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잡는 회귀검사-156화 (156/174)

156화 눈썰미

‘운이 좋았지.’

십수 년 전 명성그룹에서 진행한 보육원 사업.

상당히 오랜 기간이 지난 만큼, 그때 당시의 자료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남아 있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오래된 결재판 사이에 끼어 있던, 사업 추진 계획서 하나.

설마, 간략한 사업 개요만이 적혀 있던 그 얇은 종이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게 될 줄은 도윤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서류 말미.

무심코 지나칠 수 있었던, 계획의 공동 기안자.

‘오길태, 그리고… 박건우.’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옅게 미소 지으며, 주변을 둘러본다.

지금 기자들은, 전 대한보육원장인 강종팔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육신의 노화와 더불어, 수십 년간 마음의 짐을 안고 죽어 가던 그는.

도윤과 명성그룹 사건의 진실에 대해 얘기하며, 거짓말처럼 건강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홀로 침상을 털고 일어날 정도로 말이다.

아마 본인 스스로도 힘들었을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진실을 폭로한다?

대한민국 형법에는 엄연히, 방조범이라는 죄책이 있다.

아니, 죄질이 죄질인 만큼, 어쩌면 공범으로 몰릴지도 몰랐다.

당시의 명성그룹에게, 그 정도 힘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홀가분하겠지.’

굳은 표정으로, 아이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강종팔을 보며, 도윤이 옅게 미소 지었다.

표정은 분명 굳어 있었지만, 이전과 같은 떨림 따위는 없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강종팔의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자, 한 기자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도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그 기자가 질문을 던진다.

“검사님 손에 쥐어진 녹음기. 분명, 박건우 전 부사장의 진술이 녹취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그가 이번 일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 도윤이 사업 추진 계획서를 꺼내 들었다.

“그 사업 기안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박건우 부사장이니까요.”

“……!”

눈을 크게 뜨는 기자들을 보며, 도윤이 말을 덧붙인다.

“물론, 최종 결재권자는 오춘화 회장이지만요.”

“그, 그럼… 박건우 부사장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자백이라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기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기자를 바라보는 도윤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박건우가 제 죄를 뉘우쳐, 스스로 자백을 하였느냐고?

천만에!

어디까지나, 도윤에게 히든카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문의 달인이라는, 필살의 히든카드가.

자세를 바로 한 도윤이 대답한다.

“뭐, 스스로 반성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박건우 전 부사장이 자신의 죄를 자백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말을 마친 도윤이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이내 박건우와 도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도윤이 질문을 던지면, 박건우가 그에 대해 답한다.

피의자 심문 형식의 그 대화가 녹음기를 타고 흘러나오자, 시간이 지날수록 기자들의 두 눈이 커져만 갔다.

그리고, 명성그룹의 보육원 사업 계획의 진정한 목적이 만천하에 공개되었을 때.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눈앞을 가리는 플래시 세례가 쉼 없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형사소송법에는 각 수사 주체마다, 명확한 구속기간을 규정하고 있다.

경찰이 10일.

검찰의 경우, 기본 10일에 1차에 한해, 10일을 더 연장할 수 있다.

총합 30일.

경찰이든, 검찰이든, 이 구속기간 내에 한해서, 피의자를 구속하여 수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사 결과에 따라, 피의자를 계속 구속하여 재판을 받게 할지.

그게 아니면, 석방 후,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물론, 그 이후에 보석금을 지불하고 가석방되는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죄질이 중한 중범죄자의 경우, 구속재판은 물론이고, 보석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명성그룹의 전 부사장인 박건우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구치소 내 5평 남짓한 독방.

수의를 입은 한 사내가 고개를 파묻고 주저앉아 있었다.

아무렇게나 자라난 수염은 나이를 쉽사리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고.

수의 위에 770번이라는 수감번호가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빌어먹을…….”

한참이나 머리를 숙이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며 낮게 읊조렸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사내의 얼굴은, 이전과 달리 상당히 야위었지만 분명한 박건우의 얼굴이었다.

“어쩌다가 내가…….”

박건우가 주먹을 꾸욱 말아 쥐었다.

현재 박건우의 신분.

미결 수용자(未決收容者).

법적 판결이 나지 않은 상태로 구금되어 있는 형사 피고인을 말한다.

박건우의 신분이 이 미결 수용자로 바뀐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사건 담당검사인 도윤이, 법적으로 보장된 구속기간을 만기까지 꽉꽉 채웠기 때문이다.

검사들이 피의자를 괴롭힐 때, 흔히 쓰는 방식이다.

물론, 정말로 수사할 사항이 많은 경우는 제외하고.

비교적 건물 내에서 행동거지가 자유로운 구치소나 교도소에 비해.

수사기관의 구속수사 중 수감되는 유치장의 경우, 행동거지가 매우 제한적이라, 수감자들에게는 고역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검사들이, 이를 이용하는 것이었고 말이다.

회귀 전 수십 년의 경찰 경력이 있는 도윤 또한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개자식…….”

순간 도윤의 얼굴을 떠올린 박건우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자신은 이미 끝이다.

