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잡는 회귀검사-174화 (완결) (174/174)

174화 1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완결)

약 10년 뒤.

2014년의 어느 무더운 여름.

“끄으으으…….”

톡 쏘는 프로포폴 냄새가 코를 찌르는 병실 침대에서, 한 남성이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30대 중, 후반은 되었을까?

빡빡 깎은 머리에, 뼈만 앙상하게 남아 비쩍 마른 사내.

“……!”

순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링거액을 확인하던 간호사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어, 어…….”

멍하니 쩍 하고 입을 벌리던 간호사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과, 과장님…….”

“…….”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완전히 굳어 버린 근육 탓에, 사내가 인상만 찌푸리고 있을 때.

간호사가 큰 소리로 고함친다.

“과장님!!!!! 여기, 여기 오성춘 환자가!!!!”

이내 간호사가 병실 출입문을 향해 후다닥 뛰쳐나갔다.

‘오성춘…….’

간호사가 외친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던 사내가 한 번, 두 번, 눈을 끔뻑이기 시작했다.

오성춘.

분명, 자신의 이름이 맞았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다.

마치 오랜 꿈을 꾸고 깨어난 듯한 느낌.

순간 뼈만 앙상한 사내, 오성춘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끄윽…….”

밀려오는 두통에 오성춘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히…….’

하나, 둘.

끔찍한 두통 사이로,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명성그룹.

변호사.

낭떠러지로 떨어지며, 불타오르는 차체.

그리고…….

“……!”

순간 오성춘이 번쩍 하고 눈을 떴다.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자신이 지금 왜 이 지경으로 누워 있는지.

이토록 끔찍한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강… 도윤…….”

오성춘의 억눌린 잇새 사이로,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성춘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갈수록.

삐- 삐- 삐- 삐- 삐, 삐, 삐, 삐.

일정한 속도로 울리던 기계음도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벌컥!

“……!”

때맞춰 다시 병실로 돌아온 간호사가 눈을 크게 떴다.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환자의 이상 증세를 눈치챈 것이다.

“과, 과장님! 빨리요!”

“이런……!”

빠른 움직임으로 간호사의 뒤를 따라 병실로 들어선 의사가 재빨리 오성춘에게 응급조치를 시작했다.

“진정제 가져와! 빨리!”

“네, 네!”

잠시 후.

간호사가 가지고 온 진정제를 오성춘에게 투여한 의사가 진땀을 흘렸다.

“으… 으… 으…….”

“정신 바짝 차리세요! 지금이 가장 중요합니다! 가족들 생각하셔야죠!”

끊임없이 신음을 내뱉는 오성춘을 보며, 의사가 다급히 외쳤다.

삐, 삐, 삐, 삐 삐- 삐- 삐-

이내, 기계음이 다시 정상적인 속도로 돌아가면서.

발작을 일으키던 오성춘도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 가는 모습을 보고, 의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기, 기적이에요.”

그제야 숨도 내쉬지 못하고 있던 간호사가 입을 열었다.

의사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지. 무려 십수 년 만에 깨어난 환자니까.”

“…….”

“지금 당장, 환자 가족한테 연락해.”

“아, 알겠습니다!”

간호사가 급히 병실을 뛰쳐나갔다.

기절하듯 잠든 오성춘을 보며.

홀로 남은 의사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이 환자, 분명히…….”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린 의사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 갔다.

“과연… 천운이 될지, 악운이 될지는…….”

* * *

한때 명성그룹에서 야심 차게 추진했던, 일산시 컨벤션 센터.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그곳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여느 대도시 못지않게, 높은 고층건물들로 즐비했다.

그리고, 그곳 외곽.

비교적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자그마한 물류회사.

책상에 앉아, 쌓여 있는 서류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는 중년 사내.

고생을 많이 했는지, 머리 사이로는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이는 것이, 쉰 살은 훌쩍 넘었을 법한 중년 사내.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중년 사내가 이윽고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든 중년 사내가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아, 저기. 오상규 씨 되세요?”

