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금보
“저는 국민들의 열망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수천 검사들의 수장으로서, 정계와 재계 간의 정경유착을 끊어내고, 국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검찰총장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짝, 짝, 짝, 짝, 짝.
새로운 검찰총장인 정승만의 인사를 끝으로, 취임식이 모두 끝이 났다.
도윤이 입가에 미소를 문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순간, 누군가 옆에서 자신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찔렀다.
“……?”
도윤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윤이 옅게 미소 지은 채, 그곳에 서 있었다.
“오늘 뭐 하세요, 강 검사님?”
보윤의 물음에 도윤이 픽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변호사 사무실에 잠깐 들러야 할 것 같습니다만…….”
보윤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변호사 사무실? 이런 날, 일을 하신다구요?”
“뭐, 박 검사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워낙 성실하니까요.”
“…….”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보던 보윤이, 바람이 날 정도로 홱 하고 몸을 돌렸다.
“지 필요할 때만 찾고…….”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린 보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삐진 건가?’
처음 보는 보윤의 모습에, 도윤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 다가간 도윤이,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뭐, 뭐……?”
예상치 못한 도윤의 행동에 보윤이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귀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보윤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보윤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댄 도윤이 작게 소곤거린다.
“저녁에… 봐.”
“……!”
보윤이 눈을 크게 떴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보윤에게서 떨어진 도윤이 씨익 미소 지었다.
“나중에 뵙죠, 박 검사님.”
“…….”
보윤이 멍하니 도윤을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
보윤은 사내 비밀 연애라는 것이 참 스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저리도 능청스러운 모습이라니…….
사랑이라는 단어와는 상당히 멀 것이라 생각했던 보윤의 가슴이, 아직도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이윽고, 보윤이 도윤을 마주 바라보며 말한다.
“그렇게 예고 없이 훅 들어오면…….”
보윤이 생긋 미소 지으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죽어.”
움찔, 몸을 떤 도윤이 조용히 몸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으니까.
“나중에 연락할게!”
도윤이 후다닥, 취임사 장소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도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보윤의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 * *
취임사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를 빠져나온 도윤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이어, 휴대 전화를 꺼내든 도윤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나야. 어떻게 됐어?”
도윤의 물음에 수화기 너머로, 호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한테서 오케이 사인 떨어졌어. 자금은 충분하고, 언론에 터뜨리는 순간 바닥을 치는 주식들을 우리가 쓸어 담기만 하면 돼.”
“좋아.”
도윤이 옅게 미소 지었다.
“김문성 대표 진술 녹음 파일은? 영준이 형한테 넘겨줬어?”
“아니. 동시보도 방식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거, 알잖아? 워낙 대국민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건인 만큼, 형평성을 생각해서 일괄적으로 정보를 제공해야 해.”
“음… 그거, 영준이 형은 알고 있어?”
“아니.”
도윤의 말에 수화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그 형 실망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걱정하지 마. 방법이 있으니까.”
“방법?”
호식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반문했다.
“배 기자님이 추측성 기사를 먼저 내보내면 돼. ‘명성그룹, 김문성 대표 로비 청탁 의혹. 민수성 대표 통장 사기극을 포함한, 거액의 뇌물수수까지 관계된 것으로 보여…….’ 정도로.”
“하지만 추측성 기사는…….”
호식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언론사에서 함부로 추측성 기사를 내보내지 않는 이유.
당연히, 매우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보도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면.
역으로, 언론사가 명예훼손죄 등으로 고소당할 수 있었으니까.
“무슨 걱정이야?”
“…응?”
“녹음 파일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잖아.”
“아……!”
도윤의 말에 호식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국민들은 더욱더 분노할 테고. 기사를 미리 내보낸 배 기자님은 물론…….”
“영웅이 될 거다?”
도윤이 씨익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가 되면, 추측성 기사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지. 추측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 배 기자님은 명탐정으로 각광받게 될 테니까.”
“법조계와 언론계의 영웅을 둘이나 옆에 두겠네. 난 뭐 없냐?”
“응. 없어.”
“…….”
도윤의 단호한 대답에 호식이 입을 다물었다.
“인정머리 없는 놈…….”
호식의 작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순간.
한차례 피식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정말로, 마지막이야. 총책임자나 다름없는 오춘화 회장이 구속되는 순간, 구심점을 잃은 명성그룹은 완전히 무너질 거야.”
호식이 회의적인 목소리로 반문한다.
“그런데… 회장이 구속된다고, 과연 명성이 무너질까?”
“이미 몇 번의 홍역을 겪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명성이야. 지금 상황에서, 그 정도 타격이라면 아무리 명성이라도 절대 회복할 수 없어.”
“하기야, 주력 회사들은 우리가 모조리 인수 합병할 예정이니까.”
