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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130화 (130/174)

130화 장학수

법조타운 내에 위치한 호식의 변호사 사무실.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던 배영준이 출입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강 검사님!”

이내 사무실 내로 들어서는 인물의 정체를 확인한 배영준이 반가운 얼굴로 소리쳤다.

“배 기자님, 역시 여기 계셨네요.”

“말도 마라. 여기가 영준이 형 사무실인지, 내 사무실인지, 이제는 분간도 안 간다.”

책상 밑에서 서류를 뒤적이던 호식이 고개만 빼꼼 내밀며, 배영준 대신 말했다.

그런 호식을 힐끗 돌아본 도윤이 묻는다.

“형동생 하기로 했나 봐?”

“내 성격 알잖아. 님님거리면서 격식 따지는 거, 진짜 싫어하는 거.”

“하긴…….”

피식 미소 지은 도윤이 이번에는 배영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묻고 싶은 말씀이 많은가 보네요.”

“…티가 나나요?”

배영준이 멍하니 반문하자, 도윤이 옅게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세요. 제가 아는 거라면, 뭐든 말씀해 드릴게요.”

도윤의 말에 배영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데스크에서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추측성 기사나 심하게 공격적인 내용만 아니라면, 자유당 관련 기사는 물론 명성 쪽 기사도 써도 괜찮다고요.”

“…….”

“입에 게거품까지 물고,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하던 데스크에서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 분명, 강 검사님과 연관이 없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도윤을 보며 배영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혹시… 강 검사님이 총리님을 직접 만나셨습니까?”

“뭐라고!?”

쿵!

순간 책상 쪽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야… 쓰읍!”

깜짝 놀라 머리를 치켜들던 호식이 그대로 책상 밑바닥에 뒤통수를 부딪혔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이나 제 머리를 문지르던 호식이 배영준을 향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영준이 형! 총리님이라니? 설마, 내가 아는 그 총리님은 아니겠지?”

“…….”

자신의 물음에도 도윤만을 바라보는 배영준을 보며, 호식이 멍하니 중얼거린다.

“설마, 도윤이가 진짜 박보군 국무총리를 만났다고……?”

“직접 만난 건 아니고…….”

도윤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잇는다.

“…그 손녀를 만났지.”

“손녀? 손녀라면…….”

말끝을 흐리며, 묘한 표정을 짓는 호식을 일별한 도윤이 배영준을 바라본다.

“데스크의 허가가 저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는 못 하겠군요.”

“역시…….”

배영준이 예상대로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치더라도, 배 기자님이 전에 써 놓은 기사를 그대로 내지는 못할 텐데요?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자유당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던 것 같은데…….”

“덕분에, 이미 모두 손봐 둔 상태입니다.”

배영준이 씨익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종이들을 손에 쥐고 흔들었다.

“사실, 간덩이가 큰 몇몇 신문사가 선수 쳐서 자유당을 물고 뜯어, 이미 단물은 죄다 빠진 상태거든요. 크게 재미 못 볼 걸 뻔히 아는데, 이 상황에서 굳이 자유당을 또 건들 필요는 없겠죠.”

“그럼 이 기사는…….”

도윤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묻자, 배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명성그룹에 대한 기사입니다. 박건우 부사장의 기자회견으로 신문사들의 관심이 다시 이쪽으로 쏠리고 있다지만…….”

도윤을 바라보는 배영준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이번 사태에 대한 정확한 내막을 아는 건, 아마도 우리밖에 없겠죠.”

“잘됐군요.”

도윤이 마주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모두 강 검사님 덕분입니다. 이 기사가 보도되면, 비로소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다 잡아들일 수 있겠군요.”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호식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두 마리 토끼라니? 거, 둘만 얘기하지 말고, 나도 좀 압시다.”

“별거 아니야. 그냥,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명성의 오춘화 회장에게도 조금 공유해 줬을 뿐이니까.”

“우리가 가진 정보를… 오 회장에게 공유했다고?”

호식이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내가 아는 오 회장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성격이 절대 아니거든.”

“아오, 답답해! 말을 하면 할수록,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

제 머리를 벅벅 긁는 호식을 보며, 도윤이 씨익 미소 지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그런 거로 짜증 내지 말고, 오랜만에 아버지께 안부 인사나 드려.”

“남이사!”

호식이 팩 하고 고개를 돌렸다.

“…….”

그런 호식을 바라보는 도윤의 의미 모를 미소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 * *

서울 도심지 한복판에 자리한 고급 일식집답게, 각 방마다 전담 종업원이 딸려 있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가장 구석에 위치한 방 앞에 이르러,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 종업원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숙인다.

“필요하신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종업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노인, 오춘화 회장이 손을 들어 보였다.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지.”

“알겠습니다, 회장님.”

오춘화 회장을 따르던 두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 두 사내를 향해 종업원이 조용히 말한다.

“두 분은 다른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윽고, 자신을 따르던 두 사내가 종업원을 따라 사라지자, 오춘화 회장이 눈앞에 있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드르륵.

들릴 듯 말 듯한 소음과 함께, 오춘화 회장의 눈앞에 펼쳐지는 방의 내부.

옛 일본풍의 인테리어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고, 테이블 위에는 이미 각종 해산물을 포함한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테이블 앞에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중년 사내.

