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도주의 끝
오춘화 회장의 저택, 개인 집무실.
책상에 앉은 오춘화 회장이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수화기에 말한다.
“…이번 일, 잊지 않겠습니다, 장 회장님.”
“아니요. 목적이 있으셨겠지만, 오 회장님이 아니었으면 저희도 모르고 넘어갔을 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장학수의 말을 끊고, 오춘화 회장이 재빨리 말을 잇는다.
“올해 정부사업에서 저희 명성물산은 완전히 손을 떼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회사 전체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으실 텐데, 올해 수익이 가장 크게 기대되는 물산이 발을 빼 버리면…….”
장학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각 부처 정부기관들의 급식 및 식자재 유통업체 최종 선정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상황에서, 현재 최종 후보로 명성물산과 KS물산, 2파전이 유력시되고 있었다.
최소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대에 이를 대규모 사업이었기에, 두 그룹 모두 최근까지 전력투구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명성이 이번 사업에 발을 빼겠다는 말은, 물산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오춘화 회장이 조용히 대답한다.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이걸로, 회장님에 대한 의혹도 모두 해소되겠군요. 박건우 부사장이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이제 전 국민이 알게 되었으니까요.”
“…….”
“아무튼, 이제 저희도 따로 연락하는 건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 괜히 의심 살 일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요.”
“…동감입니다.”
“그럼, 다음번에는 조금 더 건설적이고, 유쾌한 일로 뵙길 바라겠습니다.”
이윽고, 수화기 너머로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오춘화 회장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건설적이고, 유쾌한 일이라…….”
씹어 내뱉듯 중얼거리던 오춘화 회장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빼앗긴 내 것을 되찾아 옴은 물론, 똑같이 빼앗아 주마.”
오춘화 회장은 욕심이 상당히 많은 인물이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더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도리어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빼앗겼다.
겉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 오춘화 회장의 속에서는 천불이 일고 있었다.
“건우 그놈은 이제 끝이다. 더 이상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겠지. 그놈보다 더 괘씸한 놈은…….”
낮게 읊조리던 오춘화 회장이 서슬 퍼런 얼굴로 눈을 빛냈다.
“강도윤…….”
오춘화 회장이 힐끗 뒤를 돌아봤다.
두 사내가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깔끔한 정장 차림에 무테안경을 쓰고 있는 오창원.
그리고…….
“건우 그놈, 또 다른 얘기는 하지 않던가?”
오춘화 회장의 물음에 나머지 사내가 화들짝 놀랐다.
박건우와 모종의 거래를 했던, 제로라 불리던 브로커 사내였다.
“그, 그게…….”
브로커 사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내가 정말로 화나는 게 뭔지 아나?”
오춘화 회장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건우 놈이 내 자리를 넘봐서? 아니야. 오랫동안 곁에 두고 지켜봐 왔던 나인데, 그놈의 야망 따위를 모르고 있었을까?”
“…….”
“니가 할 말이 있다며 나를 찾아왔을 때, 왜 내가 너 따위 놈을 만나 줬는지, 그걸 한번 잘 생각해 봐. 만약 니 가치를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면…….”
이내 브로커 사내의 코앞까지 다가온 오춘화 회장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너 또한 무사하지 못할 거야.”
“……!”
순간 브로커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이었지만, 막상 눈앞에 거물을 마주하자 오금이 저릴 지경이다.
오로지 한평생을 눈치만으로 살아온 자신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말 한 마디로 자신의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는 인물.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일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된 즉시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던가.
마른침을 꿀꺽 삼킨 브로커 사내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강도윤 검사는… 명성그룹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인 듯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상대하기 쉽다고 판단한 박건우 부사장을 회장으로 만들어…….”
“네놈도 뭘 잘못 알고 있군.”
“예?”
멍하니 반문하는 브로커 사내를 향해 오춘화 회장이 손에 쥔 종이 뭉치를 가볍게 던졌다.
브로커 사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했다.
“이, 이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브로커 사내가 빠르게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곳에, 박건우의 모든 계획이 담겨 있었다.
KS그룹을 이용해 음모를 꾸미려 했던 것부터, 강도윤 검사에 대한 살인청부 의뢰까지.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설령 KS그룹이 이 사실을 알았다 치더라도, 이런 시기에 그룹 회장이 공개적으로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이걸 빌미로 명성에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애초에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
‘오춘화 회장, 모두 알고 있었구나!’
브로커 사내가 속으로 경악하고 있을 때, 오춘화 회장이 묻는다.
“이걸 누가 나한테 줬다고 생각하나?”
“…….”
브로커 사내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자신과 박건우, 암시장 관계자들과 나머지 한 명뿐이다.
‘나와 박건우는 당연히 제외. 그렇다면, 역시 암시장 관계자 중 누군가가 명성그룹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건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브로커 사내가 순간 딱 하고 오춘화 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 시릴 정도로 차가운 두 눈빛을 마주했을 때, 브로커 사내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이 모조리 지워졌다.
그저, 오춘화 회장이 말했던 ‘뭘 잘못 알고 있다.’라는 말만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설마… 강도윤 검사가……?”
생각은 곧바로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런 사내를 보며, 오춘화 회장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눈치까지 없는 멍청이는 아니군.”
“대체 왜… 그 사람의 목적은 분명히…….”
