥이 있는 곳.
붉은 밥알에 참기름이 가볍게 발라져,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갈 만한 볶음밥 위로, 계란 프라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도 그냥 계란 프라이가 아니라, 각종 야채 데코레이션으로 꾸며진, 닭 모양의 계란 프라이 말이다.
“와…….”
연신 감탄사를 내뱉던 배영준이 순간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데, 계란 프라이로 닭을 만들어 놓으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하네요. 마치 채 닭이 되지 못한,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채 스러져 버린 병아리의 한(恨)이 느껴진 달까…….”
“그, 그런…….”
배영준의 말에 황보신혜의 두 눈가에 물기가 촉촉해졌다.
“아니 누가 기자 아니랄까 봐, 뭔 하나하나에 다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
발끈하는 호식을 보며, 배영준이 재빨리 말을 잇는다.
“농담, 농담입니다. 그런데, 웬 닭이죠? 무슨 의미라도……?”
“아, 오빠가 치킨집에 제법 많은 돈을 투자했거든요. 갑자기 생각나서, 대박 나라고 한번 이렇게 꾸며 봤어요.”
“역시…….”
호식의 얼굴이 감동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호식 씨, 저번에 치킨집에 투자하신다고 하셨죠? 분명, 호식 씨 이름과 똑같은 치킨집이었던 것 같은데…….”
“맞아요. 호식이 세 마리 치킨!”
배영준의 말을 황보신혜가 받았다.
“흐, 흐흐, 흐흐흐흐흐흐.”
“……?”
갑작스레 낮게 웃기 시작하는 호식을 보며, 배영준과 황보신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오빠……?”
“호식 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난 호식이 어디론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이내 자신의 자리 앞에 도착한 호식이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누군가 그랬던가요, 한 하늘 아래, 태양이 두 개일 수는 없는 법이라고.”
“…….”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호식을 보며, 배영준과 황보신혜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보기에, 지금의 호식은, 마치 사업에 막 실패한 실업자의 모습 같았다.
배영준이 가볍게 혀를 차는 순간, 빠르게 두 사람에게 다가온 호식이 테이블 위에 손에 쥔 무언가를 탁 하고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이건……?”
호식이 정성스레 스크랩해 놓은 신문 기사 하나가 가장 먼저 배영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신문 기사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호식이 세 마리 치킨! 2004년 6월, 프랜차이즈 대상 수상!>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한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지만, 밤이 되면 태양 대신 달이 떠오르는 법이지! 나도 한다면 하는 놈이다, 이거야!”
이윽고 기세등등한 호식의 외침이 사무실 내부를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
호식의 광소가 길어질수록, 나머지 두 사람의 침묵도 길어졌다.
과연 저 자신만만함이 어디까지 계속될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래의 일은 신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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