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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121화 (121/174)

121화 박건우의 계획

박건우가 지하 암시장에서 서류 더미를 품 가득 짊어지고, 밖으로 나온 지도 벌써 하루가 지났다.

“눈 좀 붙이시지요. 벌써 꼬박 하룻밤입니다.”

“…….”

브로커 사내의 말에도, 박건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뒤적이기 바빴다.

한차례 한숨을 내쉰 브로커 사내가 박건우가 뒤적이고 있는 서류 더미를 힐끗 바라본다.

그룹 대외비로 불리는 회사 합격자 관련 정보부터, 오너 일가의 가족관계, 그룹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에 대한 정보까지.

그 모든 서류들에 KS그룹에 대한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기대는 안 했지만, 딱히 건질 만한 정보는 없군요. 찔러 볼 수 있을 만한 건, 이 정도인가…….”

박건우가 테이블 한쪽에 따로 빼놓은 서류들을 손에 쥐었다.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와 비교하면, 확연히 적은 양의 서류들.

박건우가 입을 열자, 이때다 싶었는지 브로커 사내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이것들로 무얼 하시려고 하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

브로커 사내의 물음에 박건우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다소 길어지자, 제 머리를 긁적인 브로커 사내가 말을 잇는다.

“비밀이라면 굳이 말씀 안 해 주셔도…….”

“이전에 얘기한 적이 있지요? 이번에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 판을 짤 것이라고.”

“…예. 분명히, 판을 새로 짜는 것이 아니라 뒤집을 거라는 얘기도 하셨지요.”

잠시 고민하던 브로커 사내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바로 하루 전의 일이기도 했고, 워낙 황당한 얘기라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나는 국민들이 손가락질하는 대상을 명성에서, KS그룹으로 바꾸어 놓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입니다. 평화당과 민수성 의원에 대한 근거 없는 모략. 그 모든 것은, 명성이 아닌 KS그룹이 꾸민 짓이다.”

“……!”

이어지는 박건우의 말에 브로커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이쯤 되니, 브로커 사내는 박건우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민수성 의원 통장 사태가 자유당과 명성그룹이 음지에서 꾸민 더러운 수작질이라는 것을, 이제는 온 국민들이 다 알고 있다.

저 대단한 자유당 의원들마저 꼬리 자르기에, 집안싸움에, 어떻게든 자기 밥줄만은 지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판국에, 그것을 뒤집어 놓겠다?

그것도, 10대 그룹이라는 KS그룹에게 죄를 뒤집어씌워서?

“…진심이십니까?”

“나는 항상 진심입니다.”

“…….”

박건우의 긍정에 브로커 사내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묻고 싶은 게 상당히 많은 표정이네요. 물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생각해 두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명성의 핏줄이 아닙니다.”

뜬금없는 대답에 브로커 사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박건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수십 년을 명성만을 위해 충성해 왔습니다. 아니, 아버지, 할아버지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근 100년 가까이 명성만을 위해 일해 왔지요.”

“…….”

“중간중간 고비도 있었지만, 결국 이곳, 명성의 부사장이라는 위치에까지 올랐습니다.”

말을 마친 박건우가 잠시 사무실 내부를 둘러본다.

명성그룹 꼭대기 층 바로 아래에 위치한 자신의 집무실.

이곳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갖은 고생을 하였던가?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딱 한 층.

그 한 층을 오르기 위해 얼마나 악착같이 살아왔던가?

‘이제는 꿈조차 꿀 수 없겠지.’

잠시 위층을 바라보던 박건우가 이내 브로커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누구보다 명성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그게 무슨…….”

“핏줄.”

“……!”

박건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이 안에, 명성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인의식 또한 없을 것이다. 그저 그룹 차원에서 부려 먹기 좋은 개일 뿐이다. 밑바닥 출신으로 로또보다 더한 행운을 거머쥔 성공한 천민이다.”

“…….”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내 노력을 까 내리기 바빴지요. 물론, 그룹 차원에서도 마찬가지. 내가 이곳을 한 층 더 올라가는 날에는, 명성의 오너가 오씨가 아닌 박씨로 뒤바뀐다고 생각했겠지요.”

박건우가 창가를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가득 펼쳐졌다.

그곳을 내려다보며, 박건우가 계속 말한다.

“내가 해 온 노력들이, 단지 오씨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그게 못내 분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잠시 말끝을 흐리던 박건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했던가요? 평생을 괴롭혔던 그 사실이, 인생의 마지막 연극을 위한 멋들어진 무대가 되어 줄 줄, 누가 알았을까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브로커 사내의 대답에 박건우가 뒤를 돌아본다.

“세상 사람들이 봤을 때, 벼락 맞은 것보다 더한 행운을 거머쥔 나 같은 천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

“하나는, 그룹 차원에서 나를 보호해 주고, 합당한 보상 또한 지급받는 선에서, 나 혼자 독박을 쓰는 것.”

“…….”

“이 경우는 죄질이 가벼워 충분히 형량 감형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될 때 다수가 예상하는 안이고…….”

박건우가 손가락을 들어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

“나처럼, 국민을 기만한 죄로 최소 수십 년은 감옥에서 썩어야 하는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지요. 무슨 삼인방이니, 살아 있는 권력 바로 옆에서 기생하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던 놈들조차, 제 목에 칼이 들어오니 서로 자신들에게 힘을 준 권력자들을 손가락질하기 바빴으니까.”

