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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119화 (119/174)

119화 역공

박건우와 브로커 사내가 의뢰를 마치고 밀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거닐고 있을 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브로커 사내의 목소리에 박건우가 고개를 돌렸다.

“강 검사의 여동생 의뢰 건이야,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KS그룹은…….”

브로커 사내가 말끝을 흐리자, 박건우가 입을 열었다.

“제로라고 부르라고 했나요?”

“예? 아, 예.”

미묘하게 미간이 꿈틀대던 박건우가 말을 잇는다.

“당신이 그 꼴같잖은 가명을 얘기할 때, 제가 단 한 번이라도 그에 대해, 무어라 말했던 적이 있던가요?”

“…….”

오로지 눈치로만 한평생을 살아온 브로커 사내는 박건우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브로커 사내를 보며, 박건우가 계속 말한다.

“그게 아니면, 이제는 당신도 내가 우스워 보입니까?”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브로커 사내가 곧바로 깊게 허리를 숙이자,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건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숨기고 싶은 비밀이 많다면, 남의 비밀을 알려고 하지도 마세요. 그거, 상대방 입장에서 상당히 불쾌한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잘 알겠습니다.”

이내 고개를 돌린 박건우가 잠시 한쪽 구석을 응시한 채, 조용히 말한다.

“…어차피 이것과 관련하여 당신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 있으니, 질문에 대한 답은 해 드리겠습니다.”

“부탁이시라면……?”

브로커 사내의 반문에 박건우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의 두 눈을 바라본다.

“이번에 자유당과 우리 그룹에 있었던 좋지 않은 일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언론에 알려진 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브로커 사내의 어중간한 대답에 박건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쪽 업계에서 정보만큼 강력한 무기는 찾기 힘들 테니까.

“좋습니다. 설명을 하는 데, 그 정도 기본 지식이면 충분하겠죠. 수십 년 전, 전국적인 고아원 설립 사업에 참여했던 건, 저희 그룹뿐만이 아닙니다.”

“명성만이 아니라니…….”

“언론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심으로 고아원 설립을 지원하던 다른 기업과 민수성 의원을 포함한 개인들.”

말을 잇던 박건우가 잠시 먼 곳을 바라본다.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박건우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중에는, 장호성도 있었죠.”

“장호성이라면, 설마…….”

브로커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호성이라는 인물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KS그룹의… 부회장……!”

브로커 사내가 침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현 재계 10대 그룹 중 하나인 KS그룹의 부회장.

그 아버지인 회장의 신임까지 한 몸에 받아, 차기 KS그룹을 이끌 수장으로 확실시되는 인물.

“내가 이번 사태로, 정말 화가 나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

멍하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브로커 사내를 보며, 박건우가 씹어 내뱉듯 말을 잇는다.

“핏덩이 같은 놈에게, 하찮은 여론몰이 따위로 이 지경까지 몰렸다는 사실. 그게 너무 화가 났습니다.”

“…….”

“눈에 보이는 증거 따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애초에, 그런 것들은 모두 내 손으로 직접 없애 버렸으니까요. 지금은 그때의 기록조차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박건우가 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스산하게 눈을 빛냈다.

“그런데, 핏덩이 하나가 등장하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법 그럴듯한 연기자까지 섭외해서, 완벽한 연극을 국민들 앞에 선보였지요.”

“…….”

“누군가, 민중은 개돼지라고 말했지요. 개돼지들은 기본적으로 판단 능력이 떨어집니다. 눈앞에 보이는 화려한 연극에 쉽게 현혹되고, 그중 다수가 예스라고 외치면 자신들은 그저 우르르, 따라갈 뿐이지요.”

말을 마친 박건우가 콰득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입안에 감돌기 시작할 무렵, 박건우가 다시 말을 잇는다.

“여론몰이. 직접 할 때는 그렇게 짜릿하던 그 일이, 당할 때는 이토록 더러운 기분이라는 것.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박건우의 두 눈빛이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 그 더러운 기분을 그대로 되돌려 줘야겠지요.”

“그대로 되돌려 준다니…….”

브로커 사내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렸다.

갑작스럽게 KS그룹 얘기를 꺼내기에, 이번에는 또 어떤 모략을 꾸미는가 했더니, 밑도 끝도 없는 황당한 얘기만 이어졌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있는 명성의 부사장은 지금 새로운 판을 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울어진 판을 다시 뒤집으려고 하는 듯했다.

이미 언론에서는 연일 자유당과 명성그룹을 비난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고, 여론 또한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다.

결코 자유당이나 명성에 유리한 상황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런 상황에서, 제 목숨 건사하기도 힘든 박건우가 이따위 황당한 얘기만 하고 있으니…….

브로커 사내의 미간이 점차 찌푸려질 무렵, 박건우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쪽에서 A급 배우를 섭외했으니, 이쪽에서도 그에 걸맞은 배우가 나서는 게 맞겠지요.”

“…….”

“배우는 이 내가 될 겁니다.”

“……!”

이어지는 박건우의 말에 브로커 사내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배우가 부사장님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엄밀히 말하면, 나는 명성의 핏줄이 아닙니다. 개돼지들뿐만 아니라, 언론인들이 보기에도 명성을 위해 내가 목숨까지 바칠,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

“수십 년간 명성에 몸담았다는, 충신이라는 꼬리표? 핏줄이 아니라면, 그따위 것은 상관없습니다. 제 목에 칼이 들어왔을 때, 목숨까지 바쳐 가며 주인을 지키려는 충신은 역사를 통틀어도 몇 없었으니까요. 더군다나, 그 주인이 국민들 앞에 대역죄인인 상황이라면 더더욱…….”

