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부탁
“오랜만이네요.”
미모만은 여전히 아름다운 박보윤이 지검장실 안으로 들어서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평소 입지 않는 정장 치마에, 옅게 화장까지 한 박보윤의 미모는 누가 봐도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울 만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윤이 박보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곳은 엄연히 지검 안이다.
검찰 선배인 박보윤에게 기본적인 예의는 갖출 필요가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검사님.”
옅게 미소 지은 채, 도윤을 향해 마주 고개 숙인 박보윤이 상석을 돌아봤다.
“지검장님도 잘 계셨죠?”
“나야 뭐, 항상 잘 지내지.”
“청문회 때문에 한창 바쁘실 텐데, 지검장님이 이 시기에 저를 불러 주실 줄은 몰랐네요. 그것도, 오른팔인 강도윤 검사까지 대동한 채로…….”
“도윤이가 내 오른팔이라고?”
정승만 지검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어머, 모르고 계셨어요? 지검 안에는 이미 쫘악 퍼진 소문인데?”
“…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이어지는 박보윤의 말에 멍하니 있던 정승만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도윤을 돌아봤다.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나도 나쁘지 않군. 지검의 영웅이 내 오른팔이라, 뭔가 내가 더 대단해 보이잖아?”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잇는 정승만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박보윤이 입을 열었다.
“안 본 사이에, 더 능글맞아지신 것 같네요, 지검장님.”
“칭찬으로 알지.”
도윤과 똑같이 대답하는 정승만을 보며, 박보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워낙 민감한 시기라, 라인이 어떻고 하는 얘기로 조금 놀려 줄 생각이었는데, 씨알도 안 먹히는 듯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박보윤이 묻는다.
“못 당하겠네요. 그럼, 이제 여쭤봐도 될까요? 이 귀한 자리에, 지검장님이 왜 저를 호출하셨는지.”
“내가 부른 것 아닌데?”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박보윤이 멍하니 반문했다.
그런 보윤을 보며, 정승만이 피식 웃으며 옆을 가리켰다.
“저 친구가 부탁한 거야. 자네를 꼭 한 번 만나고 싶다고.”
“…강 검사가요?”
보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쪽은 복직 준비하랴, 수사하랴. 다른 한쪽은 인사이동으로 골머리 앓으랴. 두 사람 다 상당히 바빴을 텐데, 언제 또 그런 사이가 된 건지…….”
“아니, 그게 무슨…….”
“늙은이는 이만 자리를 비켜 줄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정승만이 정말로 자리에서 일어날 듯한 태세를 보였다.
“꼭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강 검사님이 나에게, 부탁을요?”
“예.”
보윤이 잠시 도윤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척 하고 팔짱을 낀 보윤이 말한다.
“일단 들어나 볼게요. 대체 뭐길래, 초면이나 다름없는 강 검사님이 저에게 부탁이라는 걸 하려고 하시는지.”
“…초면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이어지는 도윤의 말에 보윤이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었나요?”
“그렇게 눈에 띄는 얼굴을 하고 계시면, 모자나 안경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요.”
“누구 님 말씀대로, 나쁜 기분은 아니네요. 그만큼 강 검사님이 능력 있단 소리겠죠?”
“…….”
“말씀해 보세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저도 도와드릴 수 없어요.”
“알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도윤이 이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휴직을 하고, 검사님이 다시 인사이동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을 하나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순간 보윤의 눈썹이 꿈틀했다.
“사건이라… 누구 덕분에, 워낙 많은 사건들을 한 번에 떠안다 보니 정확하게 어떤 사건인지 잘 모르겠네요.”
뼈가 있는 보윤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윤이 말을 잇는다.
“명성그룹 인사채용 비리 특혜 사건.”
“……!”
“아직 검사님 캐비닛에 그 사건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보윤을 보며, 도윤이 묻는다.
“그 사건 리스트. 혹시,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강 검사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설령 그 사건 리스트를 제가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보윤이 말끝을 흐리며 도윤의 두 눈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다른 검사, 그것도 선배 검사의 수사 결과물을 내놓으라는 건, 너무 경우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도윤을 바라보는 보윤의 표정이 어느새 표독스럽게 변해 있었다.
“지검장님을 믿고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불쾌하고 실망이네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어허. 잘 나가다가 분위기가 또 왜 이래?”
자리에서 일어난 보윤을 보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정승만이 다시 앉으라는 듯 급히 손짓했다.
“박 검사. 아니, 보윤아. 너도 알잖아? 도윤이 저놈이, 지금 어떤 사건을 맡고 있는지.”
“잘 알죠.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잘못된 건 잘못된 거예요.”
“물론 이놈이 리스트라든가, 수사 결과물 그 자체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충분히 화가 날 만하지만, 참고 사항으로 수사 진행 상황 정도는 후배 검사에게 알려 줄 수도 있잖아?”
보윤이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아니요. 제 말은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방법이라니?”
“차라리 직접 찾아와 부탁했다면, 제가 수사한 사항까지도 기꺼이 줬을 거예요. 이렇게 지검장님과 함께한 자리에서, 지검장님의 호출에 의해 만들어진 상황이 아니라요.”