순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에, 중년 사내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대출은 필요 없습니다.”

“아, 대출이 아니라!”

곧바로 통화를 끊으려 했던 중년 사내가 멈칫한다.

“여기, 비단병원인데요. 다른 게 아니라, 지금 막 오성춘 환자가 깨어나서 연락 드렸습니다!”

“…예?”

순간 상대방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중년 사내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오성춘 씨가 깨어났다구요!”

“뭐, 뭐라구요!?”

재차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에, 중년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멍하니 서 있던 중년 사내가 급히 출입문을 나서며 말한다.

“지, 지금.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네, 네. 지금 막 잠들었으니까, 조금 천천히 오셔도…….”

여성의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중년 사내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끊임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10년.

무려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 긴 세월을 뛰어넘어, 기억 속에서도 흐릿해져 가던 그가, 정신을 차렸다.

집안에서 누구보다 똑똑했던.

아버지의 자랑거리나 다름없었던.

자신의 친조카가.

“성춘아…….”

중년 사내, 오상규의 걸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 * *

또다시 6개월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누군가에게는 추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따뜻했던 크리스마스를 지나.

마침내, 새해가 밝았다.

비단병원 입구 앞.

“…이제, 퇴원하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의 말에, 오상규가 고개를 숙였다.

의사의 옆에는, 환자복을 벗어던진 오성춘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이전과 달리, 제법 살이 많이 붙어 혈색이 상당히 좋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두 다리는 어쩔 수 없지만… 저희 쪽에서는, 이게 최선이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무려 십수 년인데요. 이것만 해도, 천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상규의 대답에 의사가 힐끗, 오성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그 모습에.

한차례 한숨을 내쉰 의사가 말한다.

“정신은 멀쩡할 텐데… 지난 수개월 동안 말 한 마디 없으시더니, 지금도 마찬가지네요. 그래도, 어느 정도 정은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특별한 이상 증세는 없었지만, 아마 아직 제정신은 아닐 겁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 하나 못 듣고, 그 좁은 방에서 재활에만 매진했으니…….”

“하긴…….”

의사가 충분히 이해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런데…….”

“…예, 선생님?”

주저하던 의사가 조용히 입을 열자, 오상규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 혹시, 회장님은 찾아뵐 생각이십니까?”

“…….”

‘회장님’이라는 말에, 오상규가 움찔했다.

잠시 후.

어딘가 모를, 씁쓸할 미소를 머금은 오상규가 대답한다.

“만나 뵈어야지요. 무려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돈 한 푼 받지 않고 저희 성춘이를 돌봐 주신 분인데요. 그게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도리겠지요.”

“…보호자분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혹시나, 환자분이 큰 충격을 받지 않도록…….”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사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오상규가 휠체어에 손을 올렸다.

“자, 갈까?”

“…….”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는데도.

즐거운 표정으로 연신 중얼거리며 휠체어를 끌고 걸어가는 오상규의 뒤로.

홀로 남은 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큰 충격으로 제정신을 차릴 수도…….”

이내, 상념을 털어 낸 의사가 몸을 돌려,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서울 도심지 한복판에 위치한 초고층 건물 앞에 선 오상규가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비록 완전히 다른 회사가 되어, 그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한때, 오상규의 추억 또한 많이 서려 있는 이곳.

오상규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오성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여전히 초점 없는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는 오성춘을 보며, 오상규가 말을 잇는다.

“성춘아, 지금까지 너를 돌봐 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야. 그 인사는 하는 게, 당연히 맞는 거겠지?”

“…….”

여전히 대답 없는 오성춘을 보며, 오상규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제… 가자.”

오상규가 천천히,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건물 안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층 로비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한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김대만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사내는.

과거, 박판섭의 아래에서 미래를 걱정하던, 그 젊은 사내였다.

지금은 어엿한, 이곳의 경비를 책임지는 직원이었고 말이다.

“올라가실까요?”

“…잘 부탁드립니다.”

마주 고개를 숙인 오상규가 휠체어를 끌기 시작한다.

