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잡는 회귀검사-155화 (155/174)

155화 책임은 제가 집니다.

같은 시각, 조국일보 본사.

안 그래도 때 아닌 분신자살 소동으로, 기자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본사 전체가 또 한 번 난리가 났다.

평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박성준 회장이 회사 내에 직접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회, 회장님……!”

배가 두툼하게 튀어나온 편집국장이 잽싸게 뛰쳐나왔다.

“편집부국장이랑 취재부국장까지, 지금 회의실로 모이라고 하세요.”

박성준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알, 알겠습니다.”

더듬거리며 대답한 편집국장이 박성준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더니, 어디론가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회사 내 마련된 자신의 집무실에 도착한 박성준이 입고 있던 정장 외투를 벗어 던졌다.

“강도윤…….”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박성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치인만큼이나 줄서기를 잘해야 하는 곳이 언론바닥이다.

그저 국민들에게 객관적인 진실만을 보도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천만에!

커다란 신문지 한 면에 실린 자그마한 기사 하나가 얼마나 큰 후폭풍을 동반하는지, 박성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리를 생각하면, 여기서 강도윤을 완전히 묻어 버리는 게 맞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기 싫다는 말도 진심이었고, 무엇보다 묘하게 놈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이었지. 제 할아버지 앞에서, 그토록 의사를 당당하게 표현하던 그 아이의 모습은…….’

상념에 빠져 있던 박성준이 한차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명성그룹과 제2야당인 한우리당.

현직 국무총리까지 엮어 맨 동아줄.

회사의 앞길을 밝혀 줄 그 튼튼한 동아줄을, 스스로 끊어 낼 것인가, 붙잡을 것인가.

“생각이 많으신 표정이네요.”

“……!”

순간 출입문 방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박성준이 화들짝 놀랐다.

“너, 언제…….”

“우리 집안사람들은 정말 한결같네요. 무언가에 집중하면, 주변은 의식조차 못 한다는 거.”

출입문 앞에서, 박보윤이 척하니 팔짱을 꼈다.

그런 보윤을 바라보며, 박성준이 쓰게 웃었다.

“누구 때문에, 생각이 많아졌구나. 설마, 할아버지 앞에서 니가 남자까지 들먹이며, 그리 고집을 부릴 줄이야…….”

“저도 어느 분 때문에, 생각이 아주 많아졌는걸요?”

“…응?”

박성준이 멍하니 반문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 처음이었으니까.”

“…….”

“설마 엄마 얘기까지 하시면서, 할아버지 말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실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네요.”

“…다 들었니?”

박성준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박성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보윤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혹시…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나요?”

“…….”

“일에 미친 아버지가, 그저 몸이 아픈 엄마를 방치했다고만 생각했…….”

“일이 아니라, 니 엄마에게 미쳤었지.”

말을 잇던 보윤이 멈칫했다.

처음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엄마에 대한 얘기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하는 것은.

엄마 얘기만 나오면 화제를 돌리고, 입을 다물던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으니까.

눈을 빛낸 보윤이 묻는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니 엄마가, 발레리나였던 것은 알고 있니?”

“아버지는 체육부 기자였구요.”

보윤의 말에 박성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문사에서 제일 높은 사람 자식이, 부서 중 가장 하빠리라는 체육부 기자가 된 것도 모자라, 비전도 없는 발레리나에게 사랑에 빠져, 그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게 되었지.”

“…….”

“회사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강했던 니 할아버지. 결혼을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는 내 아버지가, 과연 그걸 두고 보고만 있었을까?”

“…….”

여기까지는 보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보윤이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는, 자신을 꼭 껴안고 옛날 사랑이야기를 도란도란 들려주곤 했었으니까.

굳이 그게 아니라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잘나가는 언론사 회장의 아들과 평범한 집안의 발레리나.

결말이 뻔히 보이는 사랑을, 두 사람은 무려 10년 가까이 나눴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까지 하여 자신도 낳았고 말이다.

그래서, 보윤은 더욱 더 화가 났다.

그토록 사랑에 미쳤던 사람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돌변했기 때문이다.

태생이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보윤을 낳고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어린 시절.

몸져 누워 있는 어머니를 향해, 할아버지가 했던 말을, 보윤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한 마디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자신의 심장 한구석에 깊은 상처를 남겼었으니까.

‘왜 아들이 아니냐?’

속으로 중얼거린 보윤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시의 남아 선호 사상이 반영된 시대적 상황.

그리고 대를 이을 후손에 대한 욕심.

할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오죽했으면, 생사를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따위의 말까지 했을까.

안팎으로 깊은 상처를 받은 어머니는, 그렇게 죽어 갔다.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병실을 찾지 않았고 말이다.

그 쓰린 기억이, 성장기 내내 보윤을 아프게 했다.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이를 악물고, 정말로 공부에만 미쳤고, 그토록 바라던 검사가 되었다.

그때서야 마침내, 할아버지의 인정도 받을 수 있었고 말이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지금의 보윤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에도… 지금 상황과 비슷했어.”

“…예?”

침묵을 지키던 박성준이 입을 열자, 보윤이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니 할아버지는… 언제나 한결같은 분이시거든.”

“…….”

“할아버지가, 나와 한 약속이 있었다.”