“그건…….”
“마치, 제가 제 사건에 대해 어떤 외압을 받고 있는 모양새잖아요?”
말을 잇는 보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눈에 띌 정도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사실 보윤은 상당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단순히 후배 검사가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다.
현 시점에서 자신에게 딱히 민감한 사건도 아니었을 뿐더러, 충분히 도와줄 의향 또한 있었다.
보윤이 정말로 화가 나는 것.
그것은…….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속으로 중얼거린 보윤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줄이니 빽이니 하는 것들에 굴하지 않고, 제 능력과 소신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에게 하는 행동을 보니 그 생각이 잘못되었던 것 같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윤을 발견했을 때, 보윤은 그 생각에 점차 확신을 가졌다.
‘그래. 미안한 감정 따위, 느낄 턱이 없지. 너는 오히려, 지금 내가 이렇게 화내고 있는 게 이상하다 생각할 테지?’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보윤이 걸음을 옮긴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 잠깐만.”
정승만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보윤을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그 순간.
“…뭐 하는 짓이죠?”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도윤을 보며, 보윤이 인상을 찡그렸다.
“죄송합니다.”
“……!”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도윤을 보며, 보윤이 눈을 크게 떴다.
“제 욕심만 앞서, 박 검사님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상당히 조급했던 것 같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린 도윤이 보윤의 눈을 바라본다.
“더 이상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사과는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말을 마친 도윤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런 도윤을 빤히 바라보던 보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렇게까지 명성을 무너뜨리려 하는 이유가 뭔지. 솔직히, 강 검사님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마치 명성그룹과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
눈에 띌 정도로 표정이 굳는 도윤을 보며, 보윤이 급히 말을 덧붙인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가족.”
“…네?”
자신의 말을 끊고 대답하는 도윤을 보며, 보윤이 멍하니 반문했다.
“제 가족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정의니, 엄정한 준법정신이니 하는 판에 박힌 대답을 예상하고 있던 보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뭐, 뭐라고요?”
“도윤이! 그게 무슨 말이야? 가족을 건들다니? 설마 명성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정승만도 입을 열어, 속사포처럼 말했다.
“지금은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명성을 무너뜨리려 하는 데는, 분명히 제 개인적인 이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음…….”
도윤의 말에 정승만이 침음을 내뱉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보윤이, 도윤을 보며 말한다.
“좋아요. 그 리스트, 강 검사님에게 드릴게요.”
“……!”
눈을 크게 뜬 도윤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신, 나중에 제 부탁도 하나 들어줘요.”
“부탁이라면……?”
“불가능한 부탁은 아닐 거예요. 무리하다 싶으면, 거절해도 좋고요.”
“…알겠습니다.”
“깔끔하네요.”
씨익 미소 지은 보윤이 몸을 돌려, 다시 제자리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털썩.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는 보윤을 정승만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 보윤이 도윤을 향해 묻는다.
“제가 또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순식간에 뒤바뀐 보윤의 태도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윤도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직 한 가지.
어쩌면, 리스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염치없지만,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조금 긴장되는데요? 리스트 건도 어떻게 보면 충분히 큰 사안이었는데…….”
보윤이 말끝을 흐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말씀해 보세요. 이왕 하는 거, 확실히 서비스해 드릴게요.”
잠시 머뭇거리던 도윤이 이내 입을 열었다.
“…막아 주셨으면 합니다.”
“막아요? 뭘…….”
“박보군 총리님.”
“……!”
정승만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윤이 말을 잇는다.
“총리님이 이번 일에 과도하게 개입할 수 없도록, 얘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마친 도윤이 보윤의 두 눈을 바라본다.
어느새, 보윤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청부살인 의뢰는 취소하는 걸로 하죠.”
“예? 그러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브로커 사내를 보며, 박건우가 말한다.
“의뢰금은 예정대로 지급하겠습니다. 놈을 죽이는 것보다, 더 좋은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
낮게 웃음을 터뜨리는 박건우를, 브로커 사내가 말없이 바라보고 있기를 잠시.
“조선족 업자들. 내일 국내로 입국할 예정이죠?”
“예. 빠르게 연락 취해 놓겠습니다.”
“의뢰받은 일이 갑자기 취소되었으니, 그들도 당황스럽겠군요.”
“그야…….”
말을 잇던 브로커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베어 무는 박건우를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새롭게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괜찮겠죠?”
“새롭게 의뢰할 일이라면…….”
“별거 없어요. 원래 하려던 의뢰에, 대상만 바꾸려는 것뿐이니까.”
“…그 말씀은, 살인청부 의뢰를 하시겠다는……?”
“강도윤이야 이미 거래를 해 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거고, 성가실 게 뻔한 쥐새끼 같은 놈은, 미리 처리해 두는 게 좋겠지요.”
말을 마친 박건우의 미소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만 나가 보세요.”
“…알겠습니다.”
한차례 허리를 숙인 브로커 사내가 출입문 밖으로 나갔다.
“명성의 박건우라…….”
이내 홀로 남은 집무실에 박건우의 낮은 웃음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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