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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146화 (146/174)

146화 황석호 청장

20평은 됨직한 넓은 방.

테이블 위에는 갖가지 안주와 양주들이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얼핏 봐도 푹신해 보이는 고급소파가 빙 둘러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막 방으로 들어선 중년 사내가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는 김문성 대표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이고, 대표님. 하하하하하.”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옆으로 올려붙인 중년의 사내가 반가운 미소로 김문성 대표의 손을 맞잡았다.

“청장님은 날이 갈수록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요.”

김문성 대표가 청장이라 칭하는 중년 사내.

현 경찰청장인, 황석호 치안총감이었다.

경찰청장의 임기는 고작 2년.

그리고, 황석호는 이제 2년 차 마지막 퇴임을 남겨 두고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으레 누구나 그렇듯, 이맘때의 고위 공직자들은 공통된 한곳으로 눈을 돌리곤 했다.

“이거, 제가 드릴 말씀을 대표님이 하시는군요. 부끄럽습니다.”

김문성 대표가 옅게 미소 지었다.

“초저녁인데, 밥 대신이라 하긴 뭐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르다 마다요! 밥보다 더 좋은 것들이 천지에 깔려 있는데…….”

“일단 앉으시지요.”

김문성 대표가 한층 짙어진 미소로 자리를 권했다.

황석호가 자리에 앉자, 김문성 대표가 곧바로 화두를 던졌다.

“요즘, 고민 많으시지요? 이제 청장님도 퇴임이 몇 달도 채 남지 않았으니…….”

“안 그래도, 벌써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다 큰 자식 놈들은 겨우 대학교 졸업시켜놨더니, 대학원을 가겠다고 생떼를 쓰지를 않나… 돈 들어갈 곳은 많은데, 직장은 잃게 생겼으니, 원.”

“그러시겠지요.”

“이참에 고향으로 내려가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만, 이래저래 걸리는 게 많습니다.”

황석호의 말에 김문성 대표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청장님 같은 인재가, 벌써부터 초야에 묻힐 생각을 하시다니요? 제가 삼고초려(三顧草廬)라도 미리 준비해야겠습니다.”

황석호가 과장된 몸짓으로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대표님 제안인데 삼고초려는요. 일고면 충분합니다. 하하하하하하!”

“그래요…….”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김문성 대표가 본론을 꺼내기 시작한다.

“혹시, 퇴임 이후 하시고 싶은 일이 따로 있으십니까?”

김문성 대표의 물음에 황석호가 잠시 멈칫했다.

조심스레 분위기를 살피던 황석호가 이내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한다.

“마음 같아서는… 고향으로 돌아가, 지역 주민들을 위해 또 한 번 이 한 몸 불사르고 싶지만, 어르신들이 저를 믿어 주실지…….”

김문성 대표는 황석호가 하는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황석호 청장의 고향은 구미.

자유당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그곳에서, 황석호는 시장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고 말이다.

물론, 그를 위한 공천은 필수였다.

“여의도는 어떠십니까?”

“…예?”

“벌써 고향으로 돌아가시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 아니십니까? 여의도에서 조금 정치 맛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김문성 대표의 물음에 황석호가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김문성 대표가 그대로 벨을 누르려 하자, 황석호가 이를 급히 제지했다.

“잠깐, 잠깐만요, 대표님.”

“……?”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황석호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물었다.

정치에서 대가 없는 약속 따위는 절대 없다.

이렇게 어중간하게 넘어가면, 추후에 어떤 것을 요구할지 모른다.

이런 종류의 것들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황석호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황석호의 두 눈을 마주 바라보던 김문성 대표가 입을 열었다.

“…제1야당이 둘로 쪼개진 지금, 공천만 가지고는 당선이 확실치 않다는 것, 청장님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시겠지요?”

“대충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저희도 이전과 달리 인재를 가려 영입하고 있습니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개개인의 면면을 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지요.”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황석호를 보며, 김문성 대표가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 너무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청장님의 희망지는 구미가 아닙니까? 영남은, 전통적으로 저희가 강세를 보이던 곳이었습니다. 국민들 앞에서 똥이라도 싸지 않는 이상, 이변은 없지요.”

“그 말씀은…….”

“청장님도 충분히 비벼 볼 만하다는 겁니다. 아니, 계획만 성공하면, 당선은 100퍼센트 확실하겠지요.”

김문성 대표가 말을 마치자,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황석호가 묻는다.

“그 계획이라는 게… 뭐지요?”

김문성 대표가 씨익 미소 지었다.

“뭐, 계획이라는 단어를 쓸 만한 거창한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그렇듯, 임기 막바지에 몸값을 올리기 위해선 다른 무엇보다 눈에 보일 만한 커리어를 만들어 둬야 되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황석호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0만 경찰의 수장이라는 자리에서, 국민들의 뇌리에 또렷이 각인될 만한, 그 정도 임팩트를 가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음…….”

또다시 생각에 잠겨 있던 황석호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제 우둔한 머리로는, 금방 생각이 나지 않습니…….”

“수사권 조정.”

“……!”

순간 황석호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수, 수사권 조정이라니…….”

