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확신하다
“실, 실례합니다.”
“오……!”
지금 막, 자신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수석 보좌관 뒤로,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평화당 박영동 대표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쭉 뻗은 늘씬한 키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진 귀여운 인상이 묘하게 조화를 이뤄, 한 번쯤 뒤돌아보게 만들 외모의 소유자였다.
“모시고 왔습니다.”
한차례 고개를 숙인 수석 보좌관이 입을 열자, 박영동 대표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강단비 양, 맞나요?”
“예? 아, 예.”
소녀, 강단비의 대답에 박영동 대표가 미소 지은 채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요. 평화당 대표 박영동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한국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강단비라고 합니다!”
강단비의 대답에 박영동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한국 최고의 명문대에 이토록 미인이라니… 정말 영광입니다. 이런 걸, 우월한 유전자 집안이라고 하던가요?”
“아, 아니에요! 미인은요. 오히려 제가 영광인걸요?”
얼굴을 살짝 붉힌 강단비가 작게 손사래 쳤다.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박영동의 수석 보좌관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고생했어요.”
“예. 그럼…….”
이내 몸을 돌린 수석 보조관이 출입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자, 박영동이 강단비에게 손짓했다.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 뒀네요.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밝은 목소리로 외친 강단비가 조심스레 자리에 앉자, 박영동도 그 맞은편으로 가 자리했다.
“꿈이 정치인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맞나요?”
“아, 네! 제 전공도 정치외교학과입니다!”
박영동의 물음에 강단비가 힘차게 대답했다.
강단비가 정치인이라는 꿈을 꾸게 된 것은 꽤 오래 전부터였다.
부모님이 한날한시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가해자인 상대 운전자 또한 음주로 인한 책임감경 사유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게 되었을 때.
그 누구보다 짙은 절망감을 맛보았던 사람이 바로 단비였다.
어린 자신과 오빠는 일순간에 천애 고아가 되었는데, 사고 당사자는 교도소에서 고작 몇 년만을 복역하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후에도 그 사람은 자신들에게 찾아와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합의금 명목으로 법원에 공탁한 돈 몇 푼이 전부였다.
화가 났다.
부모님을 잃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고, 음주라는 이유만으로 형이 감경되는 이 나라의 법에 화가 났다.
어린 마음에 분노라는 그 감정을 참아 내지 못해, 검찰청에 법원까지 찾아가 하소연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법이 이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 대답을 들었을 때, 결심했다.
법 때문에 가해자를 엄벌(嚴罰)할 수 없다면, 그 법을 바꿔 놓겠노라고.
내 스스로 그 법을 바꾸는 주체가 되겠노라고.
어린 시절부터 썩 공부를 잘했던 단비였기에, 결국 대한민국 최고라는 한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합격증을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물론,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인 오빠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반드시…….’
그때의 일이 떠오른 단비가 제 주먹을 힘주어 꽈악 말아 쥐고 있을 때, 박영동 대표가 말한다.
“그 나이에 정치인이라는 꿈을 꾸는 친구들은 정말 흔치 않은데, 여러모로 대단해요.”
“꼭 대표님 같은 정치인이 되고 싶습니다!”
박영동의 말에 정신을 차린 단비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단비의 대답에 짓궃은 미소를 지은 박영동 대표가 말을 잇는다.
“단비 양의 롤 모델은 내가 아니라 우리당의 민수성 원내대표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 그건…….”
순간 단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단비를 보며 박영동 대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박영동 대표는 지금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자신도 딸만 둘 있는 딸딸이 아빠였지만, 바쁜 일정 탓에 가족들과는 하루 말 몇 마디 나누는 것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딸들이 모두 시집을 가고 난 뒤에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 소식조차 제대로 듣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이니, 어찌 눈앞에 있는 단비가 지금 보이는 모습들이 귀여워 보이지 않겠는가?
“물론 민수성 의원님도 존경하지만! 박영동 대표님도 그 못지않게 존경합니다! 굳, 굳이 표현하자면…….”
“……?”
단비가 얼굴을 붉힌 채 말끝을 흐리자, 박영동 대표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엄마랑 아빠 중에, 누가 더 좋냐는, 그런 느낌이랄까…….”
“뭐? 허허허허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으시다?”
“그, 그런!”
화들짝 놀라는 단비를 보며 또 한 번 너털웃음을 터뜨린 박영동 대표가 말한다.
“단비 양, 나중에 정치 상당히 잘하겠어요?”
“아…….”
“농담이에요, 농담.”
홍당무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단비를 향해 손사래 친 박영동 대표가 말을 잇는다.
“인사는 이쯤 하고, 슬슬 일어나 볼까요?”
“네? 일어나다니, 어디를……?”
“응? 오빠가 얘기 안 하던가요?”
단비의 반응에 박영동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대표님이 정치에 대해 이것저것 가르쳐 주실 거라고, 한 일주일 정도 시간 비워 두라는 얘기만…….”
이어지는 단비의 말에 박영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로 무책임할 줄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박영동 대표가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기야, 이것 또한 그 어린 친구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한가?
자신들에게 있어, 그 어린 친구가 누구보다 더 위대한 영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말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럼 바로 수업 진행해 볼까요?”
“경청하겠습니다!”
단비가 재빨리 등에 지고 있던 배낭에서 종이와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아, 넣어 둬요, 넣어 둬. 일단 현장체험학습부터 하자구요.”
“현장체험학습이요?”
단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험이란 건, 원래 직접 체험해 봐야 하는 거거든. 강 검사가 부탁한 것도 있고…….”
“오빠가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잇는 박영동 대표를 보며 단비가 반문했다.
“짐 다 챙겨 왔으면, 바로 출발해 볼까요?”
“잠, 잠깐만요, 대표님!”
