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추악의 끝
서울중앙지검 2층 복도.
206호 검사실 앞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박보윤이 지금 막 그곳을 나오는 커다란 키의 사내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김재욱!”
“…응?”
순간 멈칫한 사내가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누구야?”
활짝 미소 지은 사내가 보윤의 앞으로 걸어갔다.
하얗다 못해 일견 창백해 보이는 피부를 가진 사내.
보윤과 같은 서울중앙지검 소속 검사, 김재욱이었다.
“설마, 나 기다린 거야?”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보윤을 보며, 김재욱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맙소사, 정말인가 보네? 내가 보고 싶었으면 그냥 들어오지 그랬어?”
“또 까분다.”
보윤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모습도 너무나 매력적. 마치고 일정 있어? 없으면 저한테 시간 좀 내주시죠. 분위기 좋은 술집에서…….”
“미안한데, 선약이 있거든.”
“…선약?”
김재욱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됐고, 내 용건부터 말할게.”
가볍게 손사래 친 보윤이 묻는다.
“너, 최근에 집에 간 적 있어?”
평소와 다른 보윤의 모습에 잠시 멈칫한 김재욱이 대답한다.
“최근에…? 아니, 없는데.”
“아저씨는? 만난 적 없어?”
“…전혀. 새로운 당의 대표가 되시고, 한창 바쁘실 때니까.”
김재욱이 유독 ‘새로운 당의 대표’라는 말을 강조하며 대답했다.
한차례 낮게 한숨을 내쉰 박보윤이 말한다.
“당에서 쫓겨나신 게 아니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김재욱의 표정이 싸악 하고 굳었다.
“너도 알잖아? TV만 틀면 온통 명성그룹과 그 얘기뿐인데, 모를 수가…….”
“그러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고.”
보윤의 말을 끊고 김재욱이 씹어 내뱉듯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언제나 당당한 보윤도 잠시 움찔했다.
분명 도가 넘은 언행이고, 주제넘은 일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냥 모른 척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집안으로 이어진 관계라지만, 어린 시절부터 눈앞에 있는 김재욱의 아버지는 자신을 무척이나 예뻐해줬다.
설령 그게 본심이 아닐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최소한, 그가 눈앞에서 보여준 행동들만큼은 모두 진심이었으니까.
보윤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 정말로 아저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뭐?”
“원내대표가 당론에 대해 전혀 모른다니, 말이 안 되잖아?”
콰앙!
김재욱이 주먹으로 바로 옆에 있던 출입문을 거세게 두들겼다.
“뭐, 뭐야?”
안쪽에 있던 실무관이 깜짝 놀라, 소리치는 목소리가 문 바깥쪽까지 들려왔다.
“박보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고! 우리 아버지가 이번 일의 주모자 중 한 명이다, 뭐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최소한, 아무런 연관도 없지는 않겠지.”
“너 이……!”
분노로 몸을 떨어대던 김재욱이 박보윤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를 앙다문 채, 그러고 있기를 잠시.
김재욱이 마침내 팩 하고 몸을 돌렸다.
“…오늘은 너랑 대화할 기분이 전혀 아닌 것 같다. 다음에 하자.”
감정이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낮게 읊조린 김재욱이 이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보윤의 말에 잠시 멈칫한 김재욱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만약에 아저씨가, 정말로 이번 일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면! 그때 너는 어쩔 생각이야?”
김재욱의 뒤통수에 대고, 보윤이 소리쳤다.
김재욱이 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절대로. 그런 일 따위는 없어. 당에서 쫓겨났다고? 천만에! 우리 아버지는, 옳지 못한 당의 행태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나오셨을 뿐이니까.”
“그건…….”
“그만!”
짧게 소리친 김재욱이 모퉁이를 돌아, 그대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보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지 않았다.
저런 반응이라면,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김재욱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곤란해…….’
속으로 중얼거린 보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제 저녁에 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맙소사… 정말로 그 사람이라면, 당 전체가…….”
보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날아가버릴 판이잖아요! 기존의 제1야당이 두 개로 나눠지고, 제2야당은 풍비박산 나버린 지금, 명실상부 한우리당이 제2야당이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구요!”
“…….”
“그런 상황에서, 가뜩이나 여론이 좋지 않은 야당. 그것도 한우리당의 수장이 그 일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면…….”
“사실상 한우리당은 해체 수순을 밟아야겠지. 네 말대로.”
“…….”
박보군의 말에 보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잠자코 지켜만 보고 있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분명한 장점도 있습니다.”
“장점?”
“이번 사건이 벌어진 이후, 2개로 분리된 신자유당과 한우리당의 집안싸움은 아직도 진행 중이지 않습니까?”
“최근에 조금 조용해졌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일시적인 휴전 상태일 뿐이지.”
박보군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경우는 으레 있는 집안싸움과는 분명히 궤를 달리했다.
대놓고 국민들을 기만한 증거들이 명명백백히 세상에 드러났고, 그 사건에 특정 정당이 깊숙이 개입한 사실 또한 분명했다.
