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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129화 (129/174)

129화 폭풍전야

명성그룹 본사 꼭대기 층에 위치한 오창원의 개인 집무실.

등을 돌린 채 창가를 바라보고 있는 오창원의 뒤로, 출입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진다.

똑, 똑, 똑.

“부회장님, 차상록입니다.”

“…들어와.”

오창원의 허락에, 굳게 닫혀 있던 출입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출입문을 등지고 있는 오창원을 향해 한차례 허리를 숙인 그의 비서, 차상록이 말한다.

“…생각보다 회의가 일찍 끝나신 것 같습니다.”

“…….”

“회장님은… 만나셨습니까?”

차상록의 물음에 오창원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회장님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셨다.”

“예? 분명히 오신다고 통보를 받았었는데…….”

“한 번 더 연락이 왔어. 급한 일이 생기셨다는군.”

“지금 이 일보다 급한 일이 어디 있다고…….”

황당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던 차상록이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답답했다.

이 회사, 명성은 오춘화 회장의 것만이 아니다.

명성이라는 이름 아래에 있는 수백, 수천 명의 직원들.

그들 하나하나의 노력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내 부모, 내 자식, 사랑하는 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그 삶의 터전이 회사 오너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짓밟히게 된 상황에서,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고?

‘아마도, 필사적으로 제 살길을 찾고 있을 테지…….’

속으로 중얼거린 차상록이 씁쓸한 미소를 입에 물었다.

“차라리… 회장님을 국외로 내보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

차상록의 말에 오창원이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아는 차상록은 절대 이런 말을 할 인물이 아니다.

일개 부회장의 비서 따위가, 어떻게 감히 회장의 국외도피를 운운할 수 있겠는가?

수십 년을 곁에 두고 봐 왔지만, 단 한 번도 이런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 것은 보지 못했다.

오창원이 출입문 방향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너…….”

“회장님 연세가 이미 일흔을 넘기셨습니다. 만에 하나, 구속이라도 된다면 남은 평생을 차가운 독방에 갇혀 사셔야 합니다.”

“…….”

“적당한 방안이 없으시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보시는 것도…….”

말끝을 흐리던 차상록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건방진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

“…….”

차상록의 말에도, 오창원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진심으로 고민되었기 때문이다.

국외도피라고, 결코 능사는 아니다.

누군가는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만 국외에서 버티면 될 거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명백한 오산이다.

현행법상, 형사처벌을 면할 목적으로 국외에 나가 있는 기간은 공소시효가 정지된다.

비즈니스를 위해서, 따위의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국외에 나가는 여러 가지 이유 중, 부수적으로라도 형사처벌을 면할 목적이 포함되어 있으면 당연히 공소시효가 정지되기 때문이다.

“제게 다른 뜻이 있는 건 결코 아닙니다. 단지, 독방보다는 경치 좋은 외국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시는 것이, 회장님 입장에서도 훨씬 나을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알아.”

“예?”

“상록이 니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오랫동안 너를 봐 온 나는 알고 있어.”

“…….”

오창원의 말에 차상록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오창원이 이내 말을 잇는다.

“일단 니가 말한 방법은… 잠정 보류하도록 하지.”

“그 말씀은…….”

“회장님, 아니. 아버지는 지금의 명성을 만들어 놓기 위해,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어.”

“…….”

“니 말대로… 이제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럼……!”

차상록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 방법은 최후의 최후에. 그 전까지, 다른 최선책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

“물론입니다. 저도 다방면으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용무를 마친 차상록이 이내 몸을 돌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쿵!

출입문에서 들려오는 짧은 소음과 함께, 이제는 홀로 남게 된 오창원이 작게 중얼거린다.

“아버지…….”

창가를 향해 몸을 돌린 오창원의 두 눈빛은 어느 때보다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평화당 대표, 박영동이 차를 홀짝이며 힐끗 맞은편을 바라본다.

박영동의 시선이 이르는 곳에는, 마찬가지로 평화당 원내대표인 민수성이 턱을 괸 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민수성의 생각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던 박영동 대표가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유당 의원들, 지금쯤 살판났겠지요?”

박영동의 말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민수성이 대답한다.

“말해야 입만 아프지요. 아마 수 일 내로 집안 단속 마무리하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국회에 하나둘 나타날 겁니다.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런 것들을 겪을 때마다 이 나라 정치판에 환멸을 느낍니다.”

“수십 년을 이 바닥에서 굴러 오시면서, 이보다 더한 일도 많이 겪으셨을 텐데 왜 갑자기 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민수성의 말에 박영동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이제는 제가 늙었다는 뜻이겠지요.”

“한창이십니다. 이제 그곳까지, 얼마 남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조금 지쳐서 약한 소리 한번 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든든한 후임자가 있는데, 혹여 내가 정계 은퇴를 하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대표님!”

