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의뢰
박건우와 브로커 사내가 작은 방 내부에 들어서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또 다른 문 3개.
각 출입문의 상단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는데, 아마 방 번호인 듯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암시장이 열리는 이곳에 도착하고, 처음 듣는 여자 목소리에 박건우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 또한 하회탈의 일종인 각시탈을 쓰고 있었는데, 탈 뒤쪽으로 긴 생머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곳은 특정 정보들을 취급하는 곳입니다. 국가 기밀이나 기업비밀, 개인 신상까지. 필요하다면 능력 범위 내에서 사람을 보내 직접 알아봐 드리기도 합니다.”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완벽한 서구형 몸매였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은 유창한 한국말이다.
박건우가 잠시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 여자가 말을 잇는다.
“물론, 의뢰자분의 등급에 따라 제공할 수 있는 정보 범위는 제한될 수 있습니다.”
“등급?”
하회탈 너머의 박건우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암시장에서 등급이라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박건우의 반문에 여자 대신 옆에 있던 브로커 사내가 대답한다.
“암시장에서 유일하게 구매자의 등급을 따지는 곳이 이곳입니다.”
“구매자의 등급이라니… 정보를 사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제공되는 정보의 수준도 다르다, 이 말인가?”
“그 말 그대로입니다. 정보라는 것이, 따로 정해진 가격이 없다 보니 저쪽에서 부르는 게 그대로 정보의 가격이 되는 실정입니다. 당연히, 진상은 미리 거르고 싶은 거겠죠.”
말을 잇던 브로커 사내가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계속 말한다.
“그게 아니면… 자신들이 취급하는 정보를 구매자가 감당할 수 있는지, 그 여부에 따라 사람을 가려 정보를 팔려고 할 수도 있죠. 정보상들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요.”
“음…….”
침음을 삼키는 박건우를 일별한 브로커 사내가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여자에게 내밀었다.
브로커 사내에게 종이를 건네받은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일반등급이군요. 앞에 보이는 2번 방으로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
여자의 말로 추측했을 때, 아무래도 자신들보다 앞서 이곳에 들어간 두 남자들은 1번방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잠시 1번 방과 2번 방을 번갈아 바라보던 박건우가 묻는다.
“국내. 그러니까, 한국에 있는 특정 기업의 비밀도, 이곳에서 알 수 있습니까?”
“…기업비밀의 경우, 해당 기업의 규모와 수준에 따라, 취급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곳 수중에 있는 정보들이나 저희 능력 범위 내에서 알아낼 수 있는 정보에 한해서지만요.”
“…….”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 생각하던 박건우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국내 재계 20위… 아니, 10위권 내의 기업들은요?”
“…….”
박건우의 물음에 여자가 입을 다문 채, 그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파악하고자 하는듯한 모습이었다.
박건우 또한 진심이라는 듯 여자의 각시탈을 마주 바라봤다.
묘한 대치 속에, 조금의 시간이 지나 이윽고 여자가 말한다.
“…죄송하지만, 그 정도 수준의 기업비밀들은 앞에 있는 방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저희 능력 밖의 일일 가능성도 높구요.”
“…아마 제가 손에 쥐고 있는 초대장이, 어디까지나 중간 브로커들에게나 제공되는 수준의 초대장이기 때문에 저러는 거…….”
자신의 귀에 입을 바짝 붙여 속삭이는 브로커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건우가 품 안에서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명성의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박건우 자신의 명함이었다.
“……!”
갑작스러운 박건우의 행동에 브로커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암시장에서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킬 줄이야!
이런 곳에서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어 하는 권력자들은 아무도 없다.
아니, 오히려 더욱 더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려고 했다.
암시장에 들락거린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박건우가 신분을 노출시킨다고 자신에게 어떤 큰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브로커 사내는 더 나아가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
박건우로부터 명함을 건네받은 여자가 눈에 띌 정도로 움찔 몸을 떨었다.
“명성의 부사장. 이 직책이라면, 알 수 있습니까?”
“…잠시, 탈을 벗어 주실 수 있습니까?”
박건우의 물음에 오히려 여자가 되물었다.
박건우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 내렸다.
“으음…….”
이내 박건우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가 묘한 침음을 내뱉었다.
“제 얼굴을 알고 있나 보군요.”
“…일단은, 저도 정보원이니까요.”
한차례 한숨을 내쉰 여자가 한쪽 구석으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특정 부분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여자가 한쪽 벽면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화악 하고 걷어 냈다.
“……!”
당연히 벽일 거라 생각한 박건우가 조금 눈을 크게 떴다.
워낙 어두컴컴한 공간이라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벽 색깔과 비슷한 커튼으로 묘하게 위장해 놓은 듯했다.
“VIP실입니다.”
“…….”
“이쪽으로…….”
말을 마친 여자가 커튼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괜찮으십니까?”
곧바로 걸음을 옮기려던 박건우가 브로커 사내의 물음에 멈칫한다.
“…어차피, 제가 직접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뒤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결국 나락으로 떨어질 운명이라면… 혼자보다는 둘이 낫겠지요.”
스산하게 중얼거린 박건우가 이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박건우의 예상대로 1번 방에 들어선 두 남자.
