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잡는 회귀검사-159화 (159/174)

159화 중도의 정치

지금 막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서는 중년 사내를 발견한 박보군 총리가 손을 들어 보였다.

“오래간만이군.”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총리님.”

김문성 대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여전히 건강해 보이십니다.”

“나야 뭐, 항상 똑같지 않나. 나이 든 노인네들이 빨리 죽어 줘야, 집안이 평온한 법인데…….”

“아직 한창이십니다.”

으레 있는,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기를 잠시.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김문성이 본론을 꺼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 총리님은 알고 계시지요?”

“…대충은 알고 있네.”

박보군이 굳은 얼굴을 지어 보였다.

가만히 박보군의 표정을 살피던 김문성이 말한다.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

“총리님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까지, 동독이 행했던 정당체제를 원하십니까?”

“…….”

누가 들으면 깜짝 놀랄 발언을, 김문성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동독의 정당체제.

사실상 독재나 다름없는, 한 정당의 일당체제를 말한다.

다시 말해, 김문성의 말은 여당 하나의 일당체제를 원하는지에 대해, 한 나라의 총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던 박보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미 내 대답을 알고 있지 않은가?”

“…….”

“다른 누구보다 내 생각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자네 아닌가?”

“알지요. 알고말고요! 그래서, 더욱더 화가 나는 것입니다.”

순간 김문성이 역정을 냈다.

“총리님! 아니, 선생님!”

갑자기 바뀐 호칭에, 박보군이 움찔했다.

“저에게 처음, 정치에 대해 알려 주신 분. 다른 누구도 아닌 선생님 아니셨습니까!?”

“…….”

“항상 말씀하셨지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썩어빠지기 마련이다! 어느 한쪽의 독주체제는 민주주의를 퇴보시키기 마련이다!”

“…….”

“중도의 정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그 중도의 정치라는 게, 고작 이따위 것이었습니까!?”

“…너도 알지 않느냐?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한차례 깊은 한숨을 내쉰 박보군이 말을 잇는다.

“여당과 제1야당은 물론이고, 대통령님까지 승인한 일이야. 나라고 힘이 있겠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총리님이 나서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1야당이라 고개 세우는 신자유당 당원들은 머저리들입니다! 제힘 깎아먹는 줄 모르고, 당장의 감정에 휩쓸리는 병신 같은 새끼들!”

“…….”

“한통속인 대통령과 평화당 당원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이런 상황에서! 총리님이 나서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선단 말입니까!?”

김문성이 목에 핏대까지 세운 채 고래고래 고함치기 시작했다.

졌다는 듯, 두 손 든 표정으로 박보군이 묻는다.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나?”

무어라 말하려는 김문성보다 한발 빨리, 박보군이 말을 잇는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혹여나, 수사를 엎어 달라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말게. 내 능력 밖의 일이야.”

“바라지도 않습니다.”

스읍 하고 심호흡한 김문성이 눈을 빛냈다.

김문성이 박보군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이번에 발의된 검·경 수사권 조정 발의 건. 알고 계시지요?”

“…….”

박보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총리님이 힘을 실어 주십시오.”

“…그토록 게거품을 물고 반대해 오던 일을, 왜 갑자기 스스로 나서나 싶었더니… 가지치기였나?”

“…….”

“물론 그 타깃은…….”

“제 부탁. 들어주실 겁니까?”

김문성이 박보군의 말을 끊고, 재차 물었다.

“나머진 제가 모두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제가 싼 똥은 제가 스스로 치워야겠지요. 더 이상 선생님께 무리한 부탁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 하나면 됩니다.”

“…….”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박보군을 보며, 김문성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쪼록, 총리님의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깊게 허리를 숙인 김문성이 이내 몸을 돌렸다.

쿵!

“후우…….”

드넓은 집무실.

홀로 남은 박보군의 무거운 한숨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총리의 개인 집무실을 빠져나와, 곧장 걸음을 옮기려던 박보군이 멈칫했다.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김문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배지수 비서실장?”

“오랜만이네요, 대표님.”

생긋 웃은 배지수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비록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한때 아나운서까지 했던 경력이 있는 만큼,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커리어 우먼.

그럼에도, 김문성의 표정은 바로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듣고 있었나?”

“어머, 설마요. 저도 방금 왔는걸요.”

“…….”

“제가 남 대화나 엿듣는, 파렴치한으로 보이셨나 봐요? 그건 슬픈데…….”

“하…….”

가만히 듣고 있던 김문성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토록 방정맞은 모습이라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정녕 총리 비서실 내 명성이 자자한, 얼음마녀가 맞나 싶었다.

“한우리당 당원이… 20명 정도 되었나요? 만약 구심점인 대표님이 잘못되면, 상당히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은데…….”

“지금 시비 거는 거요?”

와락 인상을 구긴 김문성이 반문하자, 배지수가 손사래 쳤다.

“시비라뇨, 당치도 않아요. 어디까지나, 진심 어린 걱정이에요.”

“…….”

“이런 제 마음, 느껴지지 않으세요?”

“빌어먹을…….”

김문성이 더 이상 상종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는 듯, 홱 하고 몸을 돌렸다.

천천히 멀어져 가는 김문성의 뒤통수를 향해, 배지수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친다.

집무실 내, 박보군의 귀에까지 들릴 만한 목소리로.