국민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현 상황에서, 책임 소재를 확실히 밝혀내야 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이 싸움은 계속될 터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야당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조금씩 약해져갈 테고 말이다.
“한우리당의 대표, 김문성 의원.”
“……!”
“그리고, 신자유당의 박태산 대표.”
도윤이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박보군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을 잇는다.
“잘만 풀리면 이 지긋지긋한 집안싸움. 저희가 끝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
벌컥.
“아버지!”
거침없는 걸음으로 목적지에 도착한 김재욱이 눈앞에 있는 출입문을 있는 힘껏 열며 외쳤다.
김재욱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책상에 앉아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김재욱의 아버지, 한우리당 대표인 김문성 의원이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재욱이?”
김문성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무슨 일이냐? 기별도 없던 놈이,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는…….”
김문성의 어투에는 노크조차 하지 않고 들이닥친 김재욱을 다분히 책망하는 표시가 역력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재욱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묻는다.
“이번 명성사건. 주도자가 아버지입니까?”
“……!”
김문성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대체 누구한테 무슨 얘기를 들은 거냐?”
김문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지 않습니까? 만약 주도자가 아버지가 아니라도, 자유당의 원내대표였던 아버지는 그 내막을 당연히 잘 알고 계시겠지요.”
“너…….”
“진실을 알려주십시오. 아버지의 자식인 저도 충분히 그에 대해 알 권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
김재욱의 말에 김문성이 입을 다물었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문성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진실이 알고 싶다고?”
“예.”
김재욱이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게 진실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거창한 일이더냐?”
“예? 그게 무슨…….”
“과거부터 으레 있어왔던 정치 싸움 아니더냐? 온갖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이쪽 바닥의 습성이야,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아버지! 이번 건은 경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김재욱이 놀라 소리쳤다.
“경우가 달라? 대체 무어가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
“…….”
김재욱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앞에서는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돌아서면 등 뒤에 칼을 꽂아 넣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 정도야, 어린애 장난 수준이지.”
“어린애 장난이라구요? 집권 여당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갈 뻔한 대국민 사기극이, 어린애 장난이라고 하신 겁니까!?”
김재욱이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게 아니면?”
“예?”
“무슨 수를 써서든 상대 정당의 힘을 약화시켜, 우리 당이 발의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게 정치다. 저 따위 빨갱이 정당이 집권 여당이랍시고 우쭐대고 있는 게 정치가 아니고 말이다.”
“국민들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게! 살 만한 세상, 사람 냄새 나는 세상을 만드는 게 정치인의 일 아닙니까! 그게 정치고요!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따위 것은, 그저 애들 싸움일 뿐입니다!”
김재욱이 자리에 앉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재차 소리쳤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이러는 것이다.”
“뭐라구요?”
“과정이 없으면 결과 또한 없다 이 말이다. 상대 당과의 전쟁 없이, 피조차 흘리지 않고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김문성이 씹어 내뱉듯 계속 말을 잇는다.
“살 만한 세상이라고? 그래. 그 살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쉬지 않고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대가리에 든 것도 없이, 사사건건 훼방만 놓는 빨갱이 정당은 저 멀리 치워버리고 말이다.”
“아버지!”
김재욱이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럼 네가 한번 말해보거라! 대체 어떻게 하면 상대 당과의 싸움 없이, 법안을 통과시켜 네가 말한 사람 냄새 나는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말이다!”
“…정말 많이 변하셨군요, 아버지.”
“변해? 내가?”
김재욱의 말에 김문성이 진실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변한 건 바로 너다. 빨갱이 놈 밑에서 몇 년 구르더니, 너도 그것에 물든 것이냐?”
“대체 그건 무슨 소리세요!?”
“서울지검장, 아니, 이제 그 대단한 검찰총장이 되실 정승만이. 그리고 그 똘마니.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설쳐대는 강도윤이라는 애송이 검사 놈.”
김문성의 입에서 의외의 인물이 거론되자, 김재욱이 한차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놈들이 하는 작태를 보거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게 할 수나 있는 짓거리냐? 뼛속까지 좌경 의식화된 앞잡이 놈들이…….”
“아버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김재욱이 입술을 앙 하고 다물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너 이놈! 아비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버르장머리 없이 뭐하는 짓거리냐!?”
“버르장머리 없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조용히 반문한 김재욱이 자세를 바로 하며 또박또박 말을 잇는다.
“지금 제가 아버지께 하는 행동이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라면… 그냥 버르장머리 없이, 앞으로도 후레자식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너 이 새끼…!”
흥분한 김문성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유리 재떨이를 그대로 집어 들었다.
“다시 앉아라! 내 말 아직 안 끝났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이 호로 새끼가!!!!”
출입문을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김재욱을 보며, 마침내 폭발한 김문성이 손에 쥔 재떨이를 그대로 집어 던졌다.
휘익.
퍼어어억!
재떨이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연이어 무언가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끄으으으…….”
그대로 머리에 재떨이를 직격당한 김재욱이 신음하기를 잠시.
분을 참지 못한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놀라, 몸을 잘게 떨고 있던 김문성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재욱아!!!!”
이윽고, 김문성의 목소리가 방 내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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