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박건우 구속
오춘화 회장이 장학수 회장에게 모종의 거래를 제안하고 있던 그 시각.
서울 외곽,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컨테이너 박스에서도 은밀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휘파람을 불며 서류를 뒤적이고 있는 박건우를 보며, 브로커 사내가 물었다.
“뭐가요?”
“강도윤 검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말입니다.”
박건우가 피식 미소 지었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놈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명성그룹 자체의 몰락. 그 목적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현 상황에서 그놈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죠.”
“그게 아니라…….”
브로커 사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리더니, 잠시 후 말을 잇는다.
“오 회장님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저는 직접 본 적이 없지만…….”
순간 박건우가 움찔했다.
계속해서, 한차례 한숨을 내쉰 박건우가 말한다.
“가만히 있으시지 않겠죠. 자존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으신 분이고, 당하고는 절대 못 사는 성격이시니까요.”
“그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강도윤, 그놈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겁니다.”
“예?”
고개를 갸웃하는 브로커 사내를 보며, 박건우가 말을 잇는다.
“놈이 과연 그 회장님을 구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 여부에 따라, 내 행동 또한 달라지겠지요.”
“…….”
“나는 정말로 놈이 싫지만… 놈의 능력만큼은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단 한 번도 문제된 적 없었던 그룹의 치부를 모조리 밝혀내 깨부쉈을 뿐만 아니라, 종래에는 결국 회사 오너 일가 중 하나를 구속시키기까지 했으니까요.”
“만약에, 강도윤 검사가 오 회장을 구속시키는 데 실패한다면…….”
박건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에는, 괜찮은 나라나 물색해 봐야겠지요. 돈이야, 썩어 넘칠 정도로 많이 모아 뒀으니, 남은 여생 돈이나 쓰면서 편안하게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
“회장님 성격이라면, 뒤통수를 친 나를 자르는 것만으로 만족하시지 않을 테니까.”
이어지는 박건우의 말에 브로커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브로커 사내를 보며, 박건우가 말을 잇는다.
“그런 눈빛으로 보지 않아도 됩니다. 아까 말했다시피, 나는 능력 면에 있어서는 놈을 믿습니다. 두 수, 세 수 앞을 내다볼 정도로 치밀하고 간계에 능한 놈이니까요.”
“…….”
“특히나, 밥 달라고 짖어 댈 줄만 아는 멍청한 개, 돼지들을 동조시키는 능력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죠. 나는, 놈이 반드시 회장님을 구속시킬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 말씀은…….”
순간 박건우가 눈을 빛냈다.
“놈은 한 가지,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착각… 이요? 강도윤 검사가 말입니까?”
브로커 사내의 반문에 박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을 구속시키고, 나와 나머지 오씨 일가의 대립 구도를 만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명성의 세는 줄어들 테고, 그 틈에 회사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이것이 놈의 최종 계획. 하지만…….”
박건우가 타오르는 듯한 시선을 들어, 컨테이너 창문 밖 먼 곳을 응시한다.
“나는, 회장님의 자식들과 대립각을 세울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
브로커 사내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회장의 자식들과 대립각을 세울 생각이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브로커 사내의 의문은 그대로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스스로 물러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러나요? 내가요?”
눈을 동그랗게 뜬 박건우가 피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회장님의 맏아들인 오창원은, 상당히 야망이 큰 인물이니까.”
“…….”
“회장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회사 주가의 폭락 또한 정해진 수순입니다.”
“…….”
“망해 가는 회사에서 남은 콩고물에 눈이 멀어, 최대 경쟁자 중 하나인 나와 서로 물고 뜯는 선택을 할 정도로 그 사람은 어리석지 않아요.”
박건우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브로커 사내가 멍하니 반문한다.
“공생을… 원하시는 겁니까?”
“…….”
말없이 창문 밖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박건우가 곧이어,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글쎄요…….”
“…….”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현 시점에서 나와 오창원의 생각만큼은 같을 겁니다.”
“…어떤 생각, 말씀이십니까?”
잠시 제 주먹을 꽈악 말아 쥔 박건우가 대답한다.
“강도윤의 몰락.”
“……!”
“이번 일이 끝나면, 오창원이 먼저 나서든, 내가 먼저 나서든. 반드시 놈을 끝장낼 겁니다. 여의치 않으면, 당신이 다시 나서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겠지요.”
이윽고, 박건우가 창문 밖에서 시선을 떼고, 브로커 사내를 바라본다.
시리도록 차갑게 가라앉은 그 눈빛에 브로커 사내는 오한이 들 정도였다.
“그때가 온다면…….”
“…….”
“놈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이 세상에 지워야겠지요. 천한 놈이 감히 누구를 건드렸는지, 죽어서라도 똑똑히 깨닫도록 만들어 줘야겠지요.”
박건우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낡은 컨테이너 박스 내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뭐라구요!?”
