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계부일까, 친부일까
[새로운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실로 오래간만에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에 걸음을 옮기던 도윤이 멈칫했다.
“퀘스트…….”
작게 중얼거린 도윤이 홀로그램에 손을 가져다 대자, 이내 세부적인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계의 거물, 김문성의 체포를 성공적으로 완료하라!]
[퀘스트 보상: 레인보우 주사위 1개]
‘공짜 퀘스트잖아……?’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김문성에 대한 체포 허가가 나지 않은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미 최종 결재권자의 OK 사인까지 떨어진 마당에, 김문성의 체포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가 도주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으니까.
“강도윤 검사다!”
순간 로비 한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윤이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청사 내에 들어온 도윤을 알아본 기자의 외침이었다.
자신에게 뛰어오는 기자들을 보며, 도윤이 천천히, 마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강 검사님! 이번 분신자살 기도 사건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시죠!”
“사건 처리 과정에서 불공정한 편파수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혹시 윗선에서 어떤 지시가 있었습니까!?”
“피해자 유족이 병원에 후송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뭔가요!?”
순식간에 둘러싸인 도윤이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받기 시작했다.
도윤이 평정심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단상 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비켜 주시겠습니까?”
“일단 한 말씀……!”
무어라 소리치려던 기자가 멈칫했다.
도윤과 딱 하고 시선이 마주친 순간.
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오르며,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기자가 속으로 당황하고 있을 때, 도윤이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재차 말한다.
“…올라가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두 해드리겠습니다.”
“예? 아, 예.”
도윤의 앞을 막아섰던 기자가 주춤주춤 옆으로 물러섰다.
묘한 분위기가 전염병처럼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웅성거림이 이전보다 확연이 줄어든 것을 느끼며, 이윽고 도윤이 단상 위에 올라섰다.
“서울중앙지검, 강도윤 검사라고 합니다.”
기자들을 향해 한차례, 허리를 숙여 보인 도윤이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찬찬히, 기자들을 둘러보는 도윤의 눈빛 사이로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눈앞에 있는 기자들은 모르고 있겠지만, 도윤은 이미 이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다.
예지의 대가.
그 이능력이 스스로 위험을 감지하고, 머릿속에 번뜩이곤 했으니까.
도윤이 눈을 빛내며, 두꺼운 봉투 안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들었다.
“…여기 이 두꺼운 서류들이 보이십니까?”
“…….”
도윤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자, 웅성거리던 기자들이 입을 다문 채, 도윤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림잡아 에이 포 용지 수십 장은 족히 넘을 듯한 두께.
한 기자가 조용히 손을 들며 묻는다.
“혹시… 성명병원 사건 수사 서류입니까?”
“설마요. 함부로 가지고 다닐 수도 없지만, 워낙 많은 양이라, 가지고 다니기도 힘듭니다.”
“그럼…….”
질문을 던졌던 기자가 고개를 갸웃하자, 도윤이 굳은 얼굴로 말을 잇는다.
“성명병원 사건으로 발생한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
“…….”
“그것만 따로 추렸는데도, 이 정도 양입니다.”
“……!”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기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
예상은 하였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분량이 아닌가?
유족까지 포함된 양이라지만,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가만히 주변을 살피던 도윤이 한 기자를 지목했다.
‘중심일보’라 적힌 마이크를 손에 쥐고 있는 젊은 기자였다.
“기자님, 혹시, 분신자살 기도자 분을 직접 만나 보고 오셨는지요?”
“제가 지금 막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중심일보에서 나온 기자 옆에 있던 또 다른 기자가 손을 들며 말했다.
도윤이 그곳을 향해 조용히 시선을 던지며 묻는다.
“대화가 가능하던가요?”
“예. 편파수사에 대해 계속해서 억울함을 호소하더군요.”
도윤이 힐끗 말을 하는 기자의 마이크를 바라봤다.
조국일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마이크.
도윤이 눈빛을 가라앉히며 묻는다.
“구체적으로, 제 수사의 어떤 부분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하시던가요?”
“…사건이 발생한 지 이미 1년은 훌쩍 넘었습니다. 그분은, 검사님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지연시켜, 피의자들이 합당한 처벌을 받지 못하도록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 책임 있는 머리급들은 모두…….”
도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기자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책임 있는 몇몇만 처벌하였지요. 그와 관련된 나머지 실무자들은 모두 제외하구요.”
“그건…….”
도윤이 무어라 말하려다 멈칫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도윤도 할 말이 많이 있었다.
성명병원이라는 대형병원 전체가 장기매매 브로커들과 결탁하고 있는 상황.
눈에 보이는 관계자들만 수십 명은 족히 되는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관계자들까지 단시간 내에 모두 처벌하기에는 분명히 무리가 있었다.
