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잡는 회귀검사-171화 (171/174)

171화 끝을 향해서

삐- 삐- 삐-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기계음 소리에.

코끝을 찌르는 프로포폴 냄새 사이로.

보윤이 울상을 지은 채, 침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고 죽은 듯 누워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강도윤…….”

보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병실 한쪽에 위치한 TV에서는, 작은 볼륨의 TV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제 저녁, 서울중앙지검 소속 현직 검사가 납치를 당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신원 확인 결과, 명성그룹 사건을 맡고 있는 강도윤 검사로 밝혀졌으며, 저희 MBS는 단독으로…….>

<주모자는 명성그룹의 대표이사, 오남규 씨로 밝혀졌으며, 고의로 교통사고를 야기한 후, 의식을 잃은 강도윤 검사를 실어 나르는 방식으로…….>

<검찰은 지극히 악의적인 보복적 행위라고 보고,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불법감금 및 납치 혐의로, 오남규 씨를 상대로 구속 영장을 청구한 후, 수사를 진행할 예정이며, 명성그룹 사건 또한 주 담당 검사를 변경하여 차질 없이 수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연일, 언론에서는 이번 사건과 관련된 보도들을 쏟아 내었다.

“모든 게 다 당신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고 있는데…….”

보윤이 서글픈 미소로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불쌍하고 미련한 사람.

누군가 떡이라도 주는 것도 아닌데.

제 몸까지 던져 가며, 제 소신을 다하려는 사람.

그런 도윤이, 보윤은 정말로…….

“좋아해요.”

보윤의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요.”

누운 도윤의 뺨을 쓰다듬는 보윤의 손길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마치, 부수어지기 직전의 물건을 만지듯.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제야 사랑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끝은 결국, 이런 식이었다.

이윽고, 도윤의 뺨에서 손을 떼어 낸 보윤이 차갑게 눈을 빛냈다.

“당신의 목표… 내가 대신 이루어 줄게요.”

대답 없는 병실 속.

보윤이 재차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한 가지만 약속해요. 꼭, 일어나서 내 앞에 다시 서겠다고.”

보윤은 도윤이 진실로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호식에게 전해 받은 서류들.

같은 검사로서, 기존에 수사된 내용들만 봐도, 해당 사건의 검사가 얼마나 품을 들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점에 있어 도윤이 수년 동안 명성그룹을 상대로 수사한 내용들은…….

명성그룹 오너 일가의 기본적인 가족 관계부터 찾기 힘든 일가족의 해외 차명 계좌에, 탈세를 위한 유령회사 따위의 은밀한 부분, 심지어 정치적 로비 관계 구도와 같은 부분까지 수년 동안 하나하나 품을 들여 완벽하게 정리해 놓았다.

고작 서류 몇 장만으로도 빠져나갈 틈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도윤의 치밀한 성격이 엿보였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같은 검사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사실도 있다.

이 정도나 되는 분량의 내용을 홀로 수사하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정도나 되는 거물을 상대하면서, 얼마나 많은 외압을 홀로 견뎌 냈을까?

“만약에… 약속, 안 지키면…….”

보윤이 이내, 울음기 가득 섞인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잇는다.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 * *

호식의 변호사 사무실.

그곳 출입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어떻게 됐어요!?”

얼굴이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린 배영준이 사무실 내로 들어섰다.

취재차 지방으로 출장을 가 있다가, 소식을 듣고 지금 막 서울로 돌아온 참이었다.

“…….”

사무실 내부에는 단 세 사람뿐이었지만, 이미 초상집 분위기였다.

호식과 익히 안면이 있는 박판섭, 그리고…….

배영준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총장님?”

배영준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승만이 시선을 돌렸다.

“누구……?”

“아, NBS 기자님입니다. 저희를 많이 도와주시는 분이시죠.”

“아……!”

자리에서 일어난 정승만이 손을 내밀었다.

“정승만이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총장님. 배영준이라고 합니다.”

배영준이 정승만의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저, 그런데 강 검사님은……?”

배영준의 물음에, 정승만의 표정이 살짝 굳어진다.

“아, 그건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재빨리 중간에 끼어든 호식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내, 모든 설명을 들은 배영준이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그런……!”

“그나마 다행이죠. 조금만 늦었어도 도윤이 얼굴, 이제 못 볼 뻔했으니까.”

말을 잇던 호식이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박 사장님이 아니었으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을 거예요.”

호식의 말에 가만히 서 있던 박판섭이 고개를 저었다.

“저야 뭐… 영감님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니까요.”

“도윤이가요?”

호식이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고개를 끄덕인 박판섭이 말을 잇는다.

“사고 당일, 제 밑에 있는 애들… 아니, 직원들 몇 명을, 자신에게 미행 붙여 달라고 하더군요. 느낌이 좋지 않다고…….”

“그런…….”

“미행은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포폰에 미리 GPS를 장착시키는 방법으로 개조하여, 영감님 손에…….”

말을 잇던 박판섭이 멈칫했다.

이 자리에 누가 있는지, 그제야 자각한 탓이다.

눈치 빠른 정승만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사래 쳤다.