서글서글한 인상 사이로 보이는 고집스러움이 누군가와 상당히 닮아 있는 그 중년 사내가, 지금 막 방으로 들어서는 오춘화 회장을 발견하고는 입을 열었다.

“…제법 허기가 져 있던 상태라, 실례인 줄 알면서도 먼저 좀 들고 있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중년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제가 늦은 탓이지요.”

오춘화 회장이 마주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인사.

오춘화 회장이 이 정도로 예를 갖추는 인물은, 대한민국 내에서도 몇 되지 않는다.

대체 누구이기에 오춘화 회장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그에 대한 의문은 오춘화 회장 본인에 의해, 금방 해소되었다.

“한창 바쁘시지요? 나날이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KS그룹을 생각하면, 저로서는 장 회장님이 얼마나 바쁘실지, 짐작조차 가지 않습니다.”

“저보다는 오 회장님이 더 바쁘실 때 아닙니까?”

“…부정은 못 하겠군요.”

오춘화 회장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의 대화로, 비로소 먼저 자리하고 있던 중년 사내의 정체가 밝혀졌다.

대한민국 10대 기업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KS그룹의 현 회장이자, 대기업 회장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인물.

호식의 아버지이기도 한 장학수 회장이었다.

“아버지뻘 되시는 회장님과 서서 대화하려니, 제가 불편하군요. 일단 앉으시지요, 회장님.”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오춘화 회장이 이내 자리에 앉았다.

“한 잔 받으십시오.”

장학수가 술을 권했고, 오춘화 회장이 이를 받아 마신다.

그리고, 다시 오춘화 회장이 장학수에게 받은 술을 그대로 돌려준다.

그렇게 말없는 술이 몇 순배쯤 돌았을 때.

침묵을 지키던 장학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이렇게 오 회장님이 저를 보자고 하셔서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지금의 명성은, 회장님이 자리를 비우시기에는 상황이 매우 좋지 않으니까요.”

“…….”

“솔직한 제 심정으로는, 오늘 이 만남이 상당히 꺼려졌습니다. 지금의 회장님을 만나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는 것.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마친 장학수가 손에 쥔 술잔을 그대로 쭈욱 들이켰다.

그런 장학수를 바라보는 오춘화 회장의 두 눈에는 여전히 씁쓸함만이 가득했다.

‘나라고… 너를 만나고 싶었겠나?’

속으로 중얼거린 오춘화 회장도 손에 쥔 술을 들이켰다.

화끈한 알코올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가슴속에 애써 묻어 둔 감정이 물꼬를 트려 한다.

분노.

장학수는 모르고 있겠지만, 오늘 이 만남은 오춘화 회장 또한 탐탁치 않았다.

만남의 계기가, 다름 아닌 ‘그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강도윤…….’

오춘화 회장이 제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이제는 안다.

지난 수 년간, 사사건건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장애물의 실체를.

정의감에 불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 댄다고 생각했던 일개 신임 검사가, 사실은 자신의 가장 큰 적들 중 하나였다는 것을.

‘이 내가, 어쩌다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놀아나게 되었는지…….’

오춘화 회장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박건우가 기자회견을 끝마친 직후.

놈은 ‘서울중앙지검 강도윤이 친애하는 오춘화 회장님에게.’라는 이름의 등기를 하나 보내왔다.

가당치도 않은 그 행동에 처음에는 헛웃음만 절로 흘러나왔지만, 등기 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이내 그 웃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수십 장의 종이 뭉치.

그 안에는, 박건우의 원래 계획들이 모두 담겨 있었다.

도윤에 대한 살인 청부와 KS그룹에 대한 모략부터, 스스로 회장이 되고자 그 모든 계획들을 포기했다는 것까지.

처음에는 분노가 이성을 잠식하여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당장이라도 박건우를 찾아가, 갈가리 찢어발기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게 되자, 곧바로 의문이 들었다.

왜 놈은 자신에게 이것들을 보내온 것일까?

이대로 두었으면 놈의 목적대로, 자신은 철창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간계와 모략에 능통한 오춘화 회장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놈의 최종 목표가 나 하나의 구속이 아니라, 회사의 완전한 파산이라면… 이해가 간다.’

설령 박건우의 원래 계획에 대해 알았다 치더라도, 현 상황에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KS그룹의 증명 없이는, 놈이 보내온 종이 뭉치들 또한 한낱 근거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회장인 장학수가 스스로 나서 적당히 연극을 해 주지 않는 이상, 구속은 피할 수 없다.

눈앞에 있는 장학수는 바보가 아니다.

이런 내용을 알려 준다고, 순순히 ‘저희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따위의 인사를 할 인물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명성의 사람이 자신들을 위기에 빠뜨리려 한 사실로 책임을 추궁하고, 대가를 요구할 인물이다.

그게 바로, 사업가라는 족속들이었으니까.

‘빌어먹을…….’

장학수의 두 눈을 바라보며, 오춘화 회장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입맛이 썼다.

손해만 보는 장사를 해야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화가 났다.

이번 거래로, 눈앞에 있는 능구렁이가 어떤 것을 요구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 내가, 당하고만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도윤을 떠올리며,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간 오춘화 회장이 마침내 품에 있는 서류 봉투를 장학수에게 내밀었다.

“이건……?”

갑작스러운 오춘화 회장의 행동에 장학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장 회장, 나랑, 거래 하나 합시다.”

오춘화 회장의 높낮이 없는 음성이 방 내부에 조용히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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