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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124화 (124/174)

124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명성에서만 20년 이상을 몸담아 온 민상식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이제 마흔을 갓 넘긴 나이.

갓 초등학교를 입학한 첫째 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회사로부터 갑작스러운 해고 통지를 받았다.

“대체 왜… 최근에, 따로 밉보였던 적은…….”

민상식이 절망 어린 표정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무런 줄도, 빽도 없이 오로지 능력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왔다.

붙임성 있는 성격에, 아부도 제법 할 줄 알아, 동기 중에서는 가장 먼저 부장이라는 위치까지 올랐다.

창창할 것만 같은 앞길에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불과 3년 전.

사내 정치에 휘말려, 임원으로 향하는 승진 구도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눈 한 번 딱 감고, 회장의 손자라는 어린 놈의 손을 잡았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겠지만, 당시에는 알량한 자존심 탓에 그런 행동을 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결국 그룹 내 실세인 젊은 임원 놈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위 잘나가는 기획부에서 마케팅부로 좌천되었다.

그때에도, 이렇게까지 비참한 기분은 들지 않았었는데…….

“차라리, 그날 딱 한 번. 머리를 수그렸다면…….”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말이 이런 느낌일까?

당장 내일 먹고살 일을 걱정하게 생겼다.

민상식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커다란 회사 전용 게시판 앞에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있었다.

“이런 젠장! 아무리 회사 사정이 어려워졌다지만, 얼마 없는 사무직인 우리들까지……! 이게 말이 돼!?”

“뭐요!? 그럼 우리 현장직들만 독박 쓰고 죽어나야 한다, 이 말이요!?”

소식을 듣고 본사까지 달려온 현장소장이 발끈하여 고함쳤다.

“내 말은 그게 아니지 않소!”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하! 말해야 입만 아프지. 기름내 한번 안 맡아 본 사무직 놈이랑 무슨 대화를 하겠다고…….”

“뭐요!? 말 다했소!?”

“말 다했다! 왜? 꼬와? 꼬우면 한 대 치든가! 쫓겨나는 판국에, 퇴직금이라도 넉넉하게 챙겨 보자!”

“이… 이……!”

개판.

온갖 고성이 오갔고,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장이라도 회장실에 쳐들어가려는 기세를 보이는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우리끼리 이러지 말고, 다 같이 회장 놈 얼굴이나 보러 갑시다! 노조에도 협조 요청하고, 정식으로 파업하자고요!”

“그래! 운 좋게 살아남은 직원들도, 이제는 언제 잘릴지 모르는 파리 목숨인 거 뻔히 아는데, 가만히 있겠어!? 힘을 모으자고!”

“오춘화 타도!”

“명성도 타도!”

“와아아아아아아아!”

한 사람의 외침이 신호탄이 되어,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일단 다른 직원들부터 끌어모아 보자고요!”

“옳소, 가자!”

이윽고, 사람들이 각 부서 사무실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부질없는 짓이야…….”

이제는 홀로 남은 민상식이 제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누구보다 회사 임원들과 가까웠던 민상식은 안다.

임원들이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지 않을 리 없다.

“미리 약속했을 테지… 하나를 잘라내면, 나머지 직원들은 건드리지 않겠다. 추후 인사고과에 대한 인센티브도 약속했을 테고…….”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민상식이 이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마 부장 직급인 자신을 잘라 내기로 결정한 것은, 회사 임원들의 공통된 의견일 확률이 높았다.

인사권자의 직권결정이 아닌, 임원들의 회의를 거쳐 결정된 사안이라면 해고는 이미 기정사실이라는 뜻이다.

‘뒤집을 수… 없겠지…….’

힘없는 발걸음으로 움직이던 민상식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생각하고 있던 목적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니코틴 연기를 뿜어내기 위해 드나드는 낡은 철문.

수십 년의 세월 동안, 회사가 더욱더 크게 발전했음에도 이곳만은 변함이 없었다.

끼이이익.

민상식이 그 철문을 밀어내자, 거친 쇳소리를 내며 출입문이 활짝 개방된다.

그리고, 민상식의 눈앞에 펼쳐지는 서울의 경치.

30층이 훌쩍 넘는 명성그룹의 초고층 본사 건물이었기에,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매일같이 봐 오던 정경이건만, 오늘따라 유난히 새로워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치익.

짧은 라이터 소리와 함께, 민상식이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스읍, 후우~”

입맛이 썼다.

평소에는 한 모금만 빨아들여도 세상 근심 다 날려 버릴 것만 같더니, 지금 기분은 전혀 아니었다.

연거푸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던 민상식이 어느새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자, 품에서 또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연달아 세 개비를 더 태우고 나서야, 담뱃갑을 품에 집어넣은 민상식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저벅.

회사 전체가 난리가 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늦은 오후 이 시간에 옥상을 찾은 사람은 민상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옥상 끝 철제 난간 근처까지 다가간 민상식이 그곳에 올라가, 맞부딪혀 오는 바람을 잠시 만끽했다.

“이렇게 서 있으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드네…….”

