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누구도 넘보지 못할 그 자리
어두컴컴한 방.
홀로 켜진 TV에서는 끊임없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 오후, 명성그룹 오춘화 회장의 구속영장이 정식으로 발부되었습니다. 검찰은 현직검사 살인교사 및 수천억대 뇌물공여죄 등을 집중적으로 수사할 방침이며, 관련자들 또한 빠짐없이 엄벌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사진들의 오랜 회의 끝에, 명성그룹은 공식적인 해체 수순을 밟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수십 년간 이 땅에 뿌리를 내려, 한때 재계 10위권까지 치고 올라갔던 굴지의 대기업, 명성그룹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춘화 회장의 장녀, 오호순 이사는 어제 저녁, 해외로 출국한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본인 명의의 부동산들까지 모두 매각한 것으로 봤을 때, 국내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보이며…….>
<회사 채무관계 등 뒷마무리는, 오너 일가의 막내 오상규 씨가 책임지고 처리하겠다는 그룹 측 발표가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번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오너들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국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한다는…….>
스피커를 타고, 계속해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때.
타악!
짧은 소음과 함께, 방 내부가 환하게 밝혀졌다.
그리고, 한 중년 사내가 천천히 방 내부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목재 책상 위.
그곳에 놓여 있는, 수려한 필체로 음각된 명패.
지금 막 들어선 중년 사내가 비뚤게 놓여 있던 그 명패를 바로 하자, 마침내 그 글자가 드러난다.
검찰총장 정승만.
감회가 새로운 눈으로 그 명패를 바라보던 중년 사내, 정승만이 쓰게 미소 지었다.
“제 부하 하나 제대로 못 지키는 놈이, 검찰총장은 무슨…….”
한숨을 내쉰 정승만이 자리에 앉자.
똑, 똑, 똑.
기다렸다는 듯, 출입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벌컥.
출입문이 열리며, 검찰총장실 안으로 들어서는 여성.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보윤이었다.
그런 보윤을 바라보며, 정승만이 말한다.
“초췌해 보이는구나.”
“괜찮습니다.”
“고생했다.”
“…….”
“일단, 앉거라.”
정승만의 말에 보윤이 자리에 앉았다.
잠시간의 침묵 이후.
정승만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략 예상은 되지만… 오춘화 회장은 지금, 어쩌고 있지?”
“그룹 내 법무팀을 모조리 소집하겠다더군요. 필요하다면, 변호사 수십 명도 선임할 생각이라고.”
“…역시, 정신 못 차리셨군. 그러셔야 우리 회장님이지.”
정승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구형(求刑)은? 얼마나 때릴 생각이야? 오 회장 나이가 일흔을 훌쩍 넘겼으니, 15년에서 20년 정도만 때려도 콩밥만 먹다가 관 속에 들어갈 것 같은데…….”
“무기징역을 구형할까 합니다.”
“무기징역!?”
순간 정승만이 눈을 크게 떴다.
검사의 구형은 말 그대로, 재판관에게 형(刑)을 구하는 것.
검사의 의견일 뿐이기 때문에, 재판관은 검사의 구형을 참고만 할 뿐이지만.
터무니없는 구형은, 검찰 내부에서도 금기시하고 있었다.
법원과 검찰 사이에는 드러나지 않는 묘한 경쟁 관계가 있었다.
과한 구형은 도리어 법원의 반발심을 살 뿐이며.
턱없이 낮은 구형은, 법원의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결국, 판결을 내리는 것은 재판관이었기 때문에, 검사는 적당한 수준에서 구형을 하곤 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전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 스스로 기만당했다고 판단한 경우.
이 경우에는 법조계 인사들 대부분이 한마음, 한뜻이 된다.
특정 권력자의 기만행위를, 검찰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법계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여론조차 완전히 돌아선 상황.
국민들은 오히려 ‘왜 저런 놈을 사형시키지 않느냐.’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정승만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잇는다.
“…생각해 보니, 무기징역도 약과군.”
“…….”
“구속만은 피하려 했던 저쪽의 1차 목표가 저지당했으니, 이번에는 ‘그걸’ 노리겠군.”
정승만의 말에 보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집행유예로 빠져나오려 하겠지요. 지금까지 사회에 공헌한 헌신도라든가, 고령의 나이를 들먹이면서요. 물론, 휠체어 같은 준비물도 가지고 나올 것이고.”
보윤의 말에 정승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잘 알고 있군. 그래서, 대비책은 있나? 늙은 여우가 연기를 시작하면, 그 파급력이 만만치 않을 텐데?”
“이걸 언론에 터뜨릴 겁니다.”
“그건……?”
정승만이 보윤의 손에 쥐어진 둥그런 물체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CD?”
“도윤… 아니, 강도윤 검사가 남긴 거예요.”
아릿하게 조여 오는 가슴을 가까스로 견뎌 낸 보윤이 대답했다.
“도윤이가? 그렇다면…….”
“박건우 부사장의 자백.”
“……!”
정승만이 눈을 크게 떴다.
보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자신이 한 모든 행동이 오춘화 회장의 오더였다는 것. 더불어, 그 외에 밝혀지지 않은 비리까지, 모두 이 안에 들어 있어요.”
“박건우가 설마 그런 것까지……?”
“강 검사가 이걸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써먹기 위해서겠죠. 조커 같은…….”