끼리리리리릭.

매끈한 대리석 바닥 위로.

휠체어의 쇳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진다.

이윽고, 일반적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구석진 곳.

또 다른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 앞에 이르러, 김대만이 걸음을 멈췄다.

“이걸 타시면, 바로 회장실로 올라가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김대만이 몸을 돌렸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곳에 몸을 싣기 전, 오상규가 또 한 번 오성춘의 눈치를 살폈다.

과거와 건물 내부의 구조 자체는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

여전히 초점 없는 오성춘의 두 눈빛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쉰 오상규가 마침내, 엘리베이터 안에 완전히 몸을 싣자.

스으으으윽.

부드러운 소음과 함께, 건물의 꼭대기 층을 향해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니가 정신을 차리면 좋을 텐데.”

오상규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마치자.

땡!

짧은 기계음과 함께, 천천히.

엘리베이터 출입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회장실만 덩그러니 있는 꼭대기 층이라지만.

그 구조는, 예상 외로 단출했다.

기다란 복도 끝에 위치한 방 하나.

그것이 전부인 층이었으니까.

끼리릭, 끼리리리릭.

고급스러운 레드 카펫을 지나.

마침내, 두 사람이 회장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기다렸다는 듯, 굳게 닫혀 있던 출입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다.

순간, 열린 문틈 사이로 찔러 들어오는 햇살에, 오상규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음…….”

침음을 흘린 오상규가 천천히 눈을 뜨자.

서울 도심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 앞에, 커다란 키의 사내가 이쪽을 등진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고급 목재를 깎아 만든, 세련된 느낌의 책상.

그곳에는 멋들어진 용이 음각된 명패 위에.

‘비단그룹 회장 강도윤’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

순간.

지금까지 한결같았던 오성춘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흐릿해진 초점은, 점차 또렷한 빛을 띠어 가기 시작할 때.

“…오랜만이다.”

창가를 등지고 서 있던 사내가 마침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한결같은 얼굴을 가진, 사내.

그 사내의 이름은…….

“강… 도윤…….”

꽈악 다물어져 있던 오성춘의 잇새 사이로.

그 이름이,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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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화

서울중앙지방법원 1층 로비.

검찰청과 법원은 그 업무 특성상 전국 어느 지역이든 위치상 모두 붙어 있었고.

그 인근으로 변호사 사무실이 빼곡히 들어찬 구조였기에, 하나의 법조 타운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런 서울지법 1층 로비 구석에, 다섯이나 되는 여성 법조계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각각 서울중앙지검 검사와 같은 지법 판사, 변호사가 둘, 검찰 사무관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대학교 동기들이었기에, 평소 친분이 매우 두터웠다.

그런 법조계 엘리트들도, 여자 여럿이 모이면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으니…….

“은비야! 이번에 너희 지검에, 그분이 복귀하셨다며?”

두꺼운 뿔테 안경 뒤로, 작은 체구의 여성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다섯 인사 중 유일하게 사시 출신이 아닌, 검찰 사무관 김나래였다.

“아! 강 검사? 그 소식, 나도 들었어!”

“그 연예인 뺨치게 잘생긴 검사? 혼수상태라더니, 깨어난 거야?”

관심사의 등장에, 두 여성 변호사도 거들었다.

170센티미터가 넘어가는 늘씬한 키에, 또렷한 이목구비, 옅은 브라운 계열 머리칼이 유독 잘 어울리는 서구형 미녀.

서울중앙지검 소속 검사, 박은비가 대답한다.

“응, 맞아. 혼수상태가 1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다들 회의적이었는데… 3개월 전쯤 깨어났다고 하더라고.”

“와. 그럼, 그런 일을 당하고도 3개월 만에 복귀한 거야? 역시…….”

김나래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두 변호사도 연신 꺅꺅거리기 바빴다.

“대박이네. 라인도 제대로 탔잖아? 앞길도 이제 탄탄대로겠어. 다른 누구도 아닌, 총장님 라인이니까.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젊고 잘생긴 총장님이 등장할 수도?”

