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숨겨진 비극
“젠장, 젠장!!!”
오춘화 회장의 넷째 아들.
오남규는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
원래 명성의 주력은 외식업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작이 자그마한 시멘트 회사.
주력이라 부를 만한 곳은, 명성건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작은 분식집에서 고급 레스토랑까지.
명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오롯이 지금의 외식업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오남규의 노력 때문이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 지금 이 순간.
철저하게 부수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것도,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명성이라는 이름 때문에.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쥐뿔도 없는 걸 다 키워 놓았더니, 그대로 불도저로 밀어 버리는 꼴이군.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내뱉은 오남규가 소파에 털썩, 몸을 묻었다.
넷째라지만, 오남규의 나이도 이미 불혹이라는 마흔을 넘어섰다.
최근의 기력이 젊었을 때만 못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게 다, 새파랗게 어린놈 하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 미칠 노릇이군.”
오남규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분명, 강도윤이라고 했나?”
씹어 내뱉듯 중얼거린 오남규가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나야. 서울중앙지검에 강도윤이라는 놈. 신상내역 뽑아서 나한테 가져와. 가족은 누가 있는지, 집은 어디인지, 출신 학교는 어디인지. 알 수 있는 건 모조리 전부.”
잠시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오남규가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어려운 일이니까 돈 써 가며, 너희 같은 새끼들 굴려 먹는 거 아니야!? 이 개새끼들이……!”
오남규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연신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깊게 심호흡한 오남규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래. 최대한 빨리, 알아보도록.”
이윽고.
통화를 끊은 오남규가 손에 쥐고 있는 휴대전화를 그대로 집어 던졌다.
퍼억!
벽에 부딪힌 휴대전화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똑, 똑, 똑.
“이사님! 성규입니다!”
“…들어와.”
오남규의 말에, 출입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머리를 짧게 자른, 30대 중반의 사내가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고개를 숙였다.
“방금 무슨 소리가 났…….”
“됐어. 별일 아니니까. 무슨 일이야?”
오남규가 손을 휘휘 저으며 물었다.
“그게… 부사장님이 방문을…….”
오남규의 비서, 김성규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누군가 뒤따라 불쑥 들어왔다.
고집스러운 인상이, 마치 오춘화 회장의 젊었을 적 모습을 보는 듯한 중년 사내.
명성그룹의 부사장인, 오창원이었다.
“또 생난리를 피웠나 보구나.”
힐끗, 부수어진 채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에 시선을 던진 오창원이 말했다.
“형님은 신경 끄쇼. 쓰라는 회사에는 신경도 안 쓰더니…….”
오창원의 검미가 꿈틀했다.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했길래, 회사가 이 모양 이 꼴까지 온 건지. 차라리 그 자리, 날 주지 그랬소? 그랬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그만.”
오창원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만해라. 화가 나는 건, 너만이 아니다.”
“하, 뭐 낀 놈이 뭐 한다더니…….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요?”
“…….”
“오늘 아침 회사 주가 확인해 봤소? 무려 20퍼센트요! 김문성이 구속된 것만으로, 눈치 빠른 개미들이 모조리 발을 뺐단 말이요!”
“그래서… 아버지가 조치를 취했지 않느냐?”
“뭐? 직원들한테 주식을 강매하는 그 병신 같은 짓거리?”
오남규가 버럭 고함쳤다.
“그따위 방법은, 임시방편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형님도 잘 알고 있지 않소!?”
“…….”
“회사 몸집 줄이기는? 병원에 물산은 이미 넘어갔고, 이제는 뭘 더 줄 생각이지? 내 외식업을 줄까? 아니면, 누이의 호텔이나 리조트를 통째로 가져다 바칠까? 아주 집안 주춧돌까지 다 가져다 팔아 버리면, 참 볼만하겠소!”
“그래서… 대체 이 상황에서 내가, 어찌해야 한다는 거냐?”
오창원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치 절규하듯 마주 고함쳤다.
눈을 서늘하게 빛낸 오남규가 말한다.
“간단합니다.”
“간단하다니, 무슨…….”
“형님도 이제, 회장 한번 해 봐야지.”
“……!”
오창원이 눈을 크게 떴다.
“물론, 형님 자리는 내가 가지고. 옆에서 서포트하는 방식으로.”
“너, 설마…….”
오창원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오창원을 바라보며, 오남규가 묻는다.
“이 상황에서,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방법. 이것 말고 또 있소?”
“하지만, 아버지는!”
“그래. 늙었지. 그래서 더더욱,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오.”
“…….”
오창원이 입을 다물었다.
“책임 있는 자의 사퇴만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단 말이오! 형님, 아직도 모르겠소? 그렇기 때문에, 박건우도 그 지랄을 했던 것 아니요!?”
“하…….”
오창원이 지친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남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물론, 지금 당장 아버지를 물러나게 하자는 건 아니요. 아버지가 준비한 것들이,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다 줄 수 있을 테니까.”
“…….”
“그사이에, 우리도 해 볼 수 있는 걸 해 봐야지. 뭐, 결국에는 달라질 건 없겠지만…….”
오남규가 말끝을 흐리며, 오창원의 두 눈을 바라본다.
“우선, ‘그것’부터 준비하시오, 형님.”
“그것이라니……?”
“슈퍼 주총데이.”
“아……!”
오창원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슈퍼 주총데이.
주주총회에서 소액주주들이 참석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주총 꼼수를 말했다.
