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비상 회의
도윤의 예상대로, 박건우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미 영장이 발부된 상황에서, 언제 자신에 대한 영장이 집행될지 모르니 시간을 끌어 봐야 자신에게 좋지 않은 상황만 만들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한 시간가량 지속된 기자회견에서 박건우는 많은 말을 하였지만, 요점은 하나였다.
모든 것은 오춘화 회장의 오더였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이어 나가는 박건우.
그리고, 회견이 이어질수록 국민들의 분노 또한 커져만 갔다.
당연했다.
이미 명성 측에서 언론에 은밀히 소문을 흘린 탓에, 이번 사태는 부사장인 박건우의 과잉 충성으로 인해 빚어진 일이었다고 알려진 상황.
그런 상황에서 박건우의 폭로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으니…….
국민들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자유당에서 명성으로 옮겨가, 하루가 멀다 하고 명성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자유당보다 명성 그룹을 욕하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크고 작은 위기 상황을 큰 탈 없이 넘겨 온 명성에도, 마침내 새빨간 비상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 * *
“…….”
명성 그룹과 관련된 대소사를 논의하는 대서재.
오춘화 회장을 제외한 모든 식구들이 모인 이 장소에는 고요한 침묵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침중한 분위기 속에서, 오춘화 회장의 장남 오창원이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회장님은?”
잠시 수화기에 귀를 갖다 대고 있던 오창원이 이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형님, 아버지는 뭐라고 하십니까?”
그룹 경영권 승계 경쟁 레이스에서 일찌감치 이탈한 막내 오상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곧 이곳으로 오실 거다.”
“…하이바(헬멧)라도 구해 놔야 겠군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넷째 오남규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씨발! 배은망덕한 것도 정도가 있지, 박건우 이 씹어 먹어도 모자랄 버러지 새끼!”
오남규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씩씩거렸다.
“정말… 토사구팽이라고, 쓸모가 다한 사냥개를 삶아 먹는 건 많이 봐 왔지만, 도리어 사냥개에게 물리는 건 처음 보네. 그것도, 우리 그룹이…….”
장녀 오호순이 오남규의 말을 거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들여 준비해 놓은 내 외식 사업들, 그 개새끼 때문에 다 말아먹게 생겼어! 브랜드 가치는 바닥이고, 회사 이미지가 이 정도까지 추락해 버리면, 이… 씨발!”
말을 잇던 오남규가 제 분을 참지 못하고 또 한 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오창원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규.”
“예, 형님.”
“형제들 중에 누구보다 냉정한 네가 판단해 봐. 떨어질 주가와 회사에 미칠 피해. 회복 가능할 거라 보나?”
오상규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최근의 홍역들로 이미 1차 폭락을 겪은 상황에서 또 한 번 이런 일이 터져 버렸으니, 최소 반토막은 각오하고 있어야 할 겁니다.”
“물론 그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 또한, 너는 알고 있겠지?”
“…….”
이어지는 오창원의 물음에 오상규가 입을 다물었다.
“뭐야?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는 거야, 지금?”
넷째 오남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침묵을 지키던 오상규가 이내 대답한다.
“…알고 있습니다.”
“……!”
대서재에 있는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얘기해 봐.”
“간단합니다. 아버지, 아니, 회장님이 스스로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죗값을 치르면 됩니다.”
“너 이 개새끼!”
오상규가 말을 마치자마자, 오남규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가 지금 지껄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아?! 이미 일흔이 훌쩍 넘은 아버지야! 죗값을 치러? 그렇게 빵에 들어가고 나면?!”
“…….”
“그냥 그대로 빵에서 돌아가시는 거야. 뒈지는 거라고!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그만!”
오상규의 멱살을 쥐고 고함치는 오남규를 보며, 오창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오상규를 보며, 오창원이 조용한 목소리로 묻는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나?”
“…나쁜 제 머리로는, 그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쪽 분야에서는 성춘이보다 더 똑똑한 게 너인데,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오창원이 이윽고 말을 잇는다.
“…우선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모조리 동원하도록 해. 상규 너는 우리 쪽 언론사 라인 연결해서, 옹호 기사들 확실히 보도될 수 있도록 조치해.”
“알겠습니다.”
“호순이 너는 다른 기업들에 손을 좀 빌려. 만약 이번 일로 정부 차원에서 칼을 빼 들게 되면, 명성뿐만 아니라 다른 기업들에도 한바탕 피바람이 불게 될 거라고. 만약 필요하다면… 회생 불가능한 계열사들, 그대로 갖다 바친다고 해.”
“오빠, 제정신이야? 우리 계열사를 그대로 가져다 바치겠다고? 그런 걸 아버지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아?”
오창원의 말에 오호순이 놀라 펄쩍 뛰었다.
그런 오호순을 보며, 오창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IMF 때… 파산한 기업들. 너도 봤을 텐데?”
“……!”
“망해서 그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경쟁 기업에 인수 합병되는 것보다야 낫지 않아?”
“그건…….”
“잘 생각해. 만약 아버지가 잘못되었을 때, 누가 차기 회장이 되는지.”
“미친!”
순간 욕지거리를 내뱉은 오남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 마음대로?! 제 아비 팔아서, 그 자리를 자기가 고스란히 처드시겠다? 누구 마음대로?!”
