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만나고 싶습니다
정승만의 말에 공차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사람이 맞다? 지금 후보자 스스로 검찰 내 라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겁니까?!”
흥분한 공차돌이 정승만을 향해 호통쳤다.
그런 공차돌을 향해, 정승만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라인 따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상사로서 능력 있는 인재를 자기 아래에 두고 싶어하는 마음은, 어느 조직을 가든 누구나 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궤변이요! 그 따위 말은, 변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 공 위원님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라인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뭐요?”
공차돌이 황당하단 표정으로 반문했다.
“개개의 능력과 상관없이, 소위 ‘백’이라 불리는 인맥을 이용해 인사상 특혜를 누리는 유기적인 집합체. 그걸 우리는 통상 라인이라 부릅니다.”
“…….”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백이 되어 주고, 아랫사람의 집안을 통해 또 다른 이익을 얻어 내죠. 혹은, 3연이라 불리는 혈연이나 지연, 학연으로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하기도 하고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후보자?”
가만히 듣고 있던 공차돌이 물었다.
그런 공차돌을 향해, 정승만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런 인맥 위주의 인사와 라인을 타파하기 위해, 상관으로서 부하 직원을 오로지 능력만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후보자가 봤을 때 강도윤 검사가 그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다, 이 말씀입니까? 수십 년의 검찰 경력조차 뒤집어엎을 수 있을 정도로? 정말로, 그에게 아무런 사적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다고 확신합니까?”
“물론입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정승만의 대답에, 공차돌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고요한 눈빛으로 공차돌을 바라보던 정승만이 말을 잇는다.
“검찰 출신인 공 위원님도 아시겠지만… 한때 저희 검찰은, 학연 문제가 어느 조직보다 심했습니다. 서울 3대 대학 출신이 아니면, 검사장 이상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요.”
“그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한다는 듯,공차돌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야 검찰에서 그런 사실이 없다며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통계적인 수치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검사장 이상 승진 대상자 10명 중 9명이 3대 대학 출신이었으니,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혹시, 강도윤 검사의 학벌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말씀하시는 걸 보니, 후보자가 말씀하시고 있는 3대 대학 출신은 아니…….”
“고졸입니다.”
“……!”
중간에 말을 끊긴 공차돌이 눈을 크게 떴다.
말이 고졸 출신 검사지, 실제 그런 인물들은 100명 중에 1명도 찾기 힘들었다.
학창 시절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고 초일류 대학에 진학한, 날고 기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제치고 사시를 패스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사시를 패스했다 치더라도, 거기서 상위권 성적을 얻어 검사가 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오죽하면 그런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언론사에서 눈에 불을 키면서 보도를 하겠는가.
그리고 이런 인물들은 대대로, 대부분 모 아니면 도였다.
두터운 인맥이라는 벽에 좌절하고 결국 도태되어 지방만 전전하다가 퇴직 수순을 밟거나.
그게 아니면, 훗날 검찰총장조차 함부로 하지 못할 커다란 인물이 되거나.
“저와 같은 서울 출신도 아니지요. 평생을 부산 시장통에서 살다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서울에 처음 상경했으니까요.”
“…….”
“한마디로, 지방 촌놈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머지 혈연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고, 집안은 더더욱. 제 부모까지 일찍 여의어 어린 시절부터 홀로 동생을 돌보며 가장 노릇을 하던 아이니까요.”
“그런…….”
마음이 약한 유일한 여자 위원이 살포시 제 입을 가렸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전혀 티조차 내지 않고 묵묵히 제 일을 처리하는 아이. 외부의 눈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 소신대로 완벽히 임무를 완수해 내는 아이. 그런 아이가 부하 직원으로 들어왔는데, 어느 상관이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
“저는 강도윤 검사의 상관인 것을 떠나,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그의 열렬한 팬입니다.”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공차돌을 보며 정승만이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을 잇는다.
“강도윤 검사는 제 사람이 맞습니다. 아니…….”
잠시 말끝을 흐리던 정승만이 마지막 말을 마친다.
“언제나 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요.”
* * *
정승만에 대한 인사 청문회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소 행실이 워낙 깨끗했던 인물이라, 야당 쪽에서도 집중적으로 추궁할 건수가 없었다.
낙하산 인사가 아닌, 차근차근 직위를 거쳐 올라온 단독 후보였고, 검찰 내 평판도 상당히 좋은 인물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내 사람이라…….”
홀로 차를 운전해 가던 도윤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청문회에서 정승만 지검장이 했던 말이 이상할 정도로 머릿속에 맴돌았다.
‘소신…….’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이내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느새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유명한 고급 레스토랑.
내부 인테리어를 서양풍으로 세련되게 꾸며 놓아, 젊은층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차량에서 내려 서며 작게 중얼거린 도윤이 이내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여기요!”
도윤이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
조용히 시선을 돌린 도윤이 이내 그곳으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테이블에 자리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사이에 오똑하게 솟은 콧날이 묘하게 조화를 이뤄,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들 외모의 소유자.