“놈의 목적. 정확하게는, 명성을 무너뜨리는 데만 있지 않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브로커 사내를 보며, 오춘화 회장이 말을 잇는다.
“무슨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명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려 하고 있다. 그 안에는, 당연히 일단은 부사장인 건우 그놈도 포함되어 있지.”
“…….”
“더군다나, 건우는 강도윤, 그놈의 목숨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 해하려 하지 않았나?”
“그래서 회장님에게…….”
다시 창가를 향해 걸어간 오춘화 회장이 쓰게 웃었다.
“건방진 놈이야. 이러면, 마치 놈이 내 목숨을 구해 준 모양새지 않은가? 그것도, 회사에 충분한 타격까지 주면서 말이야.”
“…….”
“천하의 오춘화가, 이토록 궁지에 몰렸던 적이 또 있었던가?”
고개를 숙인 채, 상념에 빠져 있던 오춘화 회장이 이윽고 자세를 바로 했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것도, 내 성미에 맞지 않지. 하물며 그 대상이, 일개 평검사 따위인 것을…….”
“…….”
“오창원이.”
갑작스러운 부름에 쥐 죽은 듯 가만히 있던 오창원이 화들짝 놀라 대답한다.
“예! 아버지.”
“지난 수년간, 수없이 많은 도약을 해야 했을 이 회사가, 고작 한 놈 때문에 이제는 부도를 걱정하게 생겼다.”
오창원이 입을 다문 채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정도로 몰렸는데, 아직도 고작 평검사라고 생각하면, 그건 자신이 아니라 자만이겠지.”
“…….”
“나는 당분간 이곳을 떠날 것이다.”
“예!? 그게 무슨…….”
오창원이 놀라 반문했다.
“외부에는 지병 악화로 적당히 칩거했다고 둘러대. 그리고…….”
오춘화 회장이 옆에 있는 브로커 사내를 향해 말한다.
“너.”
“예, 예! 회장님.”
멍하니 있던 브로커 사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기회를 달라고 했지?”
“뭐, 뭐든지 하겠습니다, 회장님!”
“넌 날 따라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알, 알겠습니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오창원이 멍하니 중얼거린다.
“아, 아버지……?
“내가 직접 나설 거다. 오로지 놈을 잡기 위한 계획, 그리고 대외활동.”
“그 말씀은…….”
“오늘부터 대외적인 명성의 회장은 너다.”
“…….”
“만약 이번 내 계획이 실패하면, 그 때에는 니가 정말로 이곳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
오창원의 두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놈이 끝나든, 내가 끝나든. 어느 한쪽이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오춘화 회장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 * *
“빌어먹을…….”
깊은 산속까지 숨어든 박건우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얼마나 달려왔는지, 입에서는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기자회견이 세상에 알려짐과 동시에, 박건우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생각한 방법이 해외 도피.
삼면이 바다인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는 도피생활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아마 얼마 가지 못해 붙잡힐 것이다.
그래서,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건만.
이미 출입국사무소에까지 모조리 통보되어 관계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미리 사람을 보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꼼짝없이 붙잡힐 뻔했다.
차량을 타고 달리고 또 달렸다.
목적지는 생각해 둔 곳이 있었다.
수년 전, 순천에 위치한 산 깊숙한 곳에 별장을 하나 지어 뒀다.
자신만 아는 지하에 족히 수십억은 되는 현금을 묻어 뒀을 뿐만 아니라, 몇 년은 버틸 수 있는 비밀 공간도 있었다.
‘1년, 아니. 세상이 잠잠해질 때까지, 몇 개월만 버티면 된다.’
입술을 꾸욱 깨문 박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워낙 산세가 깊은 곳이었기에, 타고 온 차량도 버린 지 오래였다.
통신 추적의 위험이 있는 휴대폰도 마찬가지.
가는 길에서 주운 나무 막대기에만 의존한 채, 박건우가 걷고 또 걸었다.
조금씩 날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봤을 때, 시간도 이미 상당히 지난 듯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조금씩 낯익은 길이 눈에 띄자, 박건우의 표정도 조금씩 환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별장이 보이기 시작하자, 발걸음 또한 빨라졌다.
“다 왔……!”
“이제 왔어?”
순간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박건우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수십 명의 사람들 가장 선두에 있는 인물을 발견한 박건우가 두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뭐, 사이비 회장 놈이 어떻게 도망가는지, 봤던 게 있어서 도움이 되었지.”
선두의 인물, 도윤이 한 발 나서며 피식 미소 지었다.
“너, 이 개새끼!”
이윽고 정신을 차린 박건우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도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박건우를 가만히 바라보던 도윤도 천천히 마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 지긋지긋한 우리 악연, 여기서 끝을 내자.”
“개자식아!!!!!!!!!!!!”
코앞까지 도착한 박건우가 괴성과 함께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덥석!
뻗어 오는 주먹을 어깨 위로 흘린 도윤이 그대로 손목을 움켜쥐며, 박건우를 등졌다.
“어, 어……?”
박건우가 당혹성을 터트릴 때.
휘익!
도윤의 엎어치기에, 그대로 공중에서 몸이 한 바퀴 돈 박건우가 바닥에 충격한다.
쿵!
“컥!”
이윽고, 묵직한 충격음이 깊은 산속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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