아무리 값비싼 변호사를 선임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예상되는 형량이 최소 20년.

어쩌면, 무기징역까지 나올지도 몰랐다.

놈이 기어이 밝혀낸 그 죄증들은, 그 정도로 자신을 옭아매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대체 왜 놈이 묻는 족족, 병신처럼 대답해 준 건지!”

박건우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했다.

분명 놈과 대화를 이어 갈 때만 해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대화가 끝이 나고.

시간이 지나, 놈이 녹음된 대화 내용을 들려줬을 때.

그때의 황당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성명에서 있었던 불법납치와 장기수술은 물론.

자신이 기안한 보육원 설립 사업의 본래 목적까지.

놈이 묻는 족족, 모조리 사실대로 대답해 줬다.

어차피 끝난 인생,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절대 아니다.

자신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 따위 일은 있을 수 없다.

죽더라도, 혼자는 죽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것이 바로 자신 아니던가?

이렇게 되면, 자신의 인생은 빼도 박도 못 하고, 정말로 끝이다.

설령 형량을 다 채우기 전에 가석방되더라도, 밖에 있는 오춘화 회장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자신이 아는 오 회장은, 그런 인물이었다.

“절대 안 돼.”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질 치던 박건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식의 끝은 안 된다.

설령 명성의 부사장 박건우는 끝일지라도.

이렇게 삶을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보시오, 교도관!”

철창 가까이 다가간 박건우가 큰 소리로 고함쳤다.

“…뭐요?”

마침 주변을 지나가고 있던 직원이, 천천히 다가왔다.

“부탁이 있소.”

“……?”

잠시 머뭇거리던 박건우가 이내 굳은 눈빛으로 말한다.

“면회를 좀, 요청하고 싶소.”

* * *

오춘화 회장의 개인 서재.

휴대전화에 입을 가져다 댄 오춘화 회장이 고래고래 고함친다.

“장 회장! 정말 이러기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오 회장님.”

수화기 너머로, 곧바로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KS그룹, 장학수 회장의 목소리였다.

“명성물산 인수제안 건을 말하는 것이요! 성명병원에 이어, 물산까지! 정녕 우리 회사와, 전쟁이라도 해 보자는 거요!?”

“…오 회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인수 제안자, 장호식이! 장 회장의 자식 놈 아니요!?”

“…….”

장학수 회장이 입을 다물었다.

“설마, 아들놈의 일이라, 모른다고 발뺌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오춘화 회장이 재차 쏘아붙였다.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장학수 회장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오 회장님.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잠시 말끝을 흐리던 장학수 회장이 한층 굳어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아들놈의 일은, 회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자식이 저 하고 싶은 일을 해 보겠다는데, 어느 부모가 그 앞길을 막아서겠습니까? 특별히, 회사에 피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그 어린놈이, 무슨 돈이 있어서 홀로 회사 하나를 통째로 인수한다는 거요!? 설마, 쥐꼬리만 한 변호사 선임료를 그만큼이나 모았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

“그리고! 회사에 피해가 안 가요? 우리 명성이, 이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요!?”

이어지는 오춘화 회장의 말에, 장학수가 한차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학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쩌실 겁니까?”

“뭐라……?”

오춘화 회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어떻게, 저희 회사와 전쟁이라도 해 보시겠습니까?”

“이, 미친……!”

오춘화 회장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인수 제안은, 말 그대로 제안일 뿐입니다. 제안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오 회장님 선에서 커트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건……!”

“오 회장님이 지금 이러시는 것, 그저 회장님의 자존심 때문 아닙니까?”

“…….”

이번에는 오춘화 회장이 입을 다물었다.

딱히 대답할 말이 궁색했기 때문이다.

장학수의 말대로다.

제안은 제안일 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절하면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오춘화 회장은 잘 알고 있었다.

회사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면, 지금 명성물산을 정리하는 것이, 회사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니까.

무엇보다, 이 정도로 좋은 조건에 지금의 명성물산을 사들이려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춘화 회장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

‘자존심…….’

오춘화 회장이 입술을 콰득 깨물었다.

성명병원에 이어, 명성물산마저 같은 회사에 빼앗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끌려만 다닐 수밖에 없는 현실.

그 사실이, 오춘화 회장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의 주도자는, 오춘화 회장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정 불편하시다면, 그래요. 제가 아들놈을 잘 설득해 보겠습니다. 놈이 경영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굳이 오 회장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명성물산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지요.”

“…….”

“적당한 자회사 하나 떼어 주면 그만이니까요. 그럼 이 제안은, 없던 것으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장학수의 목소리에 오춘화 회장의 열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한순간의 자존심 때문에 그러라고 하기에는,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

바로 그때.

“회장님!”

노크도 없이, 출입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새파랗게 질린 오창원이, 그곳에 서 있었다.

“지, 지금 TV에, 박, 박건우. 녹, 녹취파일……!”

더듬더듬 얘기하였지만, 그 뜻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와락 하고 인상을 구긴 오춘화 회장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리모컨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늙은 노인이 내지르는 괴성이, 저택 내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