“저는 대표님을 진심으로 응원해요!”

“…….”

“화이팅!!!!!”

이윽고, 김문성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배지수의 표정 또한 원래대로 돌아왔다.

평소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무표정한 얼굴로.

“수사권 조정…….”

작게 중얼거린 배지수가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는.

이내, 총리의 집무실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 * *

“내일이지?”

“그래.”

호식의 물음에 도윤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내일이.

정계의 거물, 한우리당 김문성 대표의 출석기일이었다.

“준비는 어때?”

“완벽이라는 말을 잘 쓰지는 않지만, 오늘은 그 단어를 꼭 쓰고 싶네.”

도윤의 대답에 호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김문성 대표만 넘으면, 드디어 오춘화 회장. 더 나아가 명성그룹이라는 괴물을 무너뜨릴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겠네.”

“그래.”

“축하해. 진심으로.”

이번에는 도윤이 옅게 미소 지었다.

“커리어에 한 획을 그을 일에 앞서, 내가 친구로서 한 가지 주고 싶은 선물이 있는데?”

“선물?”

이어지는 호식의 말에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호식이 옆에 내려놓았던 서류봉투 한 장을 책상에 올려놓으며 말한다.

“열어 봐.”

“……?”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호식이 내려놓은 서류봉투를 바라보던 도윤이.

이내, 그 봉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건……!”

도윤의 두 눈이 큼지막하게 떠졌다.

“명성물산……!”

서류봉투 내용물의 정체.

다름 아닌, 명성물산 인수 서류들이었다.

법인감까지 선명하게 찍힌, 완전한 계약완료 문서.

명성그룹에 있어, 명성물산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하다.

성명병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몸집도 몸집이지만, 그 역사적 의미.

명성물산은, 명성그룹 초창기에 설립된, 모회사 격의 오래된 곳.

당연히, 오춘화 회장에게도 각별히 인식되는 곳이었다.

명성건설의 시멘트와 명성물산의 가죽.

두 가지는, 오춘화 회장이 직접 스스로 일구어 낸, 그를 대표하는 물건들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걸 오춘화 회장이 진짜…….”

“나한테 팔았지. 자기가 뭐 어쩔 거야? 회사 전체를 살리려면 팔 수밖에 없지.”

“…….”

찬찬히 서류를 살피던 도윤이, 특정 부분에 이르러 눈을 화등잔만 하게 크게 떴다.

회사 지분 대부분이, 도윤 앞으로 되어 있었다.

족히 수천억 원의 가치를 가진, 그 어마어마한 지분들이.

“너…….”

“그래도 친구 급이 있는데, 이 정도 선물은 해 줘야겠지?”

“안 돼. 이런 건 못 받아.”

도윤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친구 관계에 있어, 이런 물질적인 무언가가 얽히는 순간, 그 관계는 변질된다.

그 대상이, 가치가 상상조차 되지 않는 회사의 지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

횟수가 늘어날수록, 이런 상황에 대해 무뎌져 간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마침내 극에 달하게 되면…….

‘더 이상, 친구라고 부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겠지.’

친구에게서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도윤이 손에 쥔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가져가. 이거, 나는 받을 수 없어.”

“아 거, 강 프로. 정말, 이렇게 빡빡하게 굴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무엇보다, 이 정도 지분이면, 분명 대부분이 회사 돈일 테잖아? 너희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도,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야! 절반 이상은 내 돈이거든!”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나 되는 돈의 절반을, 호식 스스로 구했다고?

그것도, 오로지 변호사의 일만으로?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아무리 변호사가 돈을 잘 번다지만, 일개 회사를 인수하는 일.

고작 그 돈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인상을 찌푸린 도윤이 무어라 말하려 할 때, 호식이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어, 어.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는데, 일단 사람 말은 끝까지 듣고 시작하자?”

“……?”

짐짓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은 호식이 말을 잇는다.

“투자의 귀재는 너뿐만이 아니란 말이지. 이, 나! 장호식이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이거야!”

말을 마친 호식이 또 다른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아래위로 끊임없이 흔들거리는 새빨간 선.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는 주가 그래프였다.

“내가 얘기했지! 우리 호식이 세 마리 치킨! 대박 칠 거라고!”

“…….”

“1인 1닭, 서민음식의 대표주자, 치느님, 치처님, 치져스 크라이스!”

“…….”

“나도 이제, 억만장자라 이 말씀!”

고개까지 치켜들며 우쭐거리는 호식을, 도윤이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야! 그렇게 불편하면, 갚아! 니가 옛날에 미국에 묻어 둔, 그 SES인가 뭔가, 곧 뜰 거라며? 그 지분 좀 떼 주든가!”

“…….”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호식의 얼굴을 바라봤다.

좋은 놈이다.

자신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남의 기분까지 배려할 줄 아는 멋진 놈.

이래서, 도윤은 호식이 좋았다.

만약 또 다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더라도.

이런 녀석을 만날 수 있을까, 싶었다.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인 도윤이, 이내 입을 열었다.

“친구로서,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엉?”

멍하니 반문하는 호식을 보며, 도윤이 마지막 말을 잇는다.

“그 지분… 가능하면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을 거야.”

“…엥? 뭐야, 너. 설마 배 아파서…….”

도윤의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다.

“진심이다.”

“…….”

이내, 침묵이 두 사람 주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