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좋아해요.
명성그룹 본사 대회의실.
이곳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명성그룹의 임원진들.
오너 일가를 포함한, 이사급 이상 임원들이 모조리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굳은 얼굴로 서 있던 오창원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에게 묻는다.
“회장님은?”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음…….”
오창원이 침음을 삼켰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김문성 대표가, 단순히 오춘화 회장의 써먹기 좋은 말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거의 동등한 입장이나 다름없었지 않은가?
더군다나, 김문성의 구속 이유가, 다름 아닌 자신들과 짜고 친 고스톱 판 때문이었다.
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명성도 예외는 아니다.
아마도, 자신이 아는 놈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조만간 수사를 시작할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했을지도…….’
속으로 중얼거린 오창원이 침중한 얼굴을 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오춘화 회장의 장녀.
오호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거 이러다가 우리 회사 몽땅 날아가 버리는 거 아니야? 그럼 내 백화점이랑 리조트는…….”
“지금 누나 명품질 따위가 문제요!? 회사 전체가 날아가 버리게 생겼는데!”
성미 급한 넷째, 오남규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버럭 고함쳤다.
“뭐? 명품질? 내가 언제 그런 것 걱정했니!? 본사가 무너지면, 아래 계열사들은 도미노처럼 다 무너져 내릴 거 아냐!? 그게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회사 걱정은 무슨… 더 이상, 그 더러운 취미생활 못 하는 게 걱정이겠지.”
“뭐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오호순이 발끈했다.
“팔자 좋아~ 누구는 외식업계 대가리 한번 먹어 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누구는 아들뻘도 안 되는 어린놈들 데리고 다니며, 재미 보고 있으니…….”
“이 새끼가!”
오호순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구한 날, 영계들 데려다 호텔에서 방 잡고 떡이나 치니, 회사 꼴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나?”
평소 오호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오남규가,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다른 임원진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하는 오남규를 보며.
오호순이 마침내, 폭발했다.
“너 이 새끼!”
성큼성큼 오남규에게 다가간 오호순이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때릴 테면 때려 보라는 듯.
오남규는 그런 오호순을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짜아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오남규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그만해! 뭣들 하는 거야!?”
그때서야, 보다 못한 오창원이 중재에 나섰다.
“지금은 저희끼리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회장님이 혹시나, 이 모습을 보신다면…….”
막내, 오상규가 말끝을 흐리자, 멈칫한 두 사람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쾅!
“빌어먹을!”
책상을 강하게 내려친 오남규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칫!”
한참이나 씨근거리던 오호순도, 이내 홱 하고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오창원이 한차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출입문이 활짝 열렸다.
“회장님 도착하셨습니다.”
“……!”
순간 회의실에 모여 있던 임원진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로 했다.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회장님!”
10여 명은 되는 임원진들이, 지금 막 들어서는 오춘화 회장을 향해 고개 숙였다.
“앉아.”
오춘화 회장의 짧은 말에, 임원진들이 자리에 착석했다.
“본격적인 회사 몸집 줄이기에 들어간다.”
“……!”
임원진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씀은…….”
오창원이 조심스럽게 묻자, 오춘화 회장이 말을 잇는다.
“회사 직원들에게, 의무적으로 회사 주식 조금씩, 다 매입하라고 해. 일자리 잃고 싶지 않으면.”
“…….”
분명, 충분히 논란이 될 발언이었지만, 임원진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회장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가장 먼저,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오창원이, 니가 직급별로, 의무적으로 매입해야 할 주식량, 체크해서 사내에 공지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각 임원진들은 분기별 결산보고, 올해부터 어제 자까지 정리해서 모두 나한테 보고해.”
“…….”
“하위 몇 가지 계열사들… 각오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가장 먼저 손볼 테니까.”
“회장님… 혹시나, 노조가 움직이면…….”
한 임원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아까, 내가 말했을 텐데?”
“…….”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차차 대가리 숙일 노조들. 관심 가지지 마. 회사가 있어야, 노조도 있어. 제 놈들도, 선을 넘지는 못하겠지.”
“…….”
“그래도 설쳐 대면, 그래. 용역이라도 쓰면 되겠군.”
“그럼 반발하는 직원들은……?”
이어지는 임원의 물음에 오춘화 회장이 차갑게 눈을 빛냈다.
“잘라. 말 한 마디라도 잘못 놀리는 놈들, 모조리 다.”
* * *
오래간만의 휴식.
침대에 대자로 누운 도윤이, 손에 쥔 물건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주사위…….”
김문성 대표를 체포하고, 손에 넣은 레인보우 주사위.
한동안 시간이 없어 주머니 안에 처박아 뒀는데, 이제야 꺼내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 퀘스트 보상일지도…….”
지금까지 도윤이 받았던 퀘스트들.
모두, 뚜렷한 목표 의식을 바탕으로 생성된 퀘스트들이었다.
도윤의 최종 목표는 명성을 무너뜨리는 것.
사법고시를 패스하는 것도, 김문성 대표를 체포하는 것도.
모두, 이에 대한 수단일 뿐, 목표라 부르기에는 뭣한 것들이었다.