“약속요……?”

보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박성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보윤이 무어라 말하려 할 때, 박성준이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얘기는 다음에.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니?”

똑, 똑, 똑.

“회장님, 각 임원들 모두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출입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박성준이 피식 미소 지었다.

“일단은, 니가 좋아하는 그 남자부터 살리는 게, 우선 아니겠니?”

“그 말씀은……!”

보윤이 순간 밝아진 표정으로 말하려다 움찔했다.

“…다음에, 꼭 얘기해 주셔야 해요.”

보윤이 슬며시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박성준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물론이다.”

짧게 대답한 박성준이 이내 출입문을 향해 소리친다.

“들어와요!”

벌컥.

박성준의 외침과 동시에, 출입문이 열리더니 조국일보 임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한차례 힐끗 보윤을 바라본 박성준이 다시 임원들을 돌아보며 말을 잇는다.

“시간이 없으니까, 회의실 말고 여기서 바로 얘기하겠습니다.”

“예!”

“서울중앙지검 앞 분신자살 기도 사건. 어떻게 처리되어 가고 있습니까?”

박성준의 물음에 배가 튀어나온 편집국장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한다.

“부서에 상관없이, 가용 취재부 기자들은 모두 그쪽으로 보냈습니다. 마침 지금 막 강도윤 검사도 그곳에 도착했기 때문에, 얘기하는 걸 들어 보고 적당히 말꼬리 잡으면…….”

“강 검사가 지검에 나타났다고요?”

박성준의 반문에, 옆에서 지켜보던 보윤도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이런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우선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활동 반경이 좁아지기 때문에, 은밀하고 신속하게 파악하는 게 핵심이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 지 채 수 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스스로 지검에 나타나다니…….

멍하니 있던 박성준이 문득 든 생각에 멈칫했다.

“…한데, 적당히 말꼬리를 잡는다니. 그건 무슨 말입니까?”

“예? 그야, 총리님이…….”

더 듣지 않아도 뒷말은 예상되었기에, 박성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총리님이 다녀갔습니까?”

“예. 회장님이 도착하시기 바로 전에 나가셨는데… 같이 오셨던 것, 아니었습니까?”

‘작정을 하셨군.’

박성준이 속으로 쓰게 미소 지었다.

한 나라의 총리를 맡고 있는 사람이 스케줄에도 없는 특정 언론사.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좋게 볼 리가 없다.

아마, 그만큼 이 일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뜻이리라.

“…오셔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잠시 고개를 갸웃한 편집국장이 대답한다.

“확실하게 죽여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팩트에 입각해서…….”

“아직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팩트가 어디 있……!”

발끈한 보윤이 무어라 소리치려고 하는 순간.

조용히 손을 들어 보윤을 제지한 박성준이 말한다.

“…지금 이곳, 조국일보의 최종 결재권자가, 총리님입니까?”

“…예? 그건…….”

“현재 이곳의 최종 결재권자는, 누구입니까?”

묘한 분위기 속에, 눈치를 살피던 편집국장이 조심스레 대답한다.

“…회장님이십니다.”

“진실에 입각한 확실한 정보. 그리고, 국민들의 알 권리를 반드시 충족시켜 주고야 말겠다는 기자로서의 소신.”

“…….”

“그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기자들에게 전달하세요.”

“…회장님! 그건……!”

지켜보던 보윤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말은, 할아버지와 정면에서 맞서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우리는!”

순간 박성준이 큰 소리로 외치자, 주변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잠시 좌중을 둘러보던 박성준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정치인이 아닌, 기자입니다.”

“……!”

“각자의 위치에서, 본연의 임무에만 최선을 다하세요. 주변의 오더나 눈치 따위는, 신경 쓰지 마시구요.”

“그 말씀은…….”

박성준이 올곧은 눈빛으로 마지막 말을 잇는다.

“모든 책임은, 회장인 제가 집니다.”

* * *

서울중앙지검 1층 로비.

“대한… 보육원장님, 어떻게…….”

전 대한보육원장, 강종팔이 휠체어도 없이 등장하자, 조국일보 기자가 눈을 크게 떴다.

일흔이 넘어, 병원에서 오늘내일하던 늙은이가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허리까지 꼿꼿이 한 채, 뚜벅뚜벅 걸어오자 적잖이 놀랐다.

도윤이 한층 짙어진 미소로 입을 열었다.

“정황상 증거에 신빙성을 더할, 산증인의 진술. 그리고…….”

말끝을 흐리던 도윤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녹음기……?”

조국일보 기자가 그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확신을 심어 줄, 확실한 증거.”

“……?”

“오춘화 회장의 심복이나 다름없던, 명성그룹 박건우 전 부사장의 진술녹취록.”

“……!”

기자들이 찢어져라 눈을 부릅떴다.

“이제, 계속 얘기해도 될까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도윤을, 조국일보 기자가 그저 멍하니 바라만 봤다.

“이 소동이 마무리되어야, 제가 여기 온 진짜 이유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말을 잇는 도윤의 앞.

단상 거치대 위에 놓여 있는 서류봉투 사이로, 그 내용물이 삐죽이 튀어나왔다.

얇은 서류 상단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한우리당 김문성 의원 체포 허가’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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