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잡는 회귀검사-173화 (173/174)

173화 고생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피고인이 구속된 상태에서 기소가 되면, 법원의 구속기간은 각 심급당 2개월.

오춘화 회장의 재판은 무려 기간을 꽉꽉 채운, 장장 6개월 동안이나 이루어졌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법원에서 오춘화 회장에 대한 최종 선고심이 있는 날이었다.

보기 드문 재계 거물의 재판인 만큼, 추첨제를 통해 뽑은 방청객들도, 객석을 꽉꽉 채운 이곳.

피고 측 오춘화 회장과 그의 변호사.

그리고 원고 측의 보윤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을 때.

이윽고, 재판관이 최종 판결을 내린다.

“…비록 피고인이 고령의 나이이고, 대기업 총수로서 사회에 공헌한 기여도가 크다고 하나…….”

재판관이 말끝을 흐리자, 몇몇 방청객들이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왜 제 놈 변명부터 말하는 거야?”

“낸들 아나, 3.5법칙이 여기서 또 나올지… 뭐, 오춘화 회장 죄질이면 13.5도 가능할 것 같은데…….”

구석에 앉아 지켜보던 두 방청객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재벌의 3.5법칙.

재벌총수에게는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하고, 2심에서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면서 풀어 주는 것을 말한다.

시간이 지나, 국민들의 관심이 식어 들어갈 때, 권력자들이 써먹는 편법 중 하나였다.

일단 1심에서 징역형을 받았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끓어올랐던 분위기도 서서히 식어 가기 때문이다.

“수많은 정·재계 인사들에게 수천억 원대 뇌물을 공여하고, 선량한 국민을 살해하려 하였으며, 그 외에 마약밀거래, 불법 인신매매, 납치, 감금방조 등 그 죄가 매우 중하다 판단되며…….”

법원 내 재판관의 위엄 어린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진다.

“…또한, 얼마 전 언론을 통해 공개된 전 명성그룹 부사장 박건우 씨의 추가 진술을 통해, 피고인의 행위들이 ‘방조’가 아닌 ‘교사’에 가깝다는 사실이 증명되어, 그 죄질이 더욱 중하다고 할 것입니다.”

“…….”

가만히 듣고 있던 오춘화 회장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뒤집을 수 없는 게임.

자신의 완벽한 패배였다.

‘강도윤…….’

속으로 중얼거린 오춘화 회장이 힐끗 원고 측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법복을 차려 입은 보윤이 그 시선을 느꼈는지, 마주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탈하군…….’이내 오춘화 회장이 체념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원래대로라면, 저 자리에는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는 저 여자가 아니라, 그놈.

자신을 이 지경까지 몰아넣은 강도윤이라는 놈이 있어야 했다.

놈의 수사 결과물이 하나씩 법원에 내보여지기 시작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그 정도로, 자신을 위해 준비한 놈의 덫은 완벽했다.

나름 엘리트라고 자부하던 십수 명의 변호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댈 정도로 말이다.

‘한 번… 얼굴은 보고 가고 싶군.’

명성을.

이 오춘화를.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다.

그 얼굴을 머릿속에 깊이 각인시켜.

죽어서라도, 놈을 저주하고 싶었다.

‘뭐… 곧 만나게 될지도…….’

오춘화 회장의 얼굴 위로, 처음으로 ‘미소’라는 것이 떠올랐다.

무려 6개월이다.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놈은 깨어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놈을 산 사람이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자신의 손자, 오성춘 또한 그렇게 한 달, 일 년이 지나, 지금까지 병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있지 않은가?

‘오춘화 인생의 마지막 선물로는, 나쁘지 않군.’

오춘화 회장이 다시 눈을 뜨자.

재판관의 목소리가, 조용히 귀청을 때린다.

“…이제, 피고인에게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재판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주문, 피고인 오춘화를 징역 20년 형에 처한다.”

“……!”

몇몇 방청객들이 눈을 크게 떴다.

징역 20년.

늙은 오춘화 회장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판결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보윤도 조용히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이는, 재벌 총수인 피고인을 징역 20년 형으로 처벌함으로써 얻는 법 수호의 이익이, 처벌에 따르는 국가 경제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기 때문에…….”