그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장성진의 계좌를 추적하는 데만 1년 가까이 걸렸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얘기를 기자들에게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거야말로, 자신의 능력 부족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아무리 고소 사건이 아니라지만, 전 국민들이 모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사건입니다. 신속한 수사와 강경한 처벌만이, 국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검사님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
형사소송법상, 고소 사건은 반드시 3개월 이내에 처리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물론, 성명병원 사건의 경우 고소 사건이 아니었기에, 이런 법리에 구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자는 취지는 동일했다.
“…제가 사건을 늦게 처리하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 로비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말씀이시군요.”
“뭐, 검사님이 중간 브리핑 따위를 생략한 부분도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군요.”
“…….”
중요 사건 수사 사항의 경우, 국민들이 제때제때 알 수 있도록, 중간 브리핑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도윤은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사건 성격이 성격이니만큼, 대략적인 수사의 큰 틀을 브리핑하는 것만으로, 피의자들의 도주가 수월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하군.’
도윤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쓰게 웃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피해자 유족이라는 확실한 신분.
달리 생각할 바가 없는 분신자살 기도.
억지가 아닌, 제법 신빙성 있는 이유까지.
‘무작정 편파수사니 하는 방식으로 생떼를 부렸다면, 아무런 영양가가 없다는 것을 저들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피식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이내 입을 열었다.
“이게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이라면,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무섭네요.”
“…지금 엄일경 씨가, 누군가의 오더로 제 몸에 불을 질렀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피해자 유족인 그가? 그게 사건 담당검사로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조국일보 기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도윤을 쏘아붙였다.
주변에 있던 몇몇 기자들도 덩달아 인상을 찌푸렸다.
도윤이 방금 한 말은, 상당히 거북하게 들릴 만했으니까.
마치,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누군가 이런 일을 꾸몄다는 식으로 들리지 않은가?
“오해는 마시구요.”
옅게 미소 지은 도윤이 고개를 저으며, 손에 쥔 서류를 펼쳐 보였다.
“여기 이 서류들.”
“……?”
기자들의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도윤이 쥐고 있던 서류를 둘로 나눴다.
“제가 왼손에 쥔 서류의 피해자들과, 오른손에 쥔 서류의 피해자들. 드러나지 않은 큰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차이점이라니…….”
조국일보 기자가 멍하니 끝말을 따라하자, 도윤이 말을 잇는다.
“똑같은 성명병원 장기매매 피해자들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이쪽.”
도윤이 왼손을 들어 보였다.
“이쪽에 분류된 피해자들. 신원확인 결과, 다른 손에 쥐고 있는 피해자들과 달리, 눈에 띄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
순식간에 조용해진 주변을 둘러보며, 도윤이 말을 잇는다.
“바로, 부모가 없는 보육원 출신들이라는 것이죠.”
“……!”
순간 기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 그 많은 피해자들이, 모두 고아 출신이라는 말입니까?”
한 기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통계상으로 확인되는 대한민국의 고아 수는 1만 안팎.
그 점을 감안해도, 저쪽으로 분류된 인원이 너무나 많았다.
척 보기에도, 반대쪽 손에 쥔 서류의 2배는 되어 보였으니까.
“설, 설마… 보육원에서 아이들의 장기를 팔아넘겼다는……?”
눈치 빠른 한 기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황상으로는, 그렇습니다.”
“확, 확실한 겁니까?”
질문을 던졌던 기자가 재차 묻자, 이번에도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에서 관리하는 시스템이 고장이라도 나지 않은 이상, 확실합니다.”
“개자식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 따위 미친 짓을……!”
기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을 때.
도윤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성명병원은 본래, 명성그룹에서 관리하고 있던 병원이었죠.”
“…….”
“명성그룹과 성명병원. 그리고, 보육원. 뭐 생각나시는 것 없습니까, 기자님?”
도윤이 한참 대화를 나누던 조국일보의 기자를 바라보며 묻는다.
완전한 침묵.
주변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 정도 얘기를 듣고도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기자는 없었다.
도윤이 손가락 하나를 펴 올렸다.
“그럼, 이 즈음에서 의문.”
“……?”
“과연, 오늘 분신자살 소동을 일으킨 엄일경 씨는, 죽은 아이의 친부일까요? 아니면, 계부일까요?”
“……!”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조국일보 기자가 소리친다.
“명성그룹에서 이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계획했다,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정황상 드러나는 사실만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놈의 정황, 정황! 검사는, 명확한 증거만 가지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얼굴까지 붉히며 소리치는 조국일보 기자를 보며, 도윤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증거, 물론 있습니다.”
“……!”
조국일보 기자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증거가… 있다구요?”
“증거는 물론, 증인도 있지요.”
“…….”
“기자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일에, 살아 있는 증인이 있다는 사실을요.”
말을 마친 도윤이 청사 출입문 방향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주변이 삽시간에 침묵으로 내려앉았을 때.
도윤이 작게 신호를 보내자, 이내 하나의 인형이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저벅.
드넓은 로비 내에, 한 인형의 걸음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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