말을 마친 호식이 무언가 고민에 잠겼는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호식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약에… 이번에 명성그룹 계열사들 인수가 정상적으로 마무리되면, 우리가 회사를 만들어 상장시키는 게 어때?”
“뭐……?”
생각지도 못한 호식의 말에, 도윤이 멍하니 반문했다.
“아니… 언젠가, 니가 나한테 말했잖아. 검사가 된 이유는, 명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고.”
“…….”
“물론, 대한민국 검사라는 타이틀이 아쉽긴 하지만… 목표를 이루고 나면, 그것도 허무해지지 않을까, 해서.”
“…….”
“어디까지나 1년 동안 하던 일까지 다 내팽개치고, 조폭들 만나고 다니던 니 모습이 떠올라서 하는 말이야. 딱히, 검사직에 큰 욕심이 없는 것 같아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도윤의 귀에, 연이어 호식의 목소리가 들린다.
“니가 회장하고, 내가 대표이사 겸 기업 변호사하고. 법에 대해 빠삭한 전문가들이 두 명이나 임원으로 있으면, 든든할 것 같은데?”
“…….”
도윤의 귀에, 호식의 뒷말은 더 들어오지 않았다.
호식의 말대로, 도윤은 명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검사가 되었다.
만약, 그런 명성이 무너진다면?
세상의 정의를 바로잡겠다는 거창한 목표의식 따위는 없었다.
목표는 단 하나.
현재와 미래의 악연.
그 악연의 고리를 끊어 내고 싶을 뿐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자신이, 과연 검사를 계속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뭐, 반농담이니까 너무 진지하게 듣지는 말고.”
이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윤이 정신을 차렸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대답한다.
“농담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사실은, 니가 회장님 하고 싶은 것 아냐?”
“하이고. 그랬으면 이 머리 굴려서 우리 회사를 먹으려고 했겠지. 퍽이나.”
호식이 별 시답잖은 소리라는 듯 대꾸했다.
“일단 마무리해야 하니까 끊고, 취임식 마쳤으면 바로 내 사무실로 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알았어.”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도윤이 이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하아…….”
마음이 복잡해졌다.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차를 대놓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도윤이 자신의 승용차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순간.
부와아아아아앙!
거친 엔진 소리와 함께.
새까만 승용차가 도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도윤의 몸이 부웅 하고 떠올랐다.
털썩.
“…컥!”
그대로 바닥에 처박힌 도윤이,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차에 부딪히는 사고는, 이래서 무서웠다.
차체에 신체를 충격당하는 1차 피해보다.
튕겨 날아가 다른 곳에 충격 당할 때의 2차 피해가 훨씬 더 심각했으니까.
멈춰 선 새까만 승용차 안에서, 너댓 명이나 되는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 도윤이 눈을 제대로 추켜 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저, 사내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만이 귀청을 때릴 뿐.
“맞지? 얼굴 제대로 확인했으면, 빨리빨리 옮겨. 사장님 기다리시니까.”
“와, 형님. 그런데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 사람. 지금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뭐, 어쩌라고! 우리는 돈만… 받… 빨리……!”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들려왔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조차 드문드문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내들에 의해, 자신의 몸이 번쩍 하고 들어 올려졌을 때.
‘빌… 어먹을…….’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도윤이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 * *
강남에 위치한 초고층 고급 아파트.
서울 도심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선 사내.
명성그룹의 넷째, 오남규가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크으~ 좋군.”
오남규는 이 생활이 아주 좋았다.
제집 다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출가하여 자신만의 생활을 즐기는 것.
가족 따위도 필요 없었다.
벌써 갈아 치운 마누라만 4명.
오남규에게 ‘처’라는 존재는 욕정의 배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그따위 처, 필요하지도 않았다.
돈만 쥐어 주면 자신 앞에 스스로 가랑이 벌릴 여자가 산더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우우웅, 우우웅.
조용히 울리기 시작하는 진동 소리에 오남규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오남규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야.”
“사장님, 성공했습니다.”
한차례 멈칫한 오남규가 잠시 후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그래?”
“예. 출혈이 심한 상태긴 하지만, 호흡으로 봤을 때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좋군.”
오남규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귀한 손님이니까, 정중히 모셔 오도록.”
“알겠습니다.”
이윽고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오남규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큭. 정말로, 재미있단 말이지.”
오남규가 천천히, 책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저벅.
곧바로 의자에 몸을 묻은 오남규가 힐끗, 책상 위에 올려놓은 서류더미를 바라본다.
“똑같은 짓을, 제 부모에게까지 하게 될 줄은,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끝을 흐리는 오남규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리 예상된다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겠지. 인생은 이래서, 재미있는 것이니까.”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오남규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곧 보자고, 국민들의 대영웅.”
이내 오남규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만이 방 내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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