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잡는 회귀검사-122화 (122/174)

122화 구조조정

“기자들, 내일 중으로 괜찮은 시간에 모두 불러들이세요. 명성의 박건우가 중대한 발표를 할 예정이라고.”

“알겠습니다, 부사장님.”

박건우의 말에 여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용무를 마친 여비서가 출입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자, 브로커 사내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요?”

“이렇게 성급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 말입니다. 윗선에 보고도 해야 할 테고, 이 정도 스케일의 일이면 절차가 제법 까다로울 텐데요?”

“내 스스로 구렁텅이에 기어들어 가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회장님은 이미 나에게 모든 것을 위임했습니다.”

“…….”

브로커 사내가 입을 다물자, 한차례 한숨을 내쉰 박건우가 말을 잇는다.

“지금은 절차 따위보다, 시간 싸움입니다. 나에게 언제 구속영장이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 그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겠지요.”

“…….”

“놈이 방심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잡으러 오지 않는 건지, 그게 아니면 확실하게 엮어 넣기 위해 간을 보고 있는 건지는 이제 상관없습니다.”

말을 잇던 박건우가 제 주먹을 힘주어 꽈악 말아 쥐었다.

분했다.

새파랗게 어린 놈에게 패배해, 결국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그 어린 놈의 오랏줄을 잠자코 앉아 기다리고만 있어야 된다는 현실이.

하지만, 제 능력을 과신한 탓인지 놈은 한 가지 큰 실수를 했다.

‘나에게 시간을 준 것. 그것만은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박건우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브로커 사내가 묻는다.

“제가 도와드릴 일은 있습니까?”

“내가 의뢰한 일만 확실히.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연변에서 업자들이 입국하는 즉시, 일을 진행해 줬으면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거면 됐…….”

박건우가 말을 잇고 있을 때, 노크도 없이 출입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부, 부사장님!”

“뭐야?”

박건우가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룹 내에서 출신 성분에 대한 스트레스를 워낙 많이 받는 박건우다 보니, 이런 경우 없는 일에는 상당히 민감했다.

명성의 핏줄이 아니기에, 마치 자신이 무시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신의 비서가 이런 행동을 보였다.

이내 인상을 푼 박건우가 조용히 되묻는다.

“무슨 일이야?”

“그, 그게…….”

박건우의 표정을 보고 머뭇거리던 여비서가 곧바로 대답한다.

“검, 검찰에서…….”

“검찰?”

박건우가 반문함과 동시에 옆에 있던 브로커 사내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치 빠른 브로커 사내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일단 일어나 보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박건우가 여비서를 바라보며 묻는다.

“로비에 있나?”

“네, 네. 서울중앙지검에서,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하러 왔다고… 데스크에서 직통전화로 왔으니, 아마 곧 이곳까지…….”

여비서의 말이 이어지자 박건우가 입술을 콰득 깨물었다.

‘하필 지금, 어째서…….’

속으로 중얼거리던 박건우가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쩌면 수의(囚衣)를 입고 얘기하는 게, 더 효과 있을지도…….”

“예?”

멍하니 반문하는 여비서를 향해 박건우가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 나가 봐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알, 알겠습니다.”

허리를 숙인 여비서가 이내 출입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브로커 사내는 이미 집무실을 빠져나갔는지, 보이지 않았기에 여비서도 곧장 밖으로 빠져나가고자 했다.

“아참! 회장님도 혹시 알고 있나?”

걸음을 옮기던 여비서가 멈칫하더니 곧바로 대답한다.

“네. 지금쯤이면 회장님뿐만 아니라, 각 계열사 사장님들까지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요.”

“그럼…….”

말을 마친 여비서가 이내 출입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회장님도 알고 있다라…….”

홀로 남은 집무실 내에, 박건우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김 의원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오춘화 회장의 장남, 오창원이 벌겋게 얼굴을 붉힌 채, 휴대폰에 대고 고함쳤다.

“아, 지금 우리 사정, 부회장님도 뻔히 아시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국민들 관심 돌리랴, 집안싸움하랴, 정신없는 판국에…….”

“그렇다고 내 집 안방에 검찰 놈들이 구둣발 신고 들어오는 걸, 뻔히 지켜만 보고 있겠다는 겁니까!?”