“미리 꼬셔 놔야 하는 것 아냐? 아… 남친만 없었으면, 내가 한번 꼬셔 보는 건데…….”

“그럼, 남친 없는 내가 한번 꼬셔…….”

“안 돼!”

두 변호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나래가 버럭 고함쳤다.

“…응? 나래?”

“그분은, 아무한테도 넘겨줄 수 없어!”

이어지는 김나래의 말에 두 변호사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대단하신 박 검사도 차였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나래 니가 가능하겠어?”

“그렇지. 솔직히 박보윤 검사, 성격이 개차반이라 그렇지, 인물이면 인물, 집안이면 집안.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잖아? 내가 남자라도…….”

“같은 검사라서 싫을 수도 있지!”

김나래가 이번에도 빼액 하고 소리쳤다.

안경을 한차례 고쳐 쓴 김나래가 말을 잇는다.

“나 같은 행시 출신 사무관들은 희귀하니까, 분명 다르게 생각할 거야!”

“뭐, 5급 사무관들이 흔치 않은 건 맞는데…….”

한 변호사가 회의적인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솔직히 나래가 박 검사보다 나은 건…….”

“나래 표정 보니까, 나중에는 뭐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릴 거야!’ 막 이러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호호호.”

“이익……!”

장난스럽게 웃음을 터뜨리는 두 변호사를 보며, 김나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여태껏 모태솔로로 한 평생을 살아왔다.

능력이 없어서?

아니다.

자신 또한 한껏 꾸미면 그 유명한 박보윤에게도 뒤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단지, 관심 있는 남자가 단 한 번도 자신의 주변에 없었기 때문에, 꾸미고 다니지 않았을 뿐.

그런 김나래도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인생 처음으로 관심 있는 사내가 나타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강 검사도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거지.’

속으로 중얼거린 김나래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년 전의 그 일을, 김나래는 잊지 않았다.

때는 한창 명성그룹 사건으로 서울중앙지검 전체가 초비상 사태에 돌입해 있던 그때.

사건 주 담당이었던 강도윤 검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던 와중에, 운명처럼 복도에서 맞닥뜨린 두 사람.

김나래가 과거를 회상하며 옅은 미소를 입에 베어 물기 시작했다.

* * *

약 1년 전, 서울중앙지검 3층 복도.

초비상상태의 서울중앙지검에 업무지원을 나와 있던 김나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놈의 직장 생활이, 커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냐……. 그래도 나름,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직장 중 하나인데도…….”

한 손에는 두터운 서류더미를, 다른 한 손에는 일회용 컵에 담은 커피를 손에 쥔 김나래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툭.

“꺅!”

순간 김나래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기던 중,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누군가와 부딪힌 탓이다.

손에 쥔 커피가 그대로 옷 위로 쏟아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식을 대로 식어, 화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김나래가 와락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로, 재수 옴팡지게 없는 날이었다.

“이봐요! 대체 눈을 어따 두고 걷는 거예요!?”

속에 있는 감정을 유감없이 겉으로 표출하며, 김나래가 확 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순간.

“……!”

김나래의 얼굴이 화악 하고 붉어졌다.

바로 코앞에, 남자의 얼굴이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다.

모태솔로로 남자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김나래에게는 그 사소한 일이 쥐약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다름 아닌…….

“괜찮아요?”

말끔한 정장 차림의 잘생긴 청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현재 서울중앙지검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자, 어지간한 연예인 정도는 귀싸대기를 후려갈길 정도의 그는…….

“강… 검사님?”

김나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몸을 숙인 도윤이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직접 닦아 주셔도 되는데…….’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욕망을 눌러 앉힌 김나래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괜, 괜찮아요.”

손수건을 건네받은 김나래가 멍하니 서 있자.

허리를 숙인 도윤이 바닥에 흩어진 서류들을 줍기 시작했다.

“제가 주워도 되는데…….”

“아닙니다. 제가 제대로 정신 차리지 않고 걸은 탓인데요.”