“일단은, 푼돈 가진 개미들이 몰려드는 건 막아야지.”
“…….”
“어려울 땐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소? 뭐, 굳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오성에서 알아서 나서서 하겠지만…….”
“…….”
“그저 편승만 하면 되지만, 최소한의 준비는 해 둬야지. 이번에 사건이 있었던 만큼, 아마 언론에서도 이쪽만 주시하고 있을 확률도 높고 말이요.”
한차례 머리를 쓸어 올린 오남규가 말을 잇는다.
“그리고… 계좌에 묻어 둔 돈들, 조금씩 빼내어 따로 보관해야 할 거요. 검찰에서 수사가 시작되면, 외국에 묻어 둔 차명까지 탈탈 털어 갈 테니까.”
“…….”
“이건 어디까지나 보험이요. 일단 형님은 회사 내부적인 일에 더 신경 써 주시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너, 대체 무슨 생각을…….”
오창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일단은… 지켜보시오.”
말을 마친 오남규의 두 눈빛은,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호식의 변호사 사무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호식이 휴대전화를 내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명성그룹에서 본격적인 몸집 줄이기에 들어갔어.”
“음…….”
도윤이 낮은 침음을 삼켰다.
“이 상태라면, 아마 빠른 시일 내에 계열사 몇 개가 사라질 거야.”
잠시 고민하던 도윤이 묻는다.
“우리가 가진 명성의 지분. 얼마나 되지?”
“적진 않지. 금액으로 따지면, 족히 수백 억은 되니까. 주총에서도 머리 빳빳하게 세울 수 있을걸?”
“글쎄…….”
도윤이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끝의 끝까지 내몰린 짐승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그 짐승이 생쥐 따위가 아닌, 포악한 육식 동물이라면…….
명성이라는 괴물은, 결코 혼자만 무너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도윤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지켜보자.”
“…응? 왜?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으라고, 한 번에 휘몰아치는 게 낫지 않아?”
“그 생각을, 저쪽에서도 하고 있다는 게 문제지.”
“음……?”
호식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를 인지하고 있지 않다면 모를까, 나야 말할 것도 없고… 너도 마찬가지.”
“…….”
“명성물산을 인수하면서, 너도 충분히 저쪽에서 주의하고 있을 거야. 이 상황에서 우리가 움직여 봐야, 할 수 있는 게 몇 가지 없어.”
“돈으로는, 말이지?”
의미심장한 호식의 물음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돈으로는 그렇지.”
“…….”
“우린 법을 배운 검사랑 변호사잖아? 물 들어왔을 때 노 젓는 건, 이걸로 하면 충분해.”
말을 마친 도윤이 상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세련된 느낌의 올 블랙 만년필이었다.
호식이 씨익 미소 지었다.
“검사는, 펜대로 승부한다?”
“이것도 있지.”
도윤이 제 입을 가리키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호식이 도윤을 바라보며 묻는다.
“수사는 언제 시작할 생각인데?”
“김문성 대표 건 마무리되는 대로, 여죄 딸 거야. 증거는 충분하니, 입건이야 문제도 아니지.”
“여죄 수사 형식으로 하겠다라… 파이(규모)를 키우려면, 뚝 떼어 내서 단독으로 처리하는 방식도 좋지만. 뭐, 주가 되는 죄의 파이가 워낙 크니까.”
“…….”
“야당의 대표와 재벌총수를 한 번에 골로 보낸다… 이번 일, 제대로 끝나면 너, 초스타 검사가 되겠는데?”
호식이 부러운 눈빛으로 도윤을 바라봤다.
“그런 것, 바라지도 않아.”
도윤이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야! 그렇게 반응할 게 아니라니까? 신임이나 다름없는 니가, 이 정도 일을 처리해 봐. 검찰총장이 문제겠냐? 그 뭐냐, 모레시계 검사님만 봐도 알겠네.”
“…….”
“나중에, 니가 대권을 노려볼 수도 있겠고 말이야.”
“…니 꿈을 나한테 주입시키지 마.”
“아 왜, 친구 덕 좀 보자. 친구 좋다는 게 뭐냐?”
호식이 사람 좋은 미소로 성큼 다가왔다.
“우리 같은 법조인 출신 대통령들, 생각보다 엄청 많다니까? 군인 출신들도 다 하는 판국에…….”
“대통령은 아무나 하나?”
도윤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야, 아무튼, 나중에 잘되면 나 모른 척하기 없기다? 스타, 강 검사님?”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 하는 거 봐서.”
“야!”
빽 하고 고함치는 호식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 * *
오남규의 개인 집무실.
책상에 앉은 오남규가 서류 몇 장을 손에 쥔 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큭, 큭큭큭큭, 크크크크크크크.”
오남규가, 낮고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야말로,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던 오남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야? 그 연놈들 자식이었어?”
오남규의 한쪽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설마하니.
눈엣가시 같은 놈이, 자신의 과거 흔적 중 하나일 줄이야.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 너라면 나한테 도전장을 내밀 수 있지. 암, 내밀 수 있고말고.”
오남규가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든 오남규가 말을 잇는다.
“나야. 한 가지 더 알아봐.”
이름이나 시기상으로 거의 확실해 보였지만, 한 번 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인 오남규가 한층 짙어진 미소로 말을 잇는다.
“그놈 죽은 부모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 그래.”
통화를 마친 오남규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예상이 맞다면…….”
음침한 미소를 지은 오남규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집무실 내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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