브로커 사내가 자신도 모르게 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박건우가 방금 한 말은 모두 현실이었다.

“검찰에서는 이미 나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었고, 언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잡혀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입니다. 어쩌면, 바로 오늘 사람들이 나를 잡기 위해 이곳에 들이닥칠 수도 있겠지요.”

“그러고 보니, 보통 이런 일이 있고 나면 곧바로 책임자들에 대한 구속수사를 시작하곤 하던데, 왜…….”

“더 큰 절망감을 맛보여 주기 위해 조금 여지를 주고 있는 것이거나, 도망갈 테면 도망가 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겠지요. 내가 아는 놈은, 그런 놈이니까.”

누군가를 떠올린 박건우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나이에 비해 무서울 정도로 치밀하고, 생각만 해도 속에서 천불이 일 정도로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놈.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웃음만 나왔다.

조금 있으면 완전히 일그러질 놈의 얼굴이 예상되었기 때문일까?

상념을 털어 낸 박건우가 말한다.

“결론적으로, 놈은 지금 실수하고 있는 겁니다. 나에게 시간을 줬고, 내가 충분히 계획을 준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줬으니까.”

“…….”

“지금부터 내가 검찰이나 공식석상에서 하는 얘기들은, 내 죄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면 상당히 신빙성 있게 들릴 겁니다. 내가 구속될 것이라는 것은, 모든 국민들도 이미 예상하고 있는 일이니까.”

“…….”

“들어가면 최소 수십 년. 벼랑 끝까지 몰린 놈이,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모두 실토한다고 생각하겠지요. 설령 그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일단 여론만 형성되면, 물 타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니까.”

“여론 몰이…….”

브로커 사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들이 바로 이것들.”

박건우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들을 테이블 위에 툭 하고 던졌다.

“어느 정도 여론이 형성되면, 그 여론에 힘을 더할 살을 붙일 겁니다. KS그룹 사람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그게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 좋은 것이라면 더욱 좋겠지요.”

“…같이 죽을 생각이십니까?”

어느새 브로커 사내가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채 반문했다.

그런 브로커 사내의 두 눈을 바라보며, 박건우가 말을 잇는다.

“어차피, 명성의 박건우는 이미 끝났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내 아버지와 다르게 한 번쯤 소속을 바꿔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

이어지는 박건우의 말에 브로커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있는 명성의 부사장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명성이 아닌 KS그룹의 박건우가 되어, 판을 뒤집어 놓기로.

아마 자유당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굳이 나누자면 KS그룹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쪽에 더 가깝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돌릴 수 있을 만한 일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시답잖은 연예계 찌라시를 뿌리는 것보다, 그쪽이 더 확실하고 말이다.

브로커 사내가 박건우의 치밀함에 새삼 몸을 떨었다.

“내가 왜 굳이 이런 얘기들을, 그다지 관계도 없는 당신에게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

“그 짧은 기간 동안 당신에게 정이 들어서? 아닙니다. 당신을 믿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는 내 성격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니죠.”

“그럼 왜…….”

“사업의 시작은 신뢰입니다.”

브로커 사내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간 박건우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의뢰. 확실히 부탁드립니다.”

작은 목소리로 브로커 사내의 귀에 속삭인 박건우가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서류 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사라락, 사라라락.

고요한 침묵 속에,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집무실 내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이 너머가 VIP 전용실입니다.”

도윤의 통장 잔고를 확인한 정보판매상은 곧바로 도윤과 박판섭을 구석에 위치한 새까만 커튼 너머로 안내했다.

비록 직접 정체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야말로 ‘억’ 소리가 나는 현금 보유자라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이곳에 이를 수 있었다.

“…말씀하신 그룹에 대한 정보, 어디까지 제공해 드릴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자세한 건, 담당자와 직접 얘기해 보시길…….”

도윤을 대하는 정보판매상의 태도는 한결 공손해져 있었다.

“고맙소.”

짧게 대답한 도윤이 곧바로 커튼 너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 같이…….”

“죄송하지만 저곳에 들어갈 수 있는 분은 저분 한 사람입니다.”

“엥? 뭐라고……?”

박판섭이 황당한 목소리로 반문할 때, 커튼 너머의 도윤이 말한다.

“금방 갔다 올게. 조금 기다리고 있어!”

“끙…….”

이내 박판섭이 앓는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목도 타는데, 물이나 한 잔 주쇼.”

* * *

“어서 오십시오.”

도윤이 작은 밀실 내부로 들어서자, 또 다른 정보판매상이 도윤을 반겼다.

“…….”

도윤이 인사를 건네는 그를 바라보기를 잠시.

“정보를 의뢰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예?”

“혹시 이곳에 도청장치라든가 CCTV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다면, 자리를 옮겨 의뢰를 하고 싶습니다.”

“아, 하하하하.”

도윤이 무슨 말을 하나 잠자코 듣고 있던 정보판매상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보거래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보안. 도청장치나 CCTV 따위가 존재하지 않음은 물론, 방음까지 완벽한 곳이 이 밀실입니다.”

“…….”

도윤이 입을 다문 채, 정보판매상을 빤히 바라보기를 잠시.

“…그래요?”

하회탈 너머로 씨익 미소 지은 도윤이 이윽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심문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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