당장 이곳에서 내려가 집으로 돌아가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이 자신에게 안겨 올 것 같은데, 이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하지만,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니 자신이 없었다.

다른 정리해고 대상자들에 비해 비교적 젊은 나이.

능력 또한 충분하여, 지금 나가도 어지간한 중소기업 임원 자리는 꿰찰 거라 생각하겠지만, 착각이다.

박혀 있는 돌들이 굴러 들어온 돌을 반길 리가 없다.

어느 회사도 대기업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나이는 나이대로 들어찬 자신을 원치 않을 확률이 높았다.

“젠장…….”

완전히 다른 세상의 얘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왜 IMF 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차라리, 이대로 죽으면…….”

자살은 보험도 안 된다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마 회사 측에서 스스로 움직일 테니까.

아무리 막나가는 임원진들이라지만, 구조조정을 단행한 이후, 발생한 회사 직원의 자살 사건을 가만히 묵인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보여 주기를 위해서라도, 가족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할 것이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민상식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 * *

“오, 왔어?”

지금 막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서는 도윤을 보며, 호식이 반갑게 인사했다.

“영장 집행하랴, 여죄 파악하랴, 한참 바쁘실 텐데, 어쩐 일이래?”

“영장 집행을 미뤘거든.”

“엥?”

도윤의 짧은 대답에, 호식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호식을 일별한 도윤이 옆에 있는 배영준을 돌아본다.

“배 기자님, 스탠바이는요?”

“그게…….”

도윤을 발견한 순간부터 표정이 굳어 있던 배영준이 제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잠시 흔들리는 눈동자로 도윤을 바라보던 배영준이 이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요?”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데스크에서… 제가 쓴 기사를 거부했습니다.”

“엥? 이게 무슨 소리야?”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호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도윤의 눈빛이 깊게 침체되기 시작한다.

“…배 기자님의 기사라면, 어지간해서는 모두 프리패스, 아니던가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외압, 있었군요?”

“…….”

배영준이 입을 다물었다.

“…누구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도윤이 배영준을 바라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묻는다.

“배 기자님 언론사라면, 어지간한 외압쯤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는 사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

도윤과 눈을 맞춘 배영준이 말을 잇는다.

“저는 강 검사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강 검사님이 그분과 맞서는 것을,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대체 누구이기에 배영준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일까?

도윤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배영준이 말한다.

“만약 강 검사님이 그분과 맞서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

도윤이 말없이 배영준을 빤히 바라본다.

지지 않겠다는 듯,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배영준을 보며 도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들어 보고…….”

“확답을 해 주지 않으시면,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배 기자님 얘기를 듣고, 곧바로 맞설 생각은 하지 않겠습니다.”

“…….”

도윤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배영준도 결국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약속하신 겁니다.”

“알았습니다. 대체 누구길래 배 기자님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어서 말씀해 보세요.”

“…….”

잠시간의 침묵.

마침내 배영준의 입에서 그 인물이 거론된다.

“…박보군.”

“……?”

순간 도윤과 호식이 동시에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을 지었다.

“…누구라고요?”

“박보군 총리님. 현 정부의 2인자. 국무총리인 그분의 뜻입니다.”

“……!”

도윤과 호식이 찢어질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그 또라이와 조국일보의 그…….”

멍하니 중얼거리던 호식이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휴, 배 기자님. 한동안 나랑 같이 있더니 조크가 많이 느셨다.”

“…….”

자신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배영준을 보며, 호식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진짜……?”

“언론계에서 그분의 영향력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본인 스스로가 언론인 출신이니까요. 보수와 진보를 떠나, 어느 신문사도 방송국도 그분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지 못합니다.”

잠자코 배영준의 말을 듣고 있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그런 부류의 인물은 아니신 걸로 기억하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그분은 어느 한쪽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

“총리님이 항상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썩게 마련이다.’ 언제나 한결같은 정치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죠.”

“…탄핵소추가 기각되고, 이번 사태로 여당의 힘이 지나칠 정도로 커지는 것을, 경계하시는 거군요.”

도윤의 말에 배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국민들이 현 정부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안보 문제라든가, 일부 분야에 대해서는 분명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음…….”

도윤이 골치 아픈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외의 복병이다.

몰랐다면 모를까.

어떤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미 알게 된 상황에서 박보군과 대립각을 세울 수는 없었다.

아직 일개 지검 평검사인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인물도 결코 아니었고 말이다.

“…제가 다시 한 번 판을 짜 봐도 되겠습니까?”

“판이라면……?”

“제 입맛대로 기사를 써 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저, 제 계획을 들으시고, 다시 한 번 더 데스크에 새로 작성한 기사를 가지고 가 주셨으면 합니다.”

“…….”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배영준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습니다. 일단, 계획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한결 표정이 밝아진 도윤이 대답한다.

“요점은, 포커스를 완전히 명성에 맞추어 놓는 것입니다.”

“명성…….”

작은 목소리로 되뇌는 배영준을 보며, 도윤이 말을 잇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도윤의 설명이 모두 끝이 났을 때, 호식과 배영준은 복사라도 한 듯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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