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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117화 (117/174)

117화 사타부언

철문을 열자마자 앞을 막아서고 있는 사내를 발견한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입고 있는 옷차림만 봐서는 영락없는 시설 수리공 정도로 되어 보이는 젊은 사내였다.

철문 내부 또한 갖가지 환풍 시설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큰 위화감도 없었다.

말없이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사내를 향해, 박판섭이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초대, 받고 왔는데.”

박판섭이 내민 종이를 향해 힐끗 시선을 돌린 사내가 이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이쪽으로…….”

사내의 입에서 마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앞장서 걷기 시작하는 사내의 뒷통수를 잠시 바라보던 박판섭이, 도윤에게 고개를 돌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고개를 끄덕여 준 도윤이 사내를 뒤따르기를 잠시.

구석에 위치한 기계장치 앞에 이르러 사내가 우뚝 하고 걸음을 멈췄다.

“……?”

도윤이 의아한 얼굴로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그그그긍.

이윽고 움직이기 시작한 사내가 기계장치를 두 손으로 밀어내자, 거친 쇳소리와 함께 장치가 조금씩 움직였다.

“……!”

기계장치가 완전히 밀려나고, 마침내 드러난 또 다른 공간에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뻥 뚫린 밑바닥 아래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시꺼먼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제법 어둡기 때문에, 조심해서 내려가셔야 할 겁니다.”

함께 내려갈 생각은 없는 듯, 제 임무를 다한 사내가 원래 위치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당히 무뚝뚝한 친구인데? 그래도 나름, 몇 안 되는 VIP 고객인데…….”

“가자.”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박판섭을 일별한 도윤이 먼저 그 시꺼먼 공간 안으로 몸을 던졌다.

“같이 가!”

박판섭이 재빨리 도윤의 뒤를 따랐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휴대폰 불빛에 의지한 채, 얼마간 내려갔을까?

‘이래서 지하 4층이라고 한 거군.’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하 3층까지밖에 존재하지 않는 건물에, 지하 4층을 얘기하기에 무슨 말인가 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공간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일반적인 회사 건물이나 백화점 따위의 초고층 건물 최상층에는, 보통 그곳에서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들만의 사무실이나 공간을 만들어 두곤 한다.

무엇이든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는, 권력자들의 심리가 겉으로 표현된 대표적인 예 중 하나였다.

반대로, 기밀이나 숨기고 싶은 비밀 따위를 위한 공간은 이렇게 지하 따위의 음지에 만들어 놓는 경우가 많다.

책장 뒤에 숨겨진 또 다른 비밀의 방 또한 마찬가지의 경우였고 말이다.

‘보통 구린 냄새가 짙은 놈이 이런 공간을 만들어 두곤 하지…….’

쿵!

속으로 중얼거리던 도윤이 순간 멈칫했다.

‘쿵?’

도윤이 손에 쥔 휴대폰을 앞으로 내밀자, 시꺼먼 철벽이 나타났다.

‘막다른 길……?’

도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을 때, 박판섭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아, 여기서부터는 내가 앞장설게.”

철벽 앞에 선 박판섭이 손을 들어 올리더니, 이내 일정한 박자로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쿵, 쿵 쿵쿵.

‘월드컵 응원 박자……?’

아직도 4강 신화라는 열기가 채 가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대~ 한민국!’ 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실없는 생각에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 때, 마침내 철벽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덜컹.

짧은 소음과 함께 눈높이 정도의 위치에 구멍이 생겨나더니, 새파란 눈동자 한 쌍이 나타났다.

박판섭이 또다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자, 잠시 그것을 살피던 철벽 너머의 인물이 그대로 작은 창을 닫았다.

잠시 후.

끼기기기기기긱.

듣기 싫은 쇳소리와 함께 철벽이 밀려나기 시작한다.

‘이중, 삼중으로… 보안유지는 정말 철저히도 하는군.’

도윤이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 이내 철벽이 완전히 밀려났다.

키가 큰 서양인 한 사람과 중년의 동양인 한 사람이 양옆에 서 있다.

그리고, 짧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자그마한 문이 또 하나 위치하고 있었다.

‘아마 저 안쪽이 암시장이 열리는 진짜 장소겠지.’

도윤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박판섭이 익숙한 몸놀림으로 품 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들었다.

은행에서 막 환전했는지, 빳빳한 100달러짜리 지폐였다.

“땡큐, 땡큐. 드링크, 드링크.”

굳이 ‘캬~’라는 소리까지 내며, 손에 쥔 지폐를 서양 남자의 상의 주머니에 꽂아 준 박판섭이, 그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

박판섭의 행동에도 서양 사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구태여 그 돈을 되돌려 주려 하지는 않았다.

“세상 사는 법을 아는 친군데?”

“…….”

도윤이 자신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르는 박판섭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기를 잠시.

갑작스레 서양 사내가 뒤쪽에 있던 테이블 밑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들기 시작한다.

“…하회탈?”

이내 사내가 꺼내든 물건들을 발견한 박판섭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초승달과 비슷한 눈 두 개에, 입 하나.

하나는 대표적인 모양새를 가진 오리지널 하회탈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양 볼에 곤지가 찍힌 여자 하회탈이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아니지, 대한민국에 왔으면 대한민국 법을 따른다, 이건가?”

“……?”

의아한 표정을 짓는 도윤을 돌아보며 박판섭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암시장의 특성상 참가자들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한데, 보통은 서양풍으로다가, 무도회 가면 따위로 참가자들의 얼굴을 가려 그 정체를 알 수 없도록 하는 게 일반적이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하회탈이네?”

박판섭이 두 개의 하회탈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도윤을 향해 하나의 하회탈을 슬쩍 내밀었다.

“…….”