이어지는 보윤의 말에, 정승만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놈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놈의 도움을 받는군. 바보 같은 놈. 제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하는 놈이…….”
“…….”
보윤이 입을 다물었다.
“차도는 있나?”
정승만의 물음에 보윤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후우…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나도 병실에 조금 붙어 있어야겠군. 그때, 웃는 낯으로 병문안 가기 위해서는, 역시…….”
정승만이 말끝을 흐리자, 보윤이 차갑게 눈을 빛냈다.
“모조리 잡아넣어야지요. 남 피눈물 짜내어 쌓아 놓은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 제가 철저하게 부숴 놓을 거예요. 그리고…….”
보윤이 손에 쥔 CD를 바라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토사구팽에 실패한 사냥개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번 기회에 오 회장에게 똑똑히 보여 줄 겁니다.”
* * *
KS그룹 회장실.
똑, 똑.
굳은 얼굴로 신문을 들여다보던 장학수 회장이 고개를 들었다.
“들어…….”
벌컥.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열리는 출입문을 보며, 장학수 회장이 입을 다물었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있나 보구나.”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회장실 내부로 들어서는 자신의 아들, 호식을 바라보며 장학수 회장이 말했다.
“드릴 말씀이… 끅.”
“…일단 숨 좀 돌려라. 눈앞에서 자식이 먼저 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스읍. 하아~”
장학수 회장의 말에, 호식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한 호식이 장학수 회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딜을 하나 제안하러 왔습니다.”
“딜?”
장학수가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마도, 아버지도 충분히 만족하실 만한 딜일 겁니다.”
장학수의 눈빛 사이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니가 그런 말을 하니, 조금 기대는 되는구나.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건?”
“…….”
말없이 장학수의 두 눈을 바라보던 호식이, 천천히 말을 잇는다.
“명성그룹. 우리 회사가 인수했으면 합니다.”
“명성그룹을……? 설마…….”
“예. 제가 가지고 싶습니다. 명성그룹.”
“……!”
장학수가 눈을 크게 떴다.
“침몰하는 난파선인 지금의 명성그룹이라면, 우리 회사에서도 큰 부담 없이 인수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유독 명성에 집착을 하는구나, 너는.”
“…….”
이어지는 장학수의 말에 호식이 입을 다물었다.
“회장 자리가 욕심난다면, 차라리 이 자리를 노려보지 그러냐? 오히려 그편이…….”
장학수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호식이 고개를 저었다.
“명성이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
이번에는 장학수가 입을 다물었다.
한참이나 호식의 두 눈을 들여다보던 장학수가 천천히 말한다.
“…어차피, 이유를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테고, 기업인인 나야, 손해 보는 장사만 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
“아무리 침몰해 가는 난파선이라지만, 그 배가 타이타닉호보다 더 큰 초호화 여객선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최소 수천억 원은 드는 인수비용, 니가 나한테 제시할 조건은 뭐지?”
“…….”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호식을 보며, 장학수가 말을 잇는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내 자식이라도 돈 계산은 확실히 할 거다. 투자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면…….”
“4,000억 달러.”
“…뭐라?”
장학수가 멍하니 반문했다.
“최소 4,000억 달러. 한화로 약 400조 이상. 앞으로 10년 안에 그 정도 가치를 지닌 회사로 성장할, 그곳의 일정 지분을 드리겠습니다.”
“……!”
장학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4,000억 달러?
제정신인가?
국내로 한정하면 1,00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곳은 단 한 곳.
그 외에는 여러 내로라하는 기업들조차, 시가총액 1,000억 달러 선은 돌파해 낼 수 없었다.
그런데 4,000억 달러라니.
장학수가 표정을 굳히며 말한다.
“장난이나 치려고 온 거라면…….”
“장난이 아닙니다.”
호식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그 정도 가치를 지닌 곳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아버지의 오랜 숙원. 받들겠습니다.”
순간 장학수가 눈을 빛냈다.
“그 말은…….”
“군말 없이 본가로 들어오겠습니다.”
“흠…….”
장학수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아들이라는 점을 제외하고서라도.
장학수가 본 장호식이라는 놈은, 그 정도 가치는 충분히 있었으니까.
오랫동안 호식을 지켜봐 온 장학수는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놈의 잠재력이라면, 회사를 더욱더 비상시킬 수 있으리란 것을.
상념에서 벗어난 장학수가 묻는다.
“투자 업종이나 들어 보지.”
“…….”
이 부분에서는 호식도 멈칫했다.
사실 호식도 이 분야에 대한 자세한 정보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롯이, 그놈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했던 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자신은 그저, 대략적인 정보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머뭇거리던 호식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SNS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SNS?”
장학수가 미간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음… 자세한 설명은, 조금 더 준비해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장학수가 말없이 호식을 바라보기를 잠시.
한차례 한숨을 내쉰 장학수가 말을 잇는다.
“어차피 반신반의하던 일이니, 일단 그 일은 접어 두고…….”
장학수가 호식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어지간히 회장님이 되고 싶은가 보구나. 비록 집 밖 회장님이지만…….”
“회장은 제가 아닙니다. 저는, 부회장이 될 것이거든요.”
“…응?”
장학수가 또 한 번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호식이 씨익 미소 지으며 마지막 말을 잇는다.
“그 자리는 이미, 주인이 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겁니다. 그 자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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