“끝났군.”

오춘화 회장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 이상, 재판관의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명성그룹의 오춘화.

이 땅에서 수십 년 이상을 황제 못지않게 군림해 온 화려한 인생은.

마침내, 그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 * *

국민들 초유의 관심사였던, 오춘화 회장의 판결이 확정된 그 순간.

도윤의 주변 인물들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빨리, 빨리 준비해요! 오늘이면 진짜 끝입니다! 현장에는 몇 명이나 나가 있어요?”

배영준이 큰 소리로 외치며 뒤를 돌아본다.

“필수인원 제외하고 이미 모두 나가 있습니다, 부장님!”

“오춘화 회장 판결 건을 제일 먼저! 내일 자 메인은, 우리 부 기사입니다! 마무리가 제일 중요한 것, 다들 알고 계시죠!?”

“예!”

배영준의 말에 정치부 기자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이로써, 명성 또한 완전한 몰락.’

속으로 중얼거린 배영준이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명성이라는 이름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지만.

그나마 이름만 바꿔 나머지 계열사들로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했던 막내 오상규의 계획도 이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이제 명성이라는 이름은 정말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남은 건, 그가 돌아올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두는 것.’

그야말로 언론 플레이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마지막까지, 힘냅시다!”

정치부 기자 사무실에 배영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 *

같은 시각, 박판섭 또한 바쁘기는 매한가지였다.

“명성과 관계된 용역깡패들. 아니, 한 번이라도 관계되었던 썩어 빠진 쓰레기 놈들까지, 풀 한 포기 남기지 말고 모조리 쓸어버려!”

“예, 형님!”

“스읍!”

박판섭이 인상을 찡그리자,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장정들이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친다.

“예! 사장님!”

“좋아!”

박판섭의 외침에 이내 사내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저… 그런데, 형님.”

“……?”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박판섭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받은 젊은 사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 끝나게 되면, 공식적으로 조직을 해체할 거라 말씀하신 것… 진심이십니까?”

“…….”

박판섭이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자, 젊은 사내가 빠르게 말을 덧붙인다.

“아, 그게… 기껏 역사상 유래 없는 전국 단일 조직으로 통합했는데, 뭔가 아쉽기도 하고…….”

잠시 머뭇거리던 사내가 이내 입술을 꾸욱 깨물며 말을 잇는다.

“그… 저희 같은 놈들은, 배운 거라고는 주먹밖에 없어서, 당장 먹고살 길도…….”

가만히 듣고 있던 박판섭이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터억!

“뭘 그런 걸 걱정하고 있어?”

박판섭이 자신의 손을 사내의 어깨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배운 게 주먹밖에 없다고, 죽을 때까지 주먹으로만 먹고살 거야?”

“그건…….”

“뭐, 잘 풀리면 나중에 직접 주먹을 쓰지 않아도, 높은 자리에 올라 애들 시켜 먹고 떵떵거리면서 살 수도 있겠지.”

젊은 사내가 바로 그거라는 듯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내를 보며, 박판섭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런데 말이야…….”

“…예?”

“훗날, 나중에 말이야… 니가 결혼을 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까지 낳게 되었을 때.”

“…….”

“그 자식이 커서, 지금의 니 모습을 보고 자란다면, 어떤 느낌일 것 같아?”

“……!”

순간,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아빠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자식 놈이 어디 밖에 가서 당당하게 말이나 할 수 있겠어?”

“아…….”

“미래의 니 자식 앞에서, 부끄러운 등짝은 보이지 말자.”

이어지는 박판섭의 말에 젊은 사내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박판섭이 제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한다.

“시대가 바뀌었어. 우리도 이제는, 스마트해지자고.”

“…이해했습니다. 형님의 깊은 뜻도 몰라보고…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저, 그런데… 주먹이 아니면, 대체 저희가 뭘로 먹고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 같은 놈들은 배운 게 주먹밖에…….”

“왜 배운 게 주먹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예?”

박판섭의 물음에 젊은 사내가 멍하니 반문했다.

