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가짜 거래
“…이게 무슨 개수작이지?”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은 박건우가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역시…….’
속으로 감탄사를 터뜨린 도윤이 옅게 미소 지었다.
눈앞의 남자가 동요를 보인 것은 한순간.
그 짧은 순간에 떠오른 감정을 가라앉히는 박건우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공짜로 이곳까지 오른 건 아니다, 이 말이지?’
박건우의 두 눈을 바라보며, 도윤이 입을 열었다.
“보시는 대로인데, 무언가 문제라도?”
“이따위 내용을 왜 나한테 보여 주냐, 이 말이다.”
“내용이 읽기 싫으시면, 상단에 타이틀만이라도 읽어 보시죠. 왜 제가 이걸 박건우 씨에게 보여 주는 건지, 그것만으로 충분히 이유가 될 텐데요?”
이어지는 도윤의 말에 박건우의 눈썹이 눈에 띌 정도로 꿈틀거렸다.
“내가 이런 일을 벌였다, 지금 그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박건우가 분노의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손에 쥔 서류들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촤르르륵.
흩날리는 서류들 사이로, 도윤이 말한 ‘타이틀’이 드러난다.
첫 페이지 가장 상단에는 <명성그룹 부사장 박건우 국내 암시장 이용 내역>이라는 내용의 글자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검찰에서는 이따위 짓을 벌이나!? 실적을 하나라도 더 올려 보겠다고 없는 죄를 만들어 내!? 강 검사, 지금 나랑 느와르물이라도 찍어 보자는 건가!?”
박건우가 푸들푸들 떨리는 얼굴을 들어, 도윤을 노려본다.
“없는 죄를 만들어 낸다… 마치 제가 부사장님 같은 거물을 잡아넣으면서, 공적을 부풀리려 한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게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이따위 미친 소리를 적어, 내 눈앞에 들이대!?”
“이게 진짠지, 아닌지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고.”
“뭐? 이 개새…….”
결국 폭발한 박건우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는 순간, 우뚝 행동을 멈췄다.
빠르게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박건우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민다.
“……?”
갑작스러운 박건우의 행동에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영장 좀 보지.”
“…뭐요?”
“자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내 영장. 체포 피의자든, 피고인이든. 자신에게 발부된 영장을 제시받아 확인할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도 분명히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뭐, 틀린 말은 아니군요.”
이내 도윤이 손에 쥔 영장을 내밀자, 그것을 건네받은 박건우가 빠르게 내용을 살폈다.
“훗.”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친 박건우가 쥐고 있던 영장을 다시 건네줬다.
“찔러나 보자. 그게 아니면, 영장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이 나를 핍박하시겠다? 감히…….”
“내가 단지 증거가 없기 때문에, 영장에 이 내용을 포함시키지 않은 줄 아십니까?”
“증거가 있다? 그래, 어디 한번 내놓아 보거라. 만약, 이게 나를 엮어 넣기 위한 거짓부렁이란 사실이 밝혀진다면, 내 모든 걸 걸고 네놈 옷도 벗길 것이다.”
“뭐 낀 놈이 성낸다더니…….”
“뭐, 뭐라고?”
박건우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설마 빈손으로 왔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말을 마친 도윤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손바닥 크기보다 더 작은, 소형 녹음기였다.
도윤이 지체 없이 녹음기 재생 버튼을 누르자, 그 안에 녹음되어 있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바쁘신 분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어떤 정보가 필요하십니까?’
‘납치 의뢰 하나와 국내에 있는 특정기업에 대한 정보.’
“……!”
박건우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잠시 녹음기 재생을 멈춘 도윤이 말을 잇는다.
“설마 이것까지 자기 목소리가 아니라고 말씀하시진 않을 테고… 더 들어 보시겠습니까?”
“이, 이걸 어떻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박건우를 보며,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의외로 조심성이 없으시군요, 부사장님.”
“…….”
“설마 음지에서 암거래나 하는 놈들이, 이 정도 안전장치도 마련해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이어지는 도윤의 말에 박건우가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놈들…….”
“계획이 틀어지면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니까요. 자, 이제 대화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
박건우가 입을 다문 채, 말없이 도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부사장… 아니, 박건우. 착각하지 마라.”
“뭐, 뭐라고?”
“너 따위가 무서워서 내가 지금 소중한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줄 아나?”
“이 미친…….”
욕지거리를 내뱉는 박건우에게 빠르게 다가간 도윤이 그 멱살을 와락 틀어쥐었다.
“……!”
“내 목숨, 내 가족까지 건드려 했던 네놈에게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나?”
“이익…….”
“기회를 주려고 하는 거다. 너 같은 쓰레기에게도, 한 번쯤 회개할 수 있는, 그런 기회.”
“개소리…….”
“이 위층. 올라가고 싶지 않나?”
“……!”
박건우가 또 한 번 눈을 크게 떴다.
“영장에 기재된 죄만으로도 최소 십수 년이다.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 같은 경우에는, 법관 또한 국민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에, 같은 죄질이라도 상당히 가중처벌 되는 게 이 나라의 현실이야.”
“…….”
“거기에 살해 대상자가 특정되어 있고, 킬러를 고용하려 한 사실만으로도 살인 예비·음모죄로 처벌된다. KS그룹의 비밀침해죄, 불법 암시장 이용까지… 니 목에, 몇 년 형이 떨어질 거라 생각하나?”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박건우를 보며, 도윤이 말을 잇는다.
