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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잡는 회귀검사-158화 (158/174)

158화 당신 편

국무총리공관(國務總理公館).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이곳은, 조선시대 때 태화궁(太和宮) 자리였다가, 광복 후 1961년부터 국무총리 공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옛 시대의 고풍스러움이 곳곳에 남아 있는 장소.

현재 이곳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조국일보의 전 주인이자, 보윤의 할아버지.

박보군 총리다.

* * *

관저 집무실.

책상머리에 머리를 숙이고 있던 박보군 총리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곰처럼 우람한 체격의 40대 초반 사내가 조용히 서 있었다.

짧게 친 스포츠머리와 날카로운 눈매는, 누군가 조폭으로 오해해도 무방할 외관이었다.

사내의 이름은 심형택.

박보군 총리를 20년 가까이 보필한 개인 경호원이자, 박보군이 믿는 몇 안 되는 심복 중 하나였다.

“언제 왔나?”

“5분 정도 되었습니다.”

“이런…….”

박보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할 게 많아지면, 이런 식으로 생각에 잠기곤 했다.

누가 오더라도 인지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요즘 생각이 많아져서 말이야. 이해해 주게.”

“저까지 신경 써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총리님.”

잠시 멈칫한 박보군이 듬직한 얼굴로 자리하고 있는 심형택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내 박보군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는 내가 미워할 수가 없군.”

“…….”

“그래, 무슨 일이야? 쭈글탱이 늙은이 얼굴 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닐 테고…….”

잠시 머뭇거리던 심형택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김문성 대표가 찾아왔습니다.”

“기어이…….”

이어지는 심형택의 말에, 박보군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막다른 골목길에 내몰린 생쥐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야, 뻔하다.

한차례 한숨을 내쉰 박보군이 말한다.

“내 책임이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부르게. 한 번은 만나야 한다고 나도 생각했으니까.”

“…….”

“혹시나 김 대표 뒤에 따라붙는 기자들이 있으면, 형택이 니가 적당히 둘러대.”

“알겠습니다.”

“데려와.”

자신의 말에, 곧바로 몸을 돌릴 거라 생각한 심형택이 또다시 머뭇거리자, 박보군이 고개를 갸웃했다.

“할 말이 또 있나?”

“그게… 배지수 실장도 찾아왔습니다.”

“…지금 말인가?”

“예.”

심형택의 짧은 대답에, 박보군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배지수.

재작년까지 평화당 국회의원을 지낸 그녀는 현재, 국무총리비서실장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마흔여덟의 나이에 국무총리비서실을 대표하는, 명실공히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인물이었다.

국무총리비서실장의 공식적인 직무는 국무총리를 보좌하는 일이지만.

실제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국무총리비서실장의 임명권자는 국무총리가 아니다.

국무총리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국무총리비서실장을 임명한다.

알려진 비서실 직원만 수백 명.

경찰청장과 같은 차관급의 힘을 가진 자리였다.

문제는, 현재의 대통령이 이 자리를 이용해 박보군을 견제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정계 인사들 중, 누구보다 중립을 지키고자 하는 박보군 총리.

그러다 보니,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여당과 제1야당 의원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당 인사들 상당수가 이런 박보군 총리를 따랐다.

그 사실을, 대통령은 항상 우려했다.

혹시나 박보군이 다른 마음을 품게 되면, 권력의 추가 크게 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안이 현재의 국무총리비서실장, 배지수.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국무총리를 보좌하는 이 자리야말로, 박보군을 견제할 수 있는 최고의 수라고 생각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그 예상은 적중했고 말이다.

골치 아픈 표정을 짓고 있던 박보군이 말한다.

“뭐 때문에 왔다던가?”

“아마 얼마 전 발의된, 수사권 조정 건 때문으로 보였습니다. 총리님과 상의할 일이 있다며…….”

“법안을 마음껏 논의하라고 만든 장소가 국회 아닌가. 제집 놔두고, 왜 예까지 와서 나를 괴롭히는지…….”

박보군이 더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깊은 한숨을 내쉰 박보군이 말을 잇는다.

“조금 기다리라고 해. 먼저 온 손님이 있다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박보군을 향해 고개를 숙인 심형택이 이윽고 몸을 돌렸다.

활짝 열린 출입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심형택의 뒷모습을 보는 박보군의 두 눈빛은.

어느 때보다 깊게 침체되어 있었다.

* * *

국무총리공관 접객실.

“…응?”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차를 홀짝이던 중년 여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얇은 은색 무테안경이 상당히 지적인 느낌을 주는 여성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얼음마녀라고 부르곤 한다.

차가운 외모만큼이나 냉철하게 일을 처리하는 얼음마녀.

그녀가 바로, 현재 국무총리비서실장인, 배지수였다.

“저 사람, 분명히…….”

활짝 개방된 접객실 출입문 사이로 지나간 남자.

자신의 눈이 정확하다면, 분명 그 사람이었다.

“한우리당, 김문성 대표.”

눈을 빛낸 배지수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로 김문성 대표가 맞다면, 자신이 이곳에 방문한 목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검·경 수사권조정 발의가 다름 아닌, 김문성 대표의 한우리당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여당의 오랜 숙원과도 같은 그 일을, 다른 누구도 아닌 야당 당원들이 추진한다.

물론, 영향력이 보다 더 강한 제1야당이 아닌, 제2야당이지만.