만약, 그 대목표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런 상황에서, 명성이 완전히 무너진다면…….
목표 자체를 잃어버린 도윤에게, 더 이상 퀘스트가 주어지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지금은, 굳이 이게 아니라도, 충분히 명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으니까.”
주사위를 꽈악 하고 움켜쥔 도윤이 그대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 주사위는, 히든카드로 남겨 둘 생각이다.
꼭 필요한 순간에서, 어쩌면 조커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보다, 일단은…….”
시간을 힐긋 확인한 도윤이 몸을 일으켰다.
보윤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슬슬 움직이지 않으면, 늦을지도 몰랐다.
“그 성격에, 지각이라도 했다간…….”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도윤이, 서두르기 시작했다.
* * *
“가고 싶은 곳이라는 게…….”
“맞아요. 여기예요.”
눈앞에 위치한 자그마한 건물을 발견한 도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코끝을 찌르는 향에, 가라앉은 분위기.
이런 종류의 건물은, 하나밖에 없었다.
“분향소(焚香所)……?”
“들어가요.”
“실례지만, 어느 분을 모신…….”
“일단, 가요!”
보윤이 팔짱을 끼고 끌어당기자, 도윤이 엉거주춤 끌려갔다.
20센티미터 이상 키가 작은 보윤이 도윤을 이끌자, 마치 아이가 어른을 이끌고 가는 듯한 모양새였다.
“잠깐, 잠깐만…….”
“여기예요.”
어느 한 부분에 이르러.
이윽고, 보윤이 걸음을 멈췄다.
“성지영……?”
“우리 엄마예요.”
“아……!”
보윤의 대답에, 도윤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 감탄사를 터뜨렸다.
“당신을, 꼭 엄마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었거든요.”
“…예?”
듣기에 따라, 충분히 오해할 만한 말을 보윤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한차례 분을 향해 두 손 모아 고개를 숙인 보윤이 말을 잇는다.
“당신, 우리 엄마랑 상당히 닮았거든요.”
“…….”
“우리 엄마가 살아생전에,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뭔지 아세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도윤을 보며, 생긋 미소 지은 보윤이 말한다.
“소신은 지키고 살자.”
“…….”
“아, 하나 더 있네요.”
손가락을 하나 추켜세운 보윤이 말을 잇는다.
“없어도, 가오는 지키자.”
“…….”
도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제 입으로 부잣집이라 하긴 뭐하지만, 있는 집에 시집와서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분이었어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언론사 회장 아들과, 아무런 비전도 없는 발레리나. 분명, 끝이 정해져 있는 사랑이었죠.”
“…….”
“그렇게 고생만 하시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어요.”
보윤이 도윤을 돌아보며 묻는다.
“제가 아까, 당신과 우리 엄마. 상당히 닮았다고 했었죠?”
“예. 분명히…….”
“분명히 주눅 들 만한 상황에서도, 엄마는 절대 움츠러들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더 어깨 당당히 피고 다녔죠.”
“…….”
“할아버지가 분명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평소에는 몸을 낮췄지만. 자신의 소신에 그른 일만큼은, 절대 지려고 하지 않으셨죠. 그 할아버지에게, 큰 소리까지 칠 정도였으니까요.”
“…박보군 총리님에게… 말입니까?”
도윤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윤은 박보군을 직접 만난 적이 있지 않은가.
일반적인 사람들도, 그 앞에서는 그러지 않으려고 애써도,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시집살이하러 온 며느리는 오죽하겠는가.
“네. 가령… 평생을 매달린, 발레를 욕한다든지, 하면…….”
“…….”
“있는 집에 시집왔다 보니, 사회에서 끗발 좀 날린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맞이했는데, 단 한 번도 먼저 굽히는 법이 없었죠.”
“…….”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저는. 그런 엄마가, 엄청 자랑스러웠었어요.”
말을 잇던 보윤이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멋있는 분이셨네요.”
“네?”
도윤의 말에 보윤이 멍하니 반문했다.
자세를 바로 한 도윤이 말을 잇는다.
“소신을 지킨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마음속에 있는 말 한 마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혼자 끙끙 앓는 사람들이 많이 있죠.”
“…….”
“그런 상황에서 꿋꿋이 제 소신을 지킨다는 것. 그건…….”
잠시 말끝을 흐리던 도윤이 옅게 미소 지었다.
“박 검사님의 어머니, 정말로 멋진 분이셨다는 겁니다.”
“…….”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보윤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보윤의 입가에 완연한 곡선이 그려졌을 때.
도윤이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미소보다.
밝고, 아름다운 미소가 입가에 맺혀 있었다.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도윤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도윤과 두 눈을 똑바로 맞춘 보윤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박 검사님이라고 하시네요.”
“아, 그건…….”
도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요. 그냥 내가, 오빠라고 부르면 되니까.”
“…예? 방금 뭐라고…….”
“아까 그랬죠? 세상에는, 마음속에 있는 말 한마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혼자 끙끙 앓는 사람들이 있다고.”
“예? 아, 예.”
도윤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공감해요.”
“…….”
주저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던 보윤이.
이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윤을 보며, 보윤이 마지막 쐐기를 박는다.
“좋아한다구요,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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