도윤이 말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박판섭이 제 머리를 긁적였다.

“…좀 봐줘라. 이 나이에, 내가 볼따구에 분칠이나 하고 다닐 수야 없지 않겠나?”

“…….”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도윤을 보며, 박판섭이 말을 잇는다.

“나 20세기파 박판섭이야.”

“…….”

“제발 좀…….”

박판섭의 간절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정말 믿기지가 않는군…….”

하회탈을 착용한 채, 박건우가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등포에 위치한 건물, 숨겨진 지하 4층.

이곳은 그 크기도 크기지만, 취급하는 물품들 또한 지금까지 박건우가 겪어 왔던 여느 암시장보다 훨씬 더 엄청났다.

우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특성상,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인간 노예 따위는 발견할 수 없었지만, 그 외의 물건들은 모두 존재하는 듯했다.

한쪽 구석에서는 권총과 소총을 포함한 각종 총기류들을 취급하고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필로폰, 모르핀, 생아편 따위의 마약류를 취급하고 있었다.

각 물건들 앞에는 물건의 가격으로 보이는 숫자들이 적혀 있었는데, 같은 물건이라도 상태와 품질에 따라 그 값이 조금씩 달랐다.

“저건……?”

박건우가 한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옆에서 걷던 사내가 그 목소리를 용케 듣고는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

사내의 말에 박건우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 청부살인 사건을 중간에서 연결하는 브로커.

자신을 제로라고 소개한 사내는 박건우를 만났을 때부터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여 제 얼굴을 숨겼다.

그리고, 이곳 암시장에 들어온 이후에는 턱수염까지 붙어 있는 양반탈을 착용한 상태였다.

브로커들이 의뢰자로부터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기려 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벼랑 끝까지 내몰린 평범한 사람이 우연한 기회로 브로커와 연결되고,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청부살인을 의뢰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뢰자 대다수가 힘을 가진 권력자들이었다.

그런 힘 있는 권력자들이 청부살인을 의뢰하고,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을 때.

가장 먼저 시도하는 것이 완벽한 증거의 은폐였다.

사타부언(샤티엔비엔).

중국 광동지방 방언이자, 조선족 인신매매조직들의 은어로도 사용되는 이 단어의 의미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이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 권력자들은, 이러한 증거의 은폐를 위해 사건의 내막을 모두 알고 있는 브로커들을 죽여, 입막음을 시도하곤 했다.

누구보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는 브로커들의 특성을 생각하면, 자신을 제로라고 칭하는 옆의 사내 또한, 진짜 브로커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가볍게 머리를 흔들며 상념을 지워 낸 박건우가 입을 열었다.

“저기 있는 아이스박스들. 모두 장기들이겠죠?”

“여기서는 꽃게상자라고 부릅니다.”

“…….”

“의뢰자님 말씀대로, 저기 있는 것들은 모두 사람의 장기가 맞습니다. 어린 아이의 것부터 20대 건장한 사람의 장기까지. 공급 자체가 워낙 다양하니, 이곳에서도 제법 인기가 많은 편이죠.”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모인 아이스박스 주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사내가 중얼거렸다.

박건우가 여전히 그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사내가 계속 말을 잇는다.

“저기 있는 장기들은 대부분 중국 사람들의 것입니다. 워낙 넓은 땅덩어리에 머릿수도 많아서, 사람 몇 없어진다고 당국에서 크게 신경 쓰지도 않거든요. 중국의 공안은, 돈에 쉽게 매수되기도 하고.”

“…….”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라는 시장은 이쪽 업계 사람들에게 분명히 매력적인 곳입니다. 공급이 힘든 것에 비해,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니까요.”

“…….”

“이곳 암시장에서는 장기 판매뿐만 아니라, 직접 수술을 집도할 의사들까지 연결해 줍니다. 물론, 소개료와 수술비는 별도로 들지만요.”

“…이런 곳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따위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지도…….”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박건우를 잠시 바라보던 사내가 말한다.

“아무래도, 세계 최고 수준의 팬스이기 때문에, 이 정도 물량도 유통이 가능한 것이겠지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사내가 말끝을 흐리며 구석에 위치한 작은 방을 가리켰다.

“위조 여권이야 그리 많은 시간이 드는 것도 아니니, 우선 정보라도 미리 수집해 보죠.”

“정보?”

사내의 말에 박건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국가기밀이나 기업비밀, 심지어 의뢰자님의 회사 전략실에 보관된 정보들까지, 이곳으로 흘러 들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

“간혹 뉴스에 회사 기밀을 빼돌려 상대 업체에 팔아치운 임원들에 대한 이야기가 보도되곤 하는데… 그 사람들, 한 곳에만 정보를 파는 것이 아니거든요.”

“…….”

“주제넘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복수만큼 재기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박건우는 굳은 듯 제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재기.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말이다.

이미 오춘화 회장에게 완전히 내쳐졌고, 이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갑갑한 교도소 생활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재기라니…….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묘한 감정에 박건우가 하회탈 너머로 쓰게 웃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았던가?’

작게 고개를 흔든 박건우가 무심코 사내가 가리킨 작은 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

지금 막 작은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발견한 박건우가 눈을 크게 떴다.

길고, 늘씬하게 뻗은 큰 키를 가진 사람과 그에 비해 상당히 작은 체구를 가진 사람.

체격으로 봤을 때는 두 사람 다 남자로 보였는데, 한쪽이 묘하게 박건우의 눈에 익숙했다.

‘고작 뒷모습일 뿐인데, 이 더러운 기분은…….’

순간 눈을 빛낸 박건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번 가 보죠.”

“…….”

“당신 말대로, 어쩌면… 의외로 엄청난 정보를 얻을지도…….”

말을 잇는 박건우의 두 눈빛은 어느덧,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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