오남규의 말에 오창원이 피식 미소 지었다.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아버지 다음으로, 회사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굴까?”
“…….”
“굳이 장남이 아니어도,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오남규가 콰득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가… 가만히 계실 것 같아?”
“상규 말대로, 다른 방법이 없다면 아버지 또한 수긍하시겠지. 누구보다 명성을 사랑하는 분이, 이곳이 무너지는 것을 원하시진 않을 테니까.”
“…….”
“뭐, 그런 방법이 있다면 나도 참 좋겠다.”
오창원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막내, 오상규가 입을 열었다.
“…분명 큰 형님이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위치로도 차기 회장이 유력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의 지분. 그 모든 지분을 합치면, 큰 형님도 어쩔 수 없을 텐데요?”
“그래! 그렇지! 상규 네 말이 맞다!”
오남규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잠시 오상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오창원이 말한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으니까.”
“……?”
“아까도 말했지만, 형제 중에 누구보다 똑똑한 네가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물론…….”
오창원이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
“어느 때보다 힘을 모아야 할 이 상황에서, 망해 가는 회사 경영권 문제로 우리끼리 싸울 필요는 없지 않겠어?”
오창원의 물음에 그 누구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회사가 안정화되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 그대로 보존해 줌은 물론, 내가 가진 지분까지 모조리 나눠 주마. 나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명성 전자. 그거 하나면 돼.”
“자잘한 거에 골머리 앓을 필요 없이, 노른자 하나만 쏙 빼서 관리하시겠다?”
오남규의 비아냥거림에 오창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한다.
“그게 싫으면, 너랑 같이 공동 관리하는 방향으로 하지. 단, 네가 가진 외식업 지분도 그만큼 내놓아야 할 거야.”
오창원의 말에 오남규가 입을 다물었다.
전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외식업 또한 명성의 주력 분야 중 하나였다.
더군다나, 외식업을 전공하여 그 분야만을 전력 질주해 온 오남규에게, 그 지분을 절반이나 내놓으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더 이상 이에 대한 의견 없으면, 이 건은 이걸로 마무리 짓도록 하고…….”
오창원이 힐긋 출입문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이후의 얘기는 아버지가 오신 뒤에, 계속하지.”
말을 마친 오창원이 그대로 눈을 감자, 대서재엔 다시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 * *
도윤이 감회가 새롭단 표정으로 TV를 바라보고 있자, 정승만 지검장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축하한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는구나. 내 바로 밑에 있는 부하 검사가, 재계의 거물을 잡는 것을 보게 될 줄이야.”
“…아직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오 회장에게 수갑을 채우기 전까지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충복, 박건우의 대국민 증언. 저거라면 오 회장이 아니라, 오 회장 할애비라도 빠져나올 수 없어.”
“…….”
정승만의 말에도, 도윤은 전혀 기쁜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아직 오춘화 회장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지만, 무언가 꺼림칙했다.
그 대단해 보이던 오춘화 회장이 이대로 무너질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이제 첫걸음이잖아?”
정승만의 말에, 도윤이 정신을 차렸다.
“네 목적, 오 회장을 처벌하는 데만 있는 게 아니잖아?”
“…….”
“오 회장을 끌어내리면 분명 명성 또한 심각한 타격을 입을 테지만, 완전히 주저앉지는 않을 거야.”
“…….”
“자연스럽게 그 자식들이 오 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을 테고, 명성 그 자체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악순환은 계속해서 반복될 테지.”
도윤이 동의한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박건우를 회장 자리에 앉히려는 것이다.
사실, 도윤이 마음만 먹으면 오춘화 회장뿐만 아니라, 박건우 또한 구속시킬 수 있었다.
이미 밝혀진 죄질만으로도 박건우를 구속시킬 사유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하책 중에서도 하책이지.’
박건우가 구속되면, 자연스럽게 오춘화 회장의 자식들 중 한 명이 경영권을 승계할 것이다.
회사 경영권을 놓고 형제들끼리 반목할 가능성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회사가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는 핏줄들끼리 똘똘 뭉칠 가능성이 훨씬 더 컸다.
하지만, 만약 핏줄이 아닌 박건우가 회사 경영권을 쥐게 된다면…….
도윤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박건우와 그 형제들의 대립 구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서류 마무리해서, 오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지. 그전에, 총리님 의중부터 파악하는 것, 잊지 말고.”
대략적인 내막을 알고 있는 정승만 지검장이 조금 우려스러운 눈빛으로 뒷말을 덧붙였다.
“이미 총리님 의중은 파악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박 검사와 만남을 주선했던 거니까요.”
“역시, 말 안 해도 척척. 나는 이래서 도윤이 네가 좋아.”
정승만이 도윤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인사 청문회에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지검장님 커리어를 빛내 드리겠습니다.”
“윗사람 기분 맞춰 주는 것도 일품이고.”
정승만이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올려 세웠다.
“그럼, 바로 준비하러 나가 보겠습니다.”
“고생해.”
손을 휘휘 젓는 정승만을 향해 한 차례 고개를 숙인 도윤이 이내 몸을 돌렸다.
“…….”
출입문을 향해 몸을 돌린 도윤의 두 눈빛은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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