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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143화 (143/174)

143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거래라…….”

널찍한 방에, 이제는 홀로 남게 된 박성준이 작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들을 들었음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박성준은 지금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강도윤…….’

이제 고작 몇 년 차 되지 않은 신임 검사라고 들었다.

검찰경력이 그리 길지 않은 자신의 딸보다도 더.

커리어를 떠나, 나이만 봐도 기껏해야 제 자식뻘밖에 되지 않는 아이다.

그런 새파랗게 젊은 아이와 거래를 했다.

그것도,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조국일보를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말이다.

펜대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은 검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자들 또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어느 누가 감히 신문사 회장을 눈앞에 두고, 그따위 건방진 소리를 지껄일 수 있겠는가?

군부독재 시절도 아니고, 설령 대통령이라도 저런 식으로는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고작해야 자식뻘밖에 되지 않는 신임 검사가 그 말을 내뱉었다.

분명 기분 나빠야 정상이건만, 문제는 도윤의 그런 모습이 박성준에게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닮았어. 그것도 꽤나 많이.’

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린 박성준이 쓰게 미소 지었다.

젊은 시절의 그 사람도 그랬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패기 있고, 당당했다.

자신이 관철한 소신은 절대 굽히지 않았고, 아니다 싶은 일은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받았다.

추후에 돌아올 불이익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말이다.

집안조차 변변치 않은 여인.

셋이나 되는 동생들을 홀로 책임지면서도, 제 소신을 다하는 그 모습이 박성준은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느꼈다.

한때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얼굴.

무언가를 떠올리듯,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박성준이 이내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관악산 중턱에 위치한 절.

평일 오전이라 눈에 보이는 인원 자체가 많지 않았는데, 조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간간히 산새 지저귀는 소리만 울려 퍼지는 자그마한 절.

입구에는, 주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장정 몇몇이 눈에 띄지 않게 배회하고 있었다.

절 내부, 부처님 석상 앞.

등산복 차림에, 모자를 깊게 눌러쓴 두 사내가 방석에 꿇어앉아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한쪽은 중년, 다른 한쪽은 노년의 사내들이었기에 얼핏 부자지간으로도 보였다.

누가 보면 마치, 지나가던 등산객 부자가 제를 지내는 듯한 평범한 모습이었기에 큰 위화감은 없었다.

문제는, 사내들의 면면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일이 생겼다 들었네.”

우측에 앉아 있던 노인이 불상을 향해 허리를 숙인 채 말했다.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좌측 중년 사내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노인이 말끝을 흐렸다.

“뭐, 자네니까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한 가지만 잊지 말아 주게. 자네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내가 자네에게 쏟아부은 노고를.”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음 쓰실 일은 아니라, 굳이 말씀드리지 않은 것뿐입니다.”

“…이번 일로 회사가 많이 힘들어졌네.”

“…….”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중년 사내가 멈칫했다.

천천히,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리는 노인.

깊게 눌러쓴 벙거지 모자 아래,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로 노인의 얼굴이 마침내 드러났다.

얼굴에서 고집스러움이 확연히 묻어나는, 명성그룹의 수장.

오춘화 회장이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리는 중년 사내의 정체도 가히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정계의 거물이자, 제2 야당의 대표 김문성.

한창 바쁠 그가 이름 없는 절에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한 분야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두 인물이, 서로 아는 사이였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민감한 시기에 직접 만나는 위험부담까지 감수하고 있었다.

김문성 대표가 오춘화 회장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조국일보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습니다. 제 선에서 충분히 해결할 겁니다.”

“믿네. 능력이라면 차고 넘치는 자네 아닌가? 더군다나, 다름 아닌 제 자식의 일인데, 더 말할 것도 없지.”

오춘화 회장이 괘념치 말라는 표정으로 손사래 쳤지만, 김문성은 말없이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는 이상, 스폰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이럴 때만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마치 윗사람에게 질책당하는 듯한 모양새 아닌가?

차기 대권까지 노리는 김문성으로서는 그게 못내 화가 났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수야 없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우군(友軍)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으니까.

“내가 부탁한 건, 알아봤나?”

오춘화 회장의 조용한 물음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김문성이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강도윤인가 하는,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애송이 검사 놈 말입니까?”

“그래. 이번 일만 봐도 알겠지만, 가만히 놔두면 언젠가는 크게 초를 칠 놈이야. 이제 자네도 알고 있겠지?”

“…….”

김문성이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자신도 눈과 귀가 있다.

사기극의 진실이 전 국민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 김문성 또한 스크린을 통해 똑똑히 기자회견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부끄럽고 치가 떨리던 순간이던가.

그때의 감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고작 한 놈.

그것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 애송이 검사에게 놀아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 자신이 느낀 허탈감과 분노는, 일반 사람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검찰 내 고위간부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으면 내가 직접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아시다시피, 바로 위 지검장부터 검찰총장까지, 모두 그 애송이 놈 편이네.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

“정계에서 압력을 넣는 것도 쉽지 않겠지. 지금 야당은,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이 없으니까. 애송이 검사 놈 하나 처리하는 데 그치들이 직접 나서는 것도 자존심 상할 테고…….”