“아, 몰라요, 몰라! 거 정말 아실 만한 분이 너무하시네! 우리도 일단 살아야 될 것 아니요!? 막말로, 당이 유지되지 않으면 우리 관계도 끝인 거, 부회장님도 잘 알잖소!?”

“하! 지금 그것, 의원님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자유당과 박 대표님의 생각이십니까?”

“글쎄, 말이…….”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을 때, 오창원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한 인물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줘 봐.”

“아, 아버지…….”

“내가 얘기하지.”

“…예.”

이내 오창원으로부터 휴대폰을 건네받은 오춘화 회장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 의원, 오춘홥니다.”

“회, 회장님!”

화들짝 놀란 기색이 역력한 수화기 너머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춘화 회장이 말을 잇는다.

“오랜만에 김 의원 목소리를 들으니, 늙은이 기분이 참 좋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한 번 인사를 드리러 갔어야 하는 건데…….”

김 의원의 사과에 오춘화 회장이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랏일 하시는 분들 바쁘신 것 뻔히 아는데, 골방에서 죽어 가는 늙은이에게 인사는 무슨…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반드시 자유당 공천을 받아, 체육인 출신 최초로 금배지를 달겠노라, 패기 있게 외치던 젊은이가, 이제는 벌써 자유당에서만 2선을 거쳐, 3선을 바라보는 당의 허리가 되었군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오춘화 회장의 말에, 수화기 너머의 김 의원이 움찔 몸을 떨었다.

“선거만 지원해 주면, 반드시 금배지를 달고 보답하겠노라. 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은데, 혹시 늙은 내 기억이 틀렸나요?”

“그, 그건…….”

“노력은 또 어땠나요. 차명계좌에 차떼기에, 세금 세탁까지. 나는 김 의원에게 참 많은 걸 해 줬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김 의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보군요.”

“절대 아닙니다, 회장님.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집안 정리 끝나는 대로, 이 문제는 대표님과 적극 논의하여 처리하겠습니다.”

“그 싸움, 짧게 걸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검찰 쪽에 손을 쓰기가 많이 힘든 상황입니다. 현 총장인 김관우는 정계 진출에 관심도 없는 인물이고, 국민들의 이목은 모두 이곳에…….”

“변명은 짧게.”

“…….”

오춘화 회장의 말에 김 의원이 입을 다물었다.

“시간,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지금 적당한 소스를 찾고 있습니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개를 한 번에 터뜨려서 관심을 분산시킬 겁니다. 그러고 나면 당 또한 자연스럽게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 겁니다.”

“…….”

“사실 싸움은 이미 끝났습니다. 김문성 의원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대표님에게 비할 바는 아니라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대표님이 적당히 타협을 보고, 의원 몇 잘라내는 선에서 마무리할 겁니다. 지금은 그 타이밍을 재고 있는 상황이죠.”

“소스라…….”

잠시 말끝을 흐리던 오춘화 회장이 말한다.

“그 소스, 나도 한번 찾아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회장님!”

“빠른 시일 내에, 한 번 보도록 합시다.”

“물론입니다. 꼭 찾아뵙겠습니다.”

이내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오춘화 회장이 오창원에게 던지듯 휴대폰을 넘겨줬다.

“머저리 같은 놈…….”

순식간에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오춘화 회장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오창원이 움찔 몸을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회사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네놈들은 대체 뭘 했지?”

“…….”

오춘화 회장의 물음에도 오창원과 그 형제들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오춘화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창원이.”

“예, 회장님.”

“건우 놈이 독박을 쓰더라도, 회사가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막을 수 없을 거다. 알고 있겠지?”

“…예.”

“20퍼센트, 아니, 어쩌면 30퍼센트 이상 주가가 폭락할 수도 있겠지. 이미 성명 건으로 큰 피해를 입은 우리들에게는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피해야.”

“…….”

오춘화 회장의 말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에도, 오창원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하는 말 모두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의 피해를 줄이면서, 김 의원이 말한 소스도 제공할 수 있는 방법. 너라면 알고 있겠지?”

“회사의 피해를 줄이면서, 소스를 제공…….”

오창원이 오춘화 회장이 한 말을 따라하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먹이가 줄었으니, 자연스럽게 몸집도 줄어들어야 할 것 아니냐?”