박건우라 타오르는 듯한 시선을 들어 브로커 사내를 바라본다.

“이미 파멸만이 남은 인생. 이렇게 혼자 억울하게 갈 수는 없겠지요.”

“…….”

“마지막 의뢰입니다. 선수금은… 100억.”

100억이라는 말에 브로커 사내가 또다시 눈을 크게 떴다.

“계약을 무사히 마쳤을 때, 추가로 200억 더. 총액, 300억짜리 의뢰입니다.”

“그, 그런…….”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브로커 사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건우가 계속 말한다.

“의뢰는 간단합니다. 내가 만약 이번 연극에도 실패하여, 일이 잘못된다면… 강도윤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인물들까지, 모조리 이 세상에서 지울 것.”

말을 마친 박건우가 품 안에서 메모지 한 장을 꺼내 브로커 사내에게 건넸다.

“강도윤과 그 동생, 놈의 친구 장호식과 조력자인 박판섭, 그 외 관련 인물들은 모두 거기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 잘못될 때를 대비하여 의뢰 성공 보수를 묻어 둔 장소까지.”

이어지는 박건우의 말에 브로커 사내가 잘게 몸을 떨었다.

이곳에 오면서,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이미 권력의 맛에 충분히 물들 대로 물든, 대기업 부사장이라는 사람이 이토록 처절해질 수도 있었던가?

아무래도, 박건우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평가해야 할 듯싶었다.

상념에 빠져 있던 브로커 사내가 이내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대답한다.

“그 의뢰… 받아들이겠습니다.”

* * *

“영감님, 너무 태평한 것 아니야?”

총기들이 진열되어 있는 한쪽 구석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는 도윤을 보며, 박판섭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엉? 뭐가?”

“아니, 괜한 걱정일 수도 있지만, 내가 또 이쪽 바닥에서는 제법 잔뼈가 굵은 편이잖아.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박판섭이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자, 이내 총기들에서 시선을 땐 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 청부살인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다른 쪽으로는 영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본론만.”

도윤의 짧은 대답에 한숨을 내쉰 박판섭이 이내 말을 잇는다.

“동생, 있다고 하지 않았어?”

“…….”

“이쪽 바닥에 있는 애들. 영감님도 잘 알겠지만, 상당히 추잡하고 더러운 놈들이야. 놈들이 쓰는 수법 중에, 납치와 협박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말을 잇던 박판섭이 도윤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아마 영감님 가족한테도 분명히 무슨 수를 쓸 거야. 힘을 쥐고 있는 놈들은, 상대방을 그냥 죽여 버리는 것보다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설설 기게 만드는 데에서 더 큰 희열을 느끼는 족속들이니까.”

이어지는 박판섭의 말에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걱정 안 해도 돼.”

“…응?”

“나라면 몰라도, 단비라면 놈들이 절대 해를 끼칠 수 없을 테니까.”

“오……!”

박판섭이 낮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역시, 거기까지 생각해 뒀다, 이거지? 어디 아무도 모르는 무인도에 꽁꽁 숨겨 놓기라도 했어?”

“아니. 그보다 더 확실히 안전히 보장되는 곳.”

“……?”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박판섭을 보며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 지금 내 동생은, 그곳에 있거든.”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잠시 도윤의 말을 따라하던 박판섭이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 들어 올렸다.

“영민하신 영감님이 어련히 알아서 준비하셨겠지. 그럼 우리는, 킬러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는 건가?”

“준비해야 할 게 한 가지 더 있기는 한데…….”

도윤이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설마, 지금 당장 이곳을 박살 내겠다든가,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도윤을 보며, 박판섭이 휘휘 하고 손사래 쳤다.

“아서라, 영감님, 제발. 지금 닥친 일들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나 좀 살게 해 줘라.”

“…잠깐만.”

손을 들어, 박판섭의 입을 막은 도윤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권력의 정점을 맛본 놈이, 과연 나 하나 입을 막는 것으로 만족할까?’

박판섭이 처음에, 다른 쪽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 유난히 신경에 거슬렸다.

지금 청부살인에 대해 도윤이 하고 있는 일들은, 전적으로 예지의 대가라는 이능력에만 의지한 채 행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과연 이것만으로 충분할까?

어느 순간부터, 본신의 능력은 무시한 채, 이능력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이어질수록 도윤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너무 안일했어.’

도윤이 속으로 자책하며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갑작스레 바닥만 바라보며, 온몸을 잘게 떠는 도윤을 보며 박판섭이 입을 열었다.

“영감님……?”

“…하아.”

이내 정신을 차린 도윤이 한차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 순간.

“……?”

정면에서 걸어오는 두 사람을 발견한 도윤이 멈칫했다.

두 사람 중 좌측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유난히 도윤의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분명 하회탈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묘하게 낯설지 않은 사람.

도윤의 시선을 느꼈는지, 정면에서 걸어오던 사람들도 어느새 걸음을 멈춘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묘한 대치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

소리 없는 침묵을 깨고, 마침내 도윤과 사내가 서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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