“아마, 평생을 콩밥만 먹다가, 골방에 틀어박혀 쓸쓸하게 인생을 마감할 확률이 매우 크지. 정말, 그런 인생을 원하나?”
“나는…….”
“밑바닥에서부터 이곳, 꼭대기 바로 아래층까지. 윗대가리 놈들의 썩은 내 나는 똥구멍을 핥아 가며, 여기까지 쌓아 온 것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나? 이제 딱 하나. 하나만 더 오르면 될 텐데?”
쉼 없이 요동치던 박건우의 두 눈이 어느새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습군.”
박건우가 도윤을 바라보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우습지?”
“기회니, 회개니. 위해 주는 척 위선자 같은 짓거리는 집어치우고, 니 진짜 목적을 말해라.”
“…….”
“니놈 따위에게 도움을 주느니, 차라리 골방에서 평생을 썩을 것이다.”
악에 받친 박건우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던 도윤이, 이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쥐뿔도 없는 놈이, 자존심은…….”
“더 이상 나를 욕보이지…….”
“그래. 기회니 회개니, 어줍잖은 헛소리는 집어치우지. 내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 별거 없어.”
이어지는 도윤의 말에 박건우가 멈칫했다.
도윤이 아무런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말을 잇는다.
“그동안 내 뒤를 캐 와서 잘 알겠지만, 나는 반드시 명성을 무너뜨릴 거다.”
“그래, 잘 알고 있지. 그래서…….”
“그래서 지금 너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뭐?”
자신의 말을 끊고 중얼거리는 도윤을 보며, 박건우가 멍하니 반문했다.
“오춘화 회장의 명성보다는, 박건우 회장의 명성이 더 무너뜨리기 쉬울 것 같거든.”
“…….”
“단지 그뿐이야.”
이윽고 도윤이 말을 마치자,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침묵이 얼마간 지속되었을까?
“…큭.”
박건우의 입에서 침묵을 깨는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크크크크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하!”
그 소리가 시작이었다.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리는 박건우를 도윤이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자, 마침내 웃음을 멈춘 박건우가 입을 열었다.
“…아, 실례.”
눈물까지 닦으며 중얼거리던 박건우가 도윤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재미있네.”
“…….”
“내가 니 제안을 받아들이면, 이 회사가 내 것이 될 거라 생각하나?”
“물론.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도윤을 보며 박건우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이야 실제로 본 적이 없다지만, 개인적으로 오길태나 오성춘 같은 놈들보다야 당신이 훨씬 대권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이 틀렸나?”
“그건 또 그거대로 기분 좋은 칭찬이군.”
박건우의 대답에 도윤의 두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그냥 던진 말처럼 보이지만, 방금 던진 얘기에는 도윤의 숨은 속내가 들어가 있었다.
많지는 않지만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다.
개인의 야망 때문이 아닌, 순수한 충성과 의리로 윗사람을 모시는 인물들.
제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관철하는 인물들.
도윤 자신도 몇 번인가 봐 온 유형의 인물들이었기에, 이번에도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박건우는 확실히 전자다.
오로지 자신의 야망을 위해 마음 없는 충성을 하는 유형.
연기 또한 아니다.
언제부턴가 박건우의 가슴팍에 자리하고 있던, 악의를 나타내는 보랏빛 광채가 눈에 띌 정도로 옅어져 있었으니까.
이런 유형의 인물이라면, 얘기는 더욱 쉬워진다.
‘박건우의 명성이 더 쉬울 것이라고? 그 생각이 명백한 실수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마.’
내심을 숨긴 박건우가 입을 열었다.
“얘기나 들어 보지.”
아직까지 자신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는 도윤의 손을, 가볍게 뿌리친 박건우가 말을 잇는다.
“니 말대로, 지금까지 국민들에게 알려진 죄질만으로도 나는 십수 년을 교도소에서 썩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나를 이곳의 회장으로 앉힐 생각이지?”
“별거 없어. 너는 그저 오춘화 회장의 꼭두각시였을 뿐이잖아? 나머지는, 내가 소설을 쓰기 나름이지.”
“큭큭큭큭.”
도윤의 말을 곧바로 이해한 박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설, 기대하지.”
박건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만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조금 쉬고 싶군.”
박건우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그런 박건우를 잠시 바라보던 도윤이 말한다.
“…돌아가죠.”
“검사님!”
도윤을 수행하는 수사관이 다급히 외쳤다.
“괜찮으니까.”
이어지는 도윤의 말에 움찔 몸을 떤 수사관이 이내 한숨을 내쉬곤, 걸음을 옮겼다.
쿵!
작은 소음을 내며 출입문이 닫히자마자, 수사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보는 사람들에 따라선, 충분히 문제가 될 수도…….”
“틈만 나면, 제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
영문 모를 도윤의 말에 수사관이 멍하니 반문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넣으려는데, 아무런 부담도 없이 공짜로 날름 먹을 순 없겠죠.”
“그게 대체…….”
멍하니 말끝을 흐리는 수사관을 보며, 한차례 씨익 미소 지은 도윤이 말한다.
“일단, 지켜보세요. 주사위는 던져졌고, 종국에 악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심판을 받게 될 테니까.”
말을 마친 도윤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 사람을 건드린 놈, 건드리려 한 놈. 모두 그냥 두지 않는다.’
영장을 손에 쥔 채, 걸음을 옮기는 도윤의 두 눈이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