말을 마친 박영동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단비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박영동 대표를 보며, 단비가 다급히 외쳤다.
“대표님! 혹시… 여의도로 가는 건가요?”
“아니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한 박영동 대표가 출입문을 나서기 직전, 마지막 말을 잇는다.
“종로. 그곳으로 갈 겁니다.”
* * *
이윽고 하회탈을 뒤집어쓴 두 사람이 지하 4층 정중앙에서 마주했다.
두 사람의 묘한 대치에도, 주변 사람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제 일에 집중했다.
마치 주변과 두 사람 사이의 공간만 따로 분리해 놓은 것 같은 분위기 속에, 이윽고 옆에 있는 사내와 똑같은 양반탈을 착용한 인물이 입을 열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던가요?”
“……!”
사내가 입을 여는 순간, 맞은편에서 대치하고 있던 도윤은 직감했다.
놈이다!
자신의 예상대로, 눈앞에 있는 놈은 명성의 부사장이자, 지난 1년간 자신의 뒤를 쫓은 박건우가 확실했다.
하회탈 너머, 도윤의 눈빛 사이로 기괴한 안광이 스쳐 지나가기를 잠시.
‘지금은 놈이 여기 왜 있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분명, 놈도…….’
도윤이 생각을 이어 가고 있는 순간에도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다.
굳이 얼굴 표정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도윤은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사내의 가슴팍에서 보랏빛 광채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으니까.
질끈 하고 입술을 깨문 도윤이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사장님?”
어느새 다가왔는지, 또 다른 탈을 쓴 사내가 바로 옆에서 도윤을 불렀다.
“부탁하신 것,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만……?”
“오……!”
속으로 쾌재를 부른 도윤이 짐짓 감탄사를 터뜨리며, 옆을 돌아봤다.
예상대로, 예의 정보판매상이 옆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네요.”
길게 말해 봐야 의심만 살 뿐이다.
일부러 선이 가는 목소리로 바꾸어 대답한 도윤이 한차례 고개를 숙이곤 몸을 돌렸다.
이것만으로 의심을 완전히 벗겨 낼 순 없겠지만, 확신으로 변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으리라.
“실례…….”
말을 마친 도윤이 밀실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음…….”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양반탈을 쓴 사내, 박건우가 침음을 삼켰다.
의심이야 들지만, 사내를 붙잡아 뒤집어쓰고 있는 탈을 벗겨 낼 순 없는 노릇이다.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고객들의 신상 보호에 주의를 기울이는 장소.
그런 짓을 했다간, 드문드문 눈에 보이는 도깨비 탈을 뒤집어쓴 덩치들의 손에 끌려 나갈 것이다.
잠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박건우도 이내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위험했군.”
밀실 내부로 들어온 도윤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위험해? 뭐가?”
도윤의 옆에 있던 박판섭이 탈 너머,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까 나랑 대치하고 있던 그 사람.”
“엉? 아는 사이야? 아까는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더니……?”
“당신도 잘 알걸?”
이어지는 도윤의 말에 박판섭이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잘 알다니? 그게 무슨…….”
“박건우.”
“……?”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박판섭의 두 눈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누, 누구라고?”
“박건우. 명성의 부사장. 다음에는 빵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곳에서 다시 만날 줄은…….”
도윤의 말에 박판섭이 입을 쩌억 하고 벌렸다.
박건우라니!
명성의 부사장이, 이런 암시장에 직접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박판섭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윤이 상념에 빠져들었다.
박건우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정보보다도 큰 의미가 있었다.
파멸밖에 남지 않은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수없이 많이 봐 왔지 않은가?
이것 하나만으로도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로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너 또한 명성. 그곳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인간이었지.’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주인이나 개나, 어찌 그리도 닮았는지…….”
도윤이 씹어 내뱉듯 중얼거리고 있을 때, 어디론가 사라졌던 정보판매상이 서류 몇 장을 손에 쥐고 다시 나타났다.
“국내 조직뿐만 아니라, 국내를 무대로 단 한 번이라도 활동한 기록이 있는 청부살인 조직들. 그 목록입니다.”
“…….”
“목록 아래에, 저희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세부설명도 첨가했으니 참고하시면 될 듯합니다.”
사내에게 건네받은 서류들을 잠시 살펴보는 척하며, 도윤이 생각했다.
‘확인해야 한다. 놈이 정확히 이곳에서 무얼 하려고 했는지.’
박건우 정도 되는 인물이 고작 청부살인을 위해 이곳까지 직접 나타났을 리가 없다.
“…고객님?”
정보판매상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도윤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정보비는 얼마죠?”
“기본적인 정보들이긴 하지만, 청부살인 조직 자체가 워낙 베일에 싸여 있다 보니, 정보료가 제법 됩니다만…….”
“결론만.”
도윤이 사내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10억입니다. 그냥 편하게 이쪽 통장으로 계좌이체 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말을 마친 정보판매상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바로 입금해 드리죠.”
말을 마친 도윤이 옆을 돌아보자, 박판섭이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문자 하나 보내 줄게. 이쪽으로 10억, 바로 입금시켜. 하고 나면 전화 주고. 그래.”
이내 통화를 끊은 박판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 곧바로 통화가 걸려왔고.
“…확인해 보시죠.”
“에이, 뭘 확인까지야…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고객님.”
깊게 허리를 숙이는 정보판매상의 말과는 달리,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물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윤이 눈을 빛낸다.
‘이곳에서 확인해야 한다.’
결심을 굳힌 도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이용해도 될까요?”
도윤의 말에 멈칫한 정보판매상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그 어떤 정보든,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이미 돈맛을 본 정보판매상의 태도도 달라졌다.
그런 정보판매상을 보며, 도윤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명성.”
“…예?”
“명성그룹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
도윤의 말에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가능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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