그중 일반적인 하회탈을 착용한 키가 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청부살인 조직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국내 조직뿐만 아니라, 최근 10년 이내에 국내에서 단 한 번이라도 활동한 이력이 있는 조직들까지, 모두요.”
“청부살인 조직이라… 혹시, 누군가 죽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
정보판매상의 물음에 키가 큰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사내의 반응을 보며, 정보판매상이 작게 손사래 쳤다.
“오해는 마십시오. 의뢰자분들의 신원보호와 보안유지는 저희가 특히 더 신경 쓰는 부분입니다. 단지, 청부살인이나 인신매매, 납치 따위는 이쪽에서도 도움을 드릴 수 있거든요.”
“그게 무슨…….”
이어지는 정보판매상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작은 체구의 각시탈을 쓴 남자가 입을 열었다.
“팬스에서, 청부살인과 인신매매까지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요. 저희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장물아비들. 중간다리 역할만 할 뿐입니다. 저희와 연관된 수많은 조직들에는, 청부살인이나 인신매매를 하는 집단들도 분명히 있거든요.”
“…….”
정보판매상이 말을 마치자, 하회탈 너머, 키가 큰 남자의 두 눈빛이 깊게 가라앉는다.
키가 큰 남자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각시탈 사내가 재빨리 말을 잇는다.
“직접 의뢰할 건 아니고, 조금 알아볼 게 있어서 그러니, 조직들에 대한 정보만 추려 주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희 수중에 충분히 있는 정보이기 때문에,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겁니다. 대충…….”
잠시 생각하던 정보판매상이 곧이어 대답한다.
“문서 정리까지, 1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단, 청부살인을 하는 조직들이 워낙 자신들의 보안에 신경을 쓰다 보니, 그만큼 품이 많이 드는 정보들인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 생각보다 많은 정보비가 청구될 수도…….”
“상관없소. 누락 없이, 확실히만 정리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하니,
그동안 다른 곳도 한 번 둘러보고 오시죠.”
“…알았소.”
말을 마친 각시탈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모든 대화가 끝이 났음에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키가 큰 남자를 보며, 각시탈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불길한 생각에 각시탈 사내가 재빨리 키 큰 남자를 일으켜 세우려 할 때, 한발 먼저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음?”
“이번 암시장 이후로도, 팬스는 지속적으로 국내에 암시장을 개장하겠지요?”
탈 너머의 정보판매상이 옅게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한국도 분명 매력적인 시장이기에, 3년에 한 번씩은 꼭 이곳을 방문하곤 합니다. 거래 실적에 따라, 방문 주기가 더 짧아질 수도 있구요.”
“…….”
“물론, 실적에 따라 구매자분들의 등급을 올려 드리기도 합니다. 부디, 앞으로도 많이 이용해 주십시오.”
“앞으로도, 계속…….”
의미 모를 말을 작게 중얼거린 키 큰 남자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예. 조금 후에 뵙겠습니다.”
정보판매상이 허리를 숙이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두 사내가 문을 나섰다.
“하아~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또 무슨 사고라도 치려는가 했더니…….”
밀실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각시탈을 쓴 작은 체구의 사내, 박판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키 큰 남자, 도윤의 어깨를 박판섭이 가볍게 두드렸다.
“잘 참았어, 영감님. 기분 잘 알겠는데, 지금 여기서 터뜨려 봐야,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
“쓰레기 같은 놈들…….”
갑작스럽게 욕지거리를 내뱉는 도윤을 보며 박판섭이 입을 다물었다.
“직접 범죄를 저지르는 놈과, 뒤에서 범죄를 부추기는 놈. 어느 쪽이 더 쓰레기일까?”
“음…….”
“둘 다 똑같은 쓰레기들이야. 아니,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음지에서 일을 지원하고, 부추기는 저런 놈들이 더 악질의 쓰레기들이지.”
“…….”
“저런 놈들이 국내 어딘가에 계속 존재하는 한, 그에 따른 피해자들 또한 지속적으로 발생하겠지.”
씹어 내뱉 듯 중얼거린 도윤이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속으로 굳게 결심한 도윤이 이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설마, 명성그룹의 부사장님이 이런 곳에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는 가면을 완전히 벗어 던진 박건우를 보며, VIP실 전담 정보판매상이 말했다.
“신분을 밝히셨음에도,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점, 이해해 주시길…….”
“상관없습니다.”
박건우의 대답에 탈 너머의 정보판매상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바쁘신 분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어떤 정보가 필요하십니까?”
“납치 의뢰 하나와 국내에 있는 특정 기업에 대한 정보.”
말을 마친 박건우가 품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지난 1년간, 집요하게 뒤를 캐내었던 두 사람 중 하나.
“이름은 강단비. 서울 소재 대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자세한 신상 정보는, 서류로 정리해서 넘겨드리죠.”
“…기초 조사는 해 봐야겠지만, 크게 어려움은 없는 의뢰군요. 알겠습니다. 이 문제보다는, 아무래도 후자가 본안인 것 같은데…….”
정보판매상이 박건우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특정 기업이라 함은, 어디를 말씀하시는 거죠?”
“…….”
정보판매상의 물음에 박건우가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기를 잠시.
이윽고 박건우가 타오르는 듯한 시선을 들어, 입을 열었다.
“KS그룹.”
“……!”
“그에 대한 모든 정보가 필요합니다.”
밀실 내부에 고요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