언론 보도를 남겨 두고,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있던 배영준이 누군가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놀라 소리쳤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호들갑스러운 배영준의 반응에 순간 호식과 도윤의 두 눈이 마주쳤다.
“텔레비전…….”
가만히 휴대폰을 들고 있던 배영준이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눈치 빠른 도윤이 재빨리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파앗!
이내 TV 스크린에 떠오르는 화면을 발견한 호식이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버지?”
“……!”
호식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은 도윤도 눈을 크게 떴다.
호식이 아버지라 부를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당연히 하나밖에 없다.
‘KS그룹 장학수 회장……! 그렇다면…….’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의 두 눈이, 천천히 평상시대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회장이 직접 나서 기자회견을 열 만한 사건은 KS그룹에 있지 않았다.
그 말은…….
‘오춘화 회장이 직접 움직였다!’
판단을 마친 도윤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때, TV 속의 장학수 회장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KS그룹의 장학수입니다.”
장학수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조용히 퍼져 나가자, ‘찰칵’거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기자회견에 앞서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최근 저희 회사를 상대로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악독한 계략을 꾸민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회사에 대한 악독한 계략이라니, 설마…….”
호식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TV 속 기자 중 하나가 조용히 손을 들며 묻는다.
“악독한 계략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최근, 모 기업의 누군가가 정치권과 결탁한 사실을요. 심지어, 거짓 증거들로 국민들을 기만하기까지 했죠.”
“……!”
장학수의 입에서 의외의 주제가 흘러나오자, 대부분의 기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
장학수 회장의 위치를 생각하면, 공개석상에서 굳이 한창 이슈화되고 있는 민감한 얘기를 또다시 들쑤실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같은 기업인이 저지른 비리가 아닌가?
이 일을 계기로, 정부에서 해당 기업뿐만 아니라, 기업 전체를 상대로 칼을 빼들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한 기자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외친다.
“KS그룹에 대한 계략이 명성그룹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외침과 동시에, 기자들의 시선이 장학수 회장 한 사람의 입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의 대답에 따라, 언론계는 또 한 번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특종의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눈을 반짝이고 있을 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장학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장학수의 대답에 또다시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왔다.
번쩍이는 플래시 세례 사이에서, 장학수가 미리 준비해 둔 서류 더미를 손에 들어 보였다.
“명성의 누군가가, 특정 루트를 통해 입수한 저희 회사의 정보를 이용하여, 음모를 꾸몄습니다.”
“어떤 음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여기에는 유출될 시, 저희 회사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는 1급 비밀부터, 그룹 임원진의 가족 관계와 기타 인적 사항 등의 자잘한 대외비까지. 저희 회사와 관련된 크고, 작은 정보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기자들을 둘러보던 장학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는 이 정보를 가지고, 이번 대국민 사기극의 죄를 저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했죠. 이 모든 일은, 명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저희 그룹에서 준비한, 치밀한 계획이었다는 식으로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KS그룹의 비밀을 가지고,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니…….”
“자세한 건, 직접 들어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장학수가 뒤쪽을 향해 손짓하자, 스피커를 타고, 준비된 녹음 파일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바쁘신 분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어떤 정보가 필요하십니까?’
‘납치 의뢰 하나와 국내에 있는 특정 기업에 대한 정보.’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내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름은 강단비. 서울 소재 대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자세한 신상 정보는, 서류로 정리해서 넘겨드리죠.’
녹음 파일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약 5분가량 더 지속되었다.
“이 목소리는 분명히…….”
이쯤 되자, 눈치 빠른 몇몇 기자들도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채곤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스피커에서 더 이상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기자회견장은 고요한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그 숨 막힐 듯한 분위기 속에, 장학수가 조용히 말을 잇는다.
“…정확히는, 음모를 꾸민 주체가 명성그룹은 아닙니다.”
“…….”
“명성그룹의 현 부사장 직책을 맡고 있는 박건우 씨.”
“……!”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이용하여, 그가 독단적으로 이 모든 일을 꾸몄습니다.”
찰칵.
장학수가 말을 마친 그 순간.
얼떨결에 카메라 셔터를 누른 한 기자의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수없이 많은 플래시 세례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둘러싸이는 장학수를 보며, 배영준이 조용히 TV를 껐다.
“…….”
호식의 사무실에도 어느덧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가장 먼저 상념에서 벗어난 배영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일단 사무실에 한번 가 봐야겠습니다.”
“…나도, 집에 한번 가 봐야겠어.”
짧은 인사와 함께 두 사람이 순식간에 사무실 출입문을 나섰다.
이제는 홀로 남은 도윤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때맞춰 주머니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진동 소리에, 도윤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휴대폰 화면에 표시되는 이름.
정승만 지검장이었다.
“…예, 지검장님.”
“방금 기자회견… 봤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윤이 대답한다.
“…예.”
“…….”
도윤의 대답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정승만이, 이윽고 굳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서랍 안에 넣어 둔 영장 가지고… 박건우, 당장 잡아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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