“아니요. 이런 일은, 보다 확실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겠지요.”

조용히 고개를 저은 김문성이 대답했다.

“…방법이 있나?”

“말씀하셨다시피, 현재의 검찰에 저희가 영향력을 행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여론마저 저희에게 등을 돌렸으니까요.”

“그 말은…….”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방법이 없지 않다?”

오춘화 회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놈이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결론적으로 이번 일로, 저희 야당끼리 집안 똥물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걸, 그대로 돌려줄 생각입니다.”

“그대로 돌려준다니…….”

오춘화 회장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이 경우에는 완전한 집안 내부 싸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불만 붙여 놓으면 여느 집단들보다 더욱 격렬한 싸움을 만들어 낼 수 있지요.”

“속 시원하게 얘기해 보게. 머리까지 노화가 되어서 그런지, 늙은 내 머리로는 아직 이해가 가지 않으니까.”

오춘화 회장이 답답한지, 벙거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런 오춘화 회장을 향해, 김문성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대선 때만 되면, 후보자들이 항상 손에 쥐고 나오는 공약 카드가 있지 않습니까?”

“검찰과 관련된 대선 공약이라…….”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오춘화 회장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수사권 조정을 말하는 건가?”

순간 김문성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지요. 공수처 설치니 하는 것은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고, 수사권 조정이 논의될 때면 항상 두 집단의 싸움으로 1라운드가 시작되곤 했으니까요.”

“싸움에… 경찰을 끌어들이겠다는 건가?”

“손에 쥐고 있는 권한을 떠나, 단순 머릿수와 정보양만 놓고 봤을 때, 검찰은 절대 경찰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야 그렇지만…….”

오춘화 회장이 회의적인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김문성은 오춘화 회장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까 말한 대로, 기본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차이 나는 두 집단이다.

그런 권한을 하나라도 더 빼앗아 오려는 경찰과,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권한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검찰의 싸움.

‘수사 지휘권’과 ‘영장 독점 청구권’이라는 막강한 두 권한을 검찰에서 쥐고 있는 이상,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정치인들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검찰의 힘을 견제를 통해 약화시키려 하는 것이고 말이다.

견제 없는 권력은, 언제가 되었든 결국에는 썩기 마련이니까.

“저희가 보이지 않는 뒤에서 경찰을 적당히 서포트해 주고, 불만 붙여 놓으면 됩니다. 그거면, 나머지는 저들이 스스로 치고받기 시작할 겁니다.”

“…….”

“엘리트 의식에 찌들 대로 찌들어 있는 검사들. 이제 갓 검찰이라는 조직에 입문한 신임 검사는 말할 것도 없지요. 경찰이라는 조직의 습성을 모르는 이상, 정신없이 당하다 제풀에 지쳐, 녹다운 될 겁니다.”

“어떻게 말인가?”

김문성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오춘화 회장이 반문했다.

김문성이 한층 짙어진 미소로 대답한다.

“간단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리가 당했던 것처럼, 저들도 저들이 쓰는 방식으로 당하도록 만들어야지요.”

“그 말은…….”

“수사권 조정 얘기가 나올 때마다, 검찰에서 쓰는 방식이 무엇인지, 회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군…….”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오춘화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캐비넷에 고이 모셔 두었던 경찰들의 비리나 내사 사건들. 시기만 되면 그걸 일시에 터뜨리곤 하지요. 모 서장이 업주에게 돈을 받았다느니, 불법 수사를 의뢰했다느니… 시간차를 두고 그런 사건들을 하나씩, 터뜨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런 내용을 덧붙이죠.”

손가락을 하나 펼쳐 보인 김문성이 말을 잇는다.

“이런 비리경찰. 수사 종사자로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이런 경찰들이기에, 수사권 조정은 아직 시기상조다. 저들이 저지른 일들은, 아무도 모르는 깊숙한 곳에 숨겨 두고 말이지요.”

“…….”

“수사종결권마저 검찰이 독점적으로 쥐고 있는 현재의 법체계에서, 경찰은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질 높은 정보의 부족. 한 번씩 터져 나오는 검찰의 비리 사건이 모두 외부가 아닌, 내부고발이나 다른 특정 루트로 드러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

“그럼 여기서 하나.”

자리에서 일어난 김문성이 오춘화 회장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논란이 된 비리경찰을, 경찰청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

말을 잇는 김문성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직위해제. 정식으로 옷을 벗기는 건, 나중에 드러나는 수사경과를 보고 차차 진행하면 되는 것이고, 일단은 대기발령부터 내고 보는 거지요.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에, 전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경찰 또한 수사권 조정에 사활을 걸고 있으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낮은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는 김문성의 미소가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생겼을 때, 과연 검찰은 다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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