평소와 달리 옅은 화장에, 원피스 위로 연분홍색 가디건을 입고 있는 박보윤이 그곳에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보윤이 생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도윤이 제 머리를 긁적였다.
“검사님이 더 일찍 오신 것 같습니다.”
도윤의 대답에 보윤이 잠시 멈칫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보윤이 말한다.
“일단 앉아요.”
“…….”
멀뚱히 서 있던 도윤이 자리에 앉자, 보윤이 곧바로 묻는다.
“그런데, 혹시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여덟입니다만…….”
“뭐야,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네?”
보윤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서른 살은 된 줄 알았잖아요. 고생을 조금 많이 하셨나 봐요?”
“잘생긴 사람들이 노안이 많다고들 하죠.”
도윤의 대답에 순간 보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와는 이미지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보윤이 묻는다.
“…이게 원래 모습?”
“저는 언제나 한결같습니다만…….”
“…….”
“그런데, 박 검사님이야말로 저랑 한 살 차이라면, 스물아홉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제가 한 살 어리다는 얘기였는데요?”
보윤의 대답에 이번에는 도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엄밀히 말하면 보윤은 도윤의 검찰 선배가 아닌가?
최연소까지는 아니지만, 자신도 상당히 빨리 사시를 패스한 케이스인데, 보윤은 그보다 더 빠르단다.
‘혹시 국내 최연소 사시 패스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게 박보윤 검사라던가…….’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도윤을 보며, 보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그 표정은. 나도 노안이다, 이 말이에요? 지금 복수하는 거죠?”
“전혀 아닙니다.”
상념에서 벗어난 도윤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속 좁게 이러면 안 될 텐데…….”
보윤이 척 하니 팔짱을 끼며 말끝을 흐렸다.
“아, 일전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말만요?”
“뭐든지 시키시죠. 제가 다 사겠습니다.”
“물론, 2차도 포함이겠죠?”
“…….”
“뭐야? 설마, 밥만 사고 퉁 치려고 했어요?”
침묵을 지키는 도윤을 보며, 보윤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게 아니면, 나랑 술 마시기 싫은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그쪽이 몰라서 그렇지, 나 인기 엄청 많거든요? 지금 당장 일렬로 줄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이대로라면 계속 끌려만 다닐 거라 생각한 도윤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예쁘시니까, 굳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냥 조금 당황해서…….”
“…….”
이번에는 보윤이 입을 다물었다.
묘하게 표정이 변한 보윤이 되묻는다.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요?”
“예?”
“영 숙맥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선수라던가?”
“…….”
“뭐, 아무렴 어때요. 그보다, 내 부탁 들어주기로 한 것, 잊지 않았죠?”
“말씀하시죠. 제 능력 범위 내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도윤의 대답에 보윤이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보윤이 말한다.
“그럼… 우리, 친구해요.”
“예?”
“친구 하자구요. 싫어요?”
“…그게 부탁입니까?”
도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런 도윤을 향해, 보윤이 씨익 미소 지었다.
“너무 어려운 부탁인가요?”
“…….”
“현재 검사들 전체를 통틀어, 국민들의 인기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사람. 앞으로 그 인기가 더욱 더 커질 인물과 친구가 되는 것인데, 내가 너무 날로 먹으려고 했나요?”
도윤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언론을 통해 도윤에 대한 얘기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도윤은 국민들의 많은 인기와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잘생긴 외모에 명석한 두뇌, 고졸 출신 신임 검사라는 특수성은, 스타 검사로 발돋움할 수 있는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얼마 전 있었던 자유당과 명성 그룹의 대국민 사기극.
그 기자회견의 생중계 방송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며, 도윤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딱히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만…….”
도윤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일단은, 나이는 제가 한 살 많습니다만…….”
“뭐야? 그래서, 오빠 소리라도 듣고 싶다, 이 말이에요?”
“…….”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도윤을 보며, 보윤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해요. 아니, 못해. 사회에서 한 살 차이 정도는 친구해도 상관없잖아요?!”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보윤이 발끈하고 있을 때, 주문한 음식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일단 음식부터 들죠.”
“꿈도 꾸지 마요. 오빠라고 부를 생각은 죽어도 없으니까.”
“…….”
도윤이 입을 다물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말없이 음식만 먹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막 나갔나?’
보윤의 속에서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고개를 치켜들 무렵.
침묵을 지키던 도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도윤의 말에, 보윤이 반색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연이어 이런 부탁하는 것… 염치없다는 건 잘 알지만,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보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부탁. 검사가 아닌 친구로서 하는 것이라면, 들어 드릴게요.”
“…….”
한참이나 아무런 대답이 없는 도윤을 보며, 보윤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얘기해 보세요.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친구가 된 기념으로 들어 드릴 테니까.”
이어지는 보윤의 말에 도윤이 잠시 머뭇거렸다.
사실 이 얘기를 꺼내기까지, 수도 없이 많은 고민을 했다.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라지만, 그 때문에 주변 사람이 곤란한 상황에 처해지는 것을 도윤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개인의 복수나 목적 때문이 아닌,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마침내 도윤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총리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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