“…아!”

이내 오춘화 회장이 말한 뜻을 이해한 오창원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회사의 몸집을 줄인다.

그 말인 즉…….

“구조조정. 그리고, 정리해고…….”

“현장직 놈들부터 다 잘라. 잘린 놈들 몫까지 일하겠다는 놈들만 회사에 남겨. 일손 부족이니 업무 과중이니, 징징거리는 놈들은 제 소원대로 내보내 줘.”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사무직이라고 봐주지 마. 각 부서마다 최소 1명씩. 나이는 찰 대로 차고, 이제 들어오는 놈들보다 머리도 안 돌아가면서 쓸데없이 고액 연봉만 타 가는 밥버러지들. 그놈들까지 다 잘라.”

“예? 그건…….”

가만히 듣고 있던 오창원이 흠칫 놀랐다.

지금 오춘화 회장이 말한 대로라면, 최소 회사를 위해 20년 이상은 근무해 온 사람들까지, 모조리 쳐내야 한다.

“문제 있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문하는 오춘화 회장을 보며, 박건우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번에 구조조정을 실행하면, 분명 노조에서…….”

“찍어 눌러.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알겠습니다.”

오창원에게 모든 지시를 내렸다고 판단한 오춘화 회장이 주변을 둘러본다.

“명심해. 이번에 만약 잘못되면, 지금 네놈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부귀영화도 끝이라는 것을.”

“예! 회장님!”

“…쯧.”

낮게 혀를 찬 오춘화 회장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 *

“오랜만이죠, 박건우 씨?”

지금 막 박건우의 개인 집무실에 들어선 도윤이 씨익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얼굴 좋아 보입니다, 강 검사님.”

박건우가 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 도윤을 향해 대답했다.

한층 미소가 짙어진 도윤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낮게 휘파람을 분다.

“와~ 과연 명성의 부사장님. 집무실도 으리으리하네요. 박 수사관 님, 이런 집무실 하나 만들려면 돈 얼마나 들까요?”

“글, 글쎄요… 아파트 한 채 값은 더 들 것 같은데…….”

도윤의 말대로, 박건우의 개인 집무실은 보기에도 멋들어져 보였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와, 가구들 하나하나가 모두 값비싼 고급 원목으로 되어 있었고, 그 크기 또한 개인 집무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어 보였다.

“…영장 집행하러 온 것 아닙니까?”

슬며시 미간을 찌푸린 박건우가 묻자,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 실례. 지방 촌놈이, 이런 곳은 또 처음이라서… 왜 명성의 직원들이, 부사장님을 성공한 뭐라고 하는지, 알 것 같네요.”

도윤의 말에 박건우가 움찔 몸을 떨었다.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박건우를 보며, 도윤이 품 안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 들었다.

“말씀대로, 영장입니다. 압색영장이랑 박건우 씨에 대한 체포영장.”

“…사람 속 그만 긁어 놓으시고, 검사면 검사답게, 본인의 일에 충실하시죠.”

“워, 워. 싸우려고 온 것 아닌데, 그렇게 대하시면 섭섭합니다.”

“이… 이……!”

분노로 몸을 떠는 박건우를 잠시 바라보던 도윤이 말한다.

“부사장님, 이대로 괜찮습니까?”

“…뭐요?”

“여기까지 어떻게 기어 올라왔는데, 이대로 끝난다니… 허망하지 않습니까?”

“무슨 개소리냐!?”

이윽고 폭발한 박건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함쳤다.

“내가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는데 말이죠.”

“그만 지껄이고 어서…….”

박건우가 고래고래 치는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윤이 등 뒤를 향해 손짓했다.

그 손짓에 따라, 앞으로 나선 한 수사관이 손에 쥐고 있던 서류 더미를 눈앞에 보이는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이건 뭐…….”

“협상 하나 하죠.”

“협상?”

“사업가들이 잘하는 것 아닙니까?”

“누가 너 따위랑…….”

도윤의 말에 박건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것들,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텐데?”

“…….”

이어지는 도윤의 말에 박건우가 인상을 구긴 채, 도윤을 노려보기 시작한다.

잠시 후.

서류더미를 손에 쥔 박건우가 거칠게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이, 이건……!”

시간이 지날수록, 박건우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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