제2야당인 한우리당의 뿌리를 생각했을 때,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핫이슈였다.

“그래서, 더 믿기지가 않는단 말이지. 분명히, 무언가 있어.”

배지수가 재빨리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누구보다 지지해 왔던 것이 바로, 배지수였다.

야당의 수사권 조정 발의는 분명 반길 만한 일이었지만.

만약, 이 일에 어떤 흑막이 숨겨져 있다면, 반드시 사전에 막아야 했다.

실상은 정치인 밥그릇 싸움이었다느니 따위의 말이 새어 나오게 된다면.

자신들의 오랜 숙원은, 또 한 번 퇴보하게 될 것이니까.

“절대 안 돼.”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린 배지수가 곧장 출입문을 나서려는 순간.

“……!”

바로 앞에서 나타난 건장한 체격의 사내를 발견한 배지수가 깜짝 놀랐다.

“어디를 가시는지요?”

“아, 그게…….”

배지수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눈앞에 등장한 사내.

배지수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박보군 총리의 개인 경호원이자, 오랫동안 곁에 함께한 충실한 심복.

총리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심 실장’으로 더 유명한, 심형택.

자세를 바로 한 배지수가 짐짓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다.

“총리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

잠시 이상한 눈초리로 배지수를 바라보던 심형택이 대답한다.

“먼저 오신 손님이 있어, 조금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

배지수가 입을 다물었다.

“혹시, 바쁘시다면 다시 스케줄을 잡는 것도…….”

“아니요. 기다리죠.”

배지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

“혹시, 먼저 오신 손님이라는 게, 한우리당 김문성 대표인가요?”

“…….”

이어지는 배지수의 물음에, 이번에는 심형택이 입을 다물었다.

마치, 그걸 니가 어떻게 아냐는 눈빛을 지어 보인 채.

배지수가 그 눈빛에 대한 답을 해 주려는 듯, 짧게 대답한다.

“방금 지나가던데요?”

“…….”

“총리님과 김 대표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껴도…….”

“두 분이 안 괜찮으실 겁니다.”

“…….”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하는 심형택을 보며, 배지수가 쳇 하고 혀를 찼다.

“다시 올게요. 그리고…….”

“……?”

말끝을 흐리는 배지수를 보며, 심형택이 고개를 갸웃했다.

“맨날 그런 노티 나는 정장 말고, 산뜻한 거 하나 사 입어요. 그러니까 아직 시집오려는 아가씨들이 없는 것 아니에요.”

“…….”

“있던 아가씨들도 다 도망가겠네. 무슨 깍두기 아저씨도 아니고…….”

심형택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조금씩.

상황을 파악한 심형택의 인상이 구겨져 갈 무렵.

“총리님 용무 끝나면 연락 줘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을 마친 배지수가 찬바람이 일 정도로 홱 몸을 돌렸다.

또각, 또각, 또각.

유독, 강하게 구두 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기는 배지수가 이내 다시 소파에 몸을 묻자.

“…….”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심형택도 몸을 돌렸다.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자기도 노처녀면서…….”

“뭐라구욧!?”

용케, 그 목소리가 배지수의 귀에까지 들렸을까.

발끈한 배지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심형택을 노려봤다.

그런 배지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심형택이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출입문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이 흡사, 꿀을 훔쳐 먹다 벌에 쫓기는 곰과 같았다.

이윽고, 홀로 남게 된 접객실에 배지수가 씩씩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김문성의 출석기일까지, 이틀을 남겨 둔 저녁.

서울중앙지검 인근에서 가장 분위기 좋기로 유명한, 레스토랑.

창가 쪽, 전망이 좋은 테이블에 앉은 도윤이, 맞은편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보윤을 바라본다.

오늘의 저녁 약속은 도윤이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제대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국일보에서 나온 기사들… 봤습니다.”

“그래요?”

보윤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나이프를 놀리며, 대답했다.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저에 대한 기사가 완전히 뒤바뀌었던데…….”

도윤이 말끝을 흐리며, 보윤의 얼굴을 바라본다.

“물론 좋은 방향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그게 뭐죠?”

보윤의 반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도윤이 묻는다.

“이것. 총리님의 뜻입니까? 그게 아니면, 박성준 회장님의 뜻입니까?”

“…….”

“처음부터 일관적인 태도였다면 모를까, 이 정도로 돌변할 정도라면, 그전까지 분명 갈등이 상당했을 거라 생각되는데…….”

“…….”

“박 검사님은 이 일의 내막에 대해, 알고 계실 거라 생각됩니다만…….”

도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보윤이,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를 ‘탁’ 하고 내려놓았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까지 살포시 찌푸리면서.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보윤의 물음에 도윤이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중요합니다. 누구의 의중인지에 따라, 앞으로의 제 행동 또한 바꿔 나가야 하니까요.”

“마치 수사선상에서 우리 아버지나 할아버지 또한, 예외는 없다는 식으로 들리네요.”

“…….”

도윤이 입을 다물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섣부른 자신의 발언에, 도윤이 속으로 자책하고 있을 때.

마침내, 보윤이 새빨간 입술을 열어, 말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예?”

밑도 끝도 없는 보윤의 말에, 도윤이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반문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보윤이 입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볼 아래는 보일 듯 말 듯, 옅게 상기되기까지.

잠시 머뭇거리던 보윤이, 이내 마지막 말을 잇는다.

“저는… 당신 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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