“내가 너희들한테 항상 강조했던 게 뭐였지?”

“아……! 도베르만!”

잠시 고민하던 사내가 무언가 생각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도베르만 같은 인내와 끈기. 그거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다.”

“…….”

“뭐, 내가 미리 생각해 둔 바도 있고…….”

뒷말은 자기 혼자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박판섭이 힐끗, 창밖을 바라본다.

새파란 하늘 위로.

누군가의 얼굴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가는 느낌.

박판섭이 그리운 표정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빨리 돌아와서 내 면 좀 살려 달라고, 영감님.’

* * *

눈꺼풀이 무거웠다.

몸은 마치, 따뜻한 물속을 유영하는 듯한 느낌.

포근하고, 아늑했다.

‘피곤해…….’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묘하게 편안한 이곳에서, 계속해서 쉬고 싶었다.

그저 이대로…….

“……!”

순간 도윤이 번쩍 하고 눈을 떴다.

이대로는 안 된다.

홀로 남은 여동생, 단비.

호식과 박판섭, 배영준을 포함한 소중한 사람들.

악의 추나 다름없는 오춘화 회장과 명성그룹.

그리고…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보윤의 얼굴까지.

“여기는……?”

작게 중얼거린 도윤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이 온통 새하얀 공간.

도윤은 분명, 이곳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처음 죽음을 겪고 난 직후.

그때 그 공간이었다.

“아버지?”

순간 도윤이 눈을 크게 떴다.

깔끔하게 쳐낸 스포츠머리에, 깔끔한 정장 차림의 아버지가 눈앞에 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고생했다.”

“……!”

아버지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도윤이 더욱더 눈을 크게 떴다.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꿈에서라도 나오는 법이라고.

지금 눈앞에 있는 아버지는 그저, 자신의 꿈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침묵을 지키는 도윤을 보며, 그의 아버지, 강석환이 계속 말한다.

“이제… 우리랑 함께 가자.”

“…우리요?”

도윤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도윤의 아버지 옆에는 또 한 사람이 나타나 서 있었다.

도윤의 기억 속에 그 모습 그대로.

인자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여성이.

“…어머니.”

도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고생했어, 아들. 이제는, 우리랑 같이 가자. 아들이 좋아하는 미역국도 준비해 놨어.”

“…….”

도윤의 속에서 무언가 울컥 하고 치밀어 올랐다.

어느새 두 사람의 뒤로 기묘한 계단이 나타나 있었다.

온통 하얀색뿐인 공간 위.

커다란 문으로 향하는, 그 계단이.

“이만하면 되었다. 너는 최선을 다했으니…….”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에 도윤이 상념에서 벗어났다.

최선을 다했다?

무엇을?

자신이 끝마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비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목표도.

그것을 위해, 명성이라는 괴물을 무너뜨리겠다는 것도.

그리고… 이제야 시작한, 사랑도.

도윤이 천천히,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들?”

“죄송해요, 엄마.”

“…….”

두 남녀가 도윤을 빤히 바라본다.

“지금은, 갈 수 없어요.”

“…….”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

“이제 제 인생. 그렇게 쓰리지만은 않거든요.”

도윤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새하얀 공간 내부에 울려 퍼지자.

두 남녀가 마침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두둥실 하고 떠오른 남녀가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받아라.”

도윤의 아버지, 강석환이 무언가 홱 하고 집어 던졌다.

타악!

잽싸게 잡아챈 도윤이 손바닥을 펴 보였다.

“이건…….”

주사위였다.

필요할 때마다,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을 줬던 주사위.

그것이 오색빛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너는 멋진 아들이다.”

“…….”

도윤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또 한 번, 울컥하고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가거라. 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그 소중한 사람들에게.”

도윤이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보였던 그 어떤 미소보다, 밝게 빛나는 미소를.

비록 이것이 꿈일지라도.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부모님의 앞에서만큼은 울고 싶지 않았다.

“…감사했습니다.”

도윤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마침내, 두 남녀의 모습이 조금씩 희미해져 갈 때.

파아아아아아앗!

새하얀 광채가, 공간 내부를 뒤덮쳤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