“물론, 완전히 통과되는 건 쉽지 않겠지요. 지난 세월 동안, 저 막강한 힘을 가진 검찰에서 철통같이 사수한 수사권을, 한순간에 쉽게 빼앗기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럼 어떻게…….”

김문성 대표가 눈을 빛내며 말한다.

“보여만 주면 됩니다.”

“보여만 준다?”

“경찰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살아 있다는 것을, 국민들과 검찰에 보여 주면 됩니다. 물론, 그것을 위해 눈에 보이는 성과를 하나쯤은 만들어 내야겠지요. 저 프라이드 높은 검찰의 진지한 약속을 받아 낸다든지…….”

“음…….”

턱을 괴며 침음을 삼키는 황석호를 보며, 김문성 대표가 말을 잇는다.

“여론만 얻으면, 그 이후에는 일사천리. 더불어, 10만 경찰들도 모두 청장님의 편에 서는 겁니다. 수사권 조정은 모든 경찰들의 꿈이 아닙니까? 그 꿈을 이뤄줄 사람이 국회로 입성하는 건데, 어느 누가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황석호를 보며, 김문성 대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황석호는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군 장성이든, 경찰 고위간부든, 권력이 살아 있을 때야, 아랫사람들이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행동하지만, 퇴직과 동시에 옆집 아저씨보다 못한 취급을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미 권력의 달콤한 맛을 볼 대로 본 그 사람들은, 그것을 못내 견디기 힘들어했다.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고위 공직자들이 퇴임 이후 정계로 눈을 돌리는 것에 이러한 사실도 분명 큰 영향을 미쳤다.

김문성 대표가 고민에 빠져 있는 황석호를 보며 쐐기를 박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번 일만 잘 풀리면…….”

“……?”

“공천은 물론, 의원으로 당선이 되셨을 때 당 대표 차원에서, 훗날 구미시장 출마 지원까지, 확실히 약속드리겠습니다.”

“……!”

황석호가 또 한 번 눈을 크게 떴다.

잠시 후.

자세를 바로 한 황석호가 이내 입을 열었다.

“…자세한 계획은 추후에 따로 말씀해 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그 말씀은…….”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표님”

황석호의 대답에 김문성 대표가 씨익 미소 지었다.

곧이어, 테이블 한켠에 마련된 새빨간 벨을 누르자, 홀복을 입은 젊은 여성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즐기시지요.”

즐거운 얼굴로 중얼거리는 김문성 대표의 목소리가 방 내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강 검사님!”

눈앞에 자리한 호식의 사무실 출입문을 벌컥 열어젖힌 배영준이 크게 소리쳤다.

마침 박성준 회장과의 만남을 마치고, 이곳으로 돌아온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배 기자님?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급하게 뛰어오세요?”

“숨 넘어가겠다, 형.”

도윤의 말을 호식이 받았다.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던 배영준이 더듬더듬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 그게… 전화로는… 조금 하기 힘든 얘기라…….”

호식이 차가운 물을 한 잔 받아 건네주자, 그대로 받아 든 배영준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푸하!”

기묘한 소리를 내는 배영준을 보며, 호식이 묻는다.

“이제 차근차근 얘기해 봐. 형이 그러니까, 내가 다 궁금하네.”

“강 검사님.”

배영준이 굳은 얼굴로 도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

“김재욱 검사 건, 확인해 보셨습니까?”

“…그에 대한 소득을 물어보시는 거라면, 분명히 있었습니다만…….”

잠시 박성준 회장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던 도윤이 대답했다.

그런 도윤을 바라보며, 배영준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2차적인 문제 말고요.”

“그게 무슨 말씀…….”

“사고 이후, 김재욱 검사가 응급실을 거쳐 최종적으로 후송된 병원. 어디인지 아십니까?”

“형, 그게 뭐가 중요해? 어차피, 기자들은 병원에 출입도 못 하는 상황이라며?”

호식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중요해. 그 병원이 다름 아닌…….”

배영준이 도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비단병원이니까.”

“……!”

“……!”

이어지는 배영준의 대답에 호식과 도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디라고”

“어디라구요?”

“비단병원 말입니다. 호식이 회사에서 관리하고, 강 검사님이 주인인 그 비단!”

도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수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황금열쇠를 집 앞마당에 두고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도윤은 지금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랬구나.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인데… 명성그룹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상황에서, 아직 명성의 끄나풀이 제법 남아 있는 비단.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어.”

호식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사실, 세 사람만 모르고 있었지, 기자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기자들이야 다른 무엇보다 김재욱의 상태를 먼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김재욱이 입원한 최종 병실쯤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문제는, 현장에는 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던 세 사람은 이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일단 병원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수도 있겠어요.”

도윤이 급히 외투를 걸쳐 입었다.

“잠깐만요, 강 검사님! 오히려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담당 의사들이 모두 명성 쪽 사람들이라면…….”

도윤이 고개만 돌려 말을 잇는 배영준을 힐끗 바라본다.

잠시 후, 도윤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한다.

“성명… 아니, 비단병원은. 내 병원입니다.”

“…….”

“만약, 그런 내 병원에서 내 명을 거역한다면…….”

도윤이 눈을 빛내며 말을 잇는다.

“또 한 번 보여 줘야지요. 내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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