“범죄 이용 목적도 아니고, 수사를 위한 대포폰이라면 얼마든지. 계속하시죠.”

시원스런 정승만의 대답에 박판섭이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쫓고 쫓은 곳이 서울 외곽에 위치한 명성그룹의 별장. 출혈이 심한 영감님을 그 별장 안으로 들이는 모습을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저희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죠.”

“설마… 그것도, 도윤이 생각인가요?”

호식의 반문에, 배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더 올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다렸죠. 물론… 1시간이 조금 지나자 정말로, 일단의 무리가 그곳에 도착을 했던 거구요.”

“…….”

“지금은 이렇게 쉽게 말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당장 영감님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1시간이나 넘는 시간을 손가락 빨면서 기다려야 된다는 사실이… 참기 힘들었거든요.”

호식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이를… 믿었군요?”

“예. 단 한 번도,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요.”

박판섭이 신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그 이후에 상황은 역시……?”

배영준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박판섭이 말을 잇는다.

“난장판이었습니다. 영감님은, 피투성이가 된 채 꽁꽁 묶여 있고, 그리 넓지 않은 지하실에 십수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죠.”

“…….”

“당장이라도 들어가 모조리 엎고 싶었지만, 일단 준비한 사진기로 증거부터 모두 남겨 뒀습니다. 그다음에는…….”

“엎었다?”

호식의 말에 배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다 죽여 버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영감님이 바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적당히 문제 되지 않는 선에서, 모두 제압했죠.”

정승만이 중간에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신원 확인 결과, 피라미들을 제외하고 눈여겨볼 만한 인물은 사건 주동자인 오남규와 오창원, 각각 명성그룹의 대표 이사와 부회장을 맡고 있는 거물이네.”

“오창원 부회장까지요?”

배영준의 눈빛 사이로 ‘경악’이라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정승만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정확한 건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그 자리에 있었단 사실만으로도, 오창원 부회장까지 무리 없이 엮어 넣을 수 있을 거야.”

“그게… 가능할까요? 오남규라면 모르겠지만. 만약, 오창원 부회장이 정말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빠져나올 텐데…….”

배영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정승만이 차갑게 눈을 빛냈다.

“불가능하다면,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그게 바로 우리 검사들이 하는 일이니까.”

“…….”

“펜대가 얼마나 무서운 무기인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주겠네.”

정승만의 스산한 목소리가 주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명성그룹 본사, 회장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오춘화 회장이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으으으으으으을!!!!!!”

한참이나 고함치던 오춘화 회장이 가삐 숨을 몰아쉬었다.

끝이었다.

자식도.

그토록 힘들게 이루어 놓았던 명성도.

그리고, 마지막 남은 자신의 인생까지.

사건의 전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 하나.

명성그룹에 관한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담당 검사를 명성그룹의 사람, 그것도 오너 일가 중 한 사람이 해당 검사를 살해하려 했단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게임은 이미 끝났다.

뿌려 놓은 모든 씨앗들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

법원장 및 법조계 인사들.

각 정계 인사들.

하다못해…….

오춘화 회장이 테이블 위에 수없이 많이 쌓여 있는 종이 봉투들을 바라보며,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언론에서 이번 사건을 터뜨린 순간,

명성그룹 내 직원들이 모조리 사직서를 제출했다.

침몰하는 배에 같이 승선하고 있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리라.

“후회할 것이다…….”

오춘화 회장이 차갑게 눈을 빛냈다.

이미 끝난 인생이지만.

혼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가는 길, 길동무 하나는 데리고 갈 것이다.

자신은, 명성그룹의 지고한 오너,

오춘화였으니까.

휴대전화를 꺼내 든 오춘화 회장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내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그 새끼가 입원한 병원. 어디라고 했지?”

오춘화 회장이 한껏 무게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수화기를 들고 있던 오춘화 회장이 말을 잇는다.

“죽여. 반드시 죽여. 심장이 멈추는 걸,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하, 하지만 아버지…….”

수화기 너머, 오춘화 회장의 장녀, 오호순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내 마지막 명이다. 지금껏, 니가 내 회사를 가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것들과 떡을 쳐도, 온갖 명품들로 떡칠을 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 그건……!”

“혹시, 남은 회사들로 혼자만 떵떵거리며 살려던 생각은 아니었겠지? 내가 구속되고, 명성이 무너지면. 니가 가진 호텔이나 리조트는 무사할 것 같나?”

“알, 알았어요. 아버…….”

수화기로 오호순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벌컥, 하고 회장실 출입문이 열렸다.

“……!”

“저, 저기! 여기서 이러시면…….”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비서들 사이로,

굳은 표정의 보윤이 천천히 이곳, 명성그룹 회장실 내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뒤로는,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검찰 직원들도 함께였다.

“오춘화 씨.”

마침내, 입을 연 보윤이 손에 쥔 종이 한 장을 위로 들어 올렸다.

상단에 ‘체포 영장’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종이.

“당신을 살인교사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기타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추악한 범죄들을 저지른 혐의로…….”

보윤이 오춘화 회장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잇는다.

“체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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