화들짝 놀라 외치는 민수성을 보며, 박영동이 ‘허허’ 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농담, 농담입니다.”

“…아무튼, 자유당 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이미 당에 대한 지지도뿐만 아니라, 인기마저 바닥까지 추락한 상황. 일부 극성 지역을 제외하면, 모든 지역에서 자유당에 등을 돌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겠지요.”

“솔직히, 만약 박보군 총리가 직접 나서지만 않았다면…….”

“그 얘기는.”

분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 민수성의 말을 중간에서 끊은 박영동이 조용히 손사래 쳤다.

“…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총리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방파제가 되었는지, 민 의원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

민수성이 입을 다문 채,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박영동 대표가 말을 잇는다.

“민 의원 마음, 누구보다 내가 잘 압니다. 분하겠지요. 화가 나겠지요. 눈앞에서 버젓이 국민들 등골을 빨아먹는 인간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만약 화가 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정치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지요.”

“…….”

“민 의원이 아까 얘기했지요? 이보다 더한 일도 많이 겪었을 것이라고.”

가만히 듣고 있던 민수성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박영동이 말을 잇는다.

“맞습니다. 나는 수십 년간, 이 바닥에서 온갖 암투와 상상도 할 수 없는 더러운 수작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 미치고 팔짝 뛸 정도의 근거 없는 모함도 직접 받아 봤죠.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한때 심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습니다.”

말을 잇던 박영동이 민수성의 두 눈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이 나라의 정치인으로 당선되는 순간, 그것은 마치 숙명처럼 다가오는 것들이니까요.”

“…체질 개선. 국민들의 인식과 이 나라의 정치판 자체를 완전히 뒤집어 놓지 않는 이상, 그 숙명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요.”

민수성의 대답에 박영동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민 의원이, 부디 저 같은 정치인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백수십 명의 당원들을 대표하는 당 대표로서, 그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눈치만 보는 정치인은 되지 마세요.”

“…….”

“백수십 당원들의 대표가 아닌, 수천만 국민들을 대표하는 여당의 수장이 되세요.”

“……!”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을 잇는 박영동 대표를 민수성이 멍하니 바라봤다.

“당원들이 아닌 국민들의 눈치를 보는 정당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유당이나 다른 야당들보다, 우리가 먼저 나서서 바뀌어 가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 줬으면 좋겠습니다.”

“…….”

“한 번에 많은 것을 바꾸려 하지 말고, 조금씩, 천천히. 그러다 보면 국민들이 정치인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씩 바뀔 거라, 저는 확신합니다.”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민수성을 보며, 박영동 대표가 멋쩍게 웃었다.

“…얘기하다 보니, 주제에서 벗어난 잔소리만 민 의원에게 늘어놓은 꼴이 되었군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부터 이번 자유당과 명성의 일까지. 연이어 많은 일들을 겪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늙은이 주책 받아 주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민 의원. 바쁘실 텐데, 이만 나가 보셔도 됩니다.”

말을 마친 박영동 대표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박영동을 잠시 올려다보던 민수성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

“……?”

고개를 갸웃하는 박영동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민수성이 이내 말을 잇는다.

“저는 반드시, 이 나라를 바꾸어 보일 겁니다.”

힘주어 말하는 민수성을 잠시 바라보던 박영동의 입가에, 어느덧 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도착했습니다, 회장님.”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남자의 말에, 뒷좌석에서 쿨럭이는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나, 힘없는 노인의 목소리가 차량 안에 울려 퍼진다.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어서 그런지, 몸이 영 예전 같지가 않아.”

“돌아가는 대로, 괜찮은 보약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건우 놈도, 앞에서는 그렇게 나를 위해 주는 척했지.”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분명 분노로 가득해야 할 노인의 목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평온했기 때문이다.

노인과 옆 좌석에 앉은 사내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저는 언제나 진심입니다. 박건우 같은 놈과는 다릅니다.”

“글쎄… 그거야, 좋든 싫든 오늘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지.”

“…….”

노인의 말에 사내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내리지.”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후다닥 뛰어내려, 조수석 뒷좌석 문을 열었다.

고급스러운 검은색 대형 세단의 문은 소리조차 내지 않고 부드럽게 열렸다.

곧이어, 그곳에 타고 있던 노인이 천천히 내려서며 모습을 드러낸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상위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자, 명성그룹의 주인.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인물.

긴 침묵을 깨고, 오춘화 회장이 마침내 서울도심지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앞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일식집을 바라보며, 차량에서 내려선 오춘화 회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로, 모든 게 결판나겠군. 내 운명도, 내가 일궈 온 명성의 운명도.”

“…….”

감회 어린 표정으로, 잠시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던 오춘화 회장이 이내 걸음을 옮겼다.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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