“…….”

엄밀히 말하면, 김나래의 잘못도 컸다.

다른 생각을 하던 탓에, 앞쪽은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게 사실이니까.

이윽고, 서류를 모두 주은 도윤이 그것들을 건네주며 말한다.

“저는 313호실 강도윤 검사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도윤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김나래가 내색하지 않고 대답한다.

“알, 알고 있어요. 주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윤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 잘못인데요. 계좌번호 알려 주시면, 세탁비라도…….”

“아, 그건 진짜 괜찮아요!”

다급히 손사래 치는 김나래를 멍하니 보던 도윤이 이내 옅은 미소를 입에 물었다.

‘아…….’

김내래가 그런 도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정 그러시면, 사죄의 의미로 점심이라도 사겠습니다. 이번 사건이 끝나고, 제 사무실에 한 번 들러 주세요.”

“……!”

김나래가 눈을 크게 떴다.

잠시 후.

“네, 네, 네. 꼭 갈게요!”

김나래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 * *

‘완전 자기 잘못도 아니고, 그냥 사과 한 번이면 되었는데, 손수건도 주고, 밥도 먹자고 했지. 이게 무슨 뜻이겠어?’

속으로 중얼거린 김나래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했다.

도윤은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

한때, 서울중앙지검의 또 다른 인기인 중 하나인 박보윤 검사가 도윤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불안한 소문이 돌았지만…….

그마저도, 팩트 없는 헛소문으로 판명 났다.

이제 남은 건…….

‘박은비…….’

늘씬한 미녀에게 시선을 돌리며, 김나래가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서울중앙지검의 양대 산맥.

박보윤 검사와 함께, 이화(二花)라 불리는 여자.

자신의 대학 동기이기도 한 박은비만이 자신의 유일한 경쟁자였다.

‘강 검사가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건 확실하지만… 그런 일을 당하고, 1년이나 지났으니까.’

속으로 중얼거린 김나래가 의지를 불태웠다.

절대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후회의 나날을 보내던 지난 1년.

비로소 찾아온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그런 김나래를 보며,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유일한 여판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작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여판사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다시 그보다 더 과거로 되돌아가.

도윤이 사고를 당하고, 반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난 어느 여름.

삐- 삐- 삐- 삐- 삐- 삐-

규칙적인 기계음에, 알싸한 약품 냄새.

그 사이로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병실 침대 위에서.

도윤이 천천히, 눈을 떴다.

꿈뻑, 꿈뻑.

한참을 눈만 꿈뻑이기를 잠시.

무어라 입을 열고 싶었지만, 입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그 목적은 이룰 수 없었다.

‘산소 호흡기…….’

속으로 중얼거린 도윤이 쓰게 미소 지었다.

교통사고와 납치.

그 배후에 있던 명성그룹 오남규.

꿈속에서 봤던 부모님까지.

그 모든 것들이, 조금씩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무언가를 떠올리던 도윤이 순간 멈칫했다.

‘주사위……!’

김문성 당 대표를 구속시키고 얻었던 주사위.

채 사용하지도 못했던 그 주사위가 갑작스레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제 몸을 더듬거리던 도윤이, 이내 행동을 멈췄다.

‘아무렴, 이제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자신이 살 수 있게 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이 살았다는 그 사실 자체.

결과가 중요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아쉽긴 하군. 그래도, 굴릴 때마다 무슨 능력이 나올지, 가슴 두근거리곤 했는데.’

픽 하고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들어 올렸던 손을 침대 위로 놓았다.

툭.

‘…응?’

손에 무언가가 걸렸다.

‘사람이 있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도윤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창밖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늦은 오후.

옆에서 들려오는 부스럭대는 소리에, 도윤이 입에 있는 산소 호흡기를 조심스레 떼어 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통증이 도윤의 호기심을 이길 수는 없었다.

‘단비인가?’

가족이라 봐야, 하나뿐인 여동생밖에 없었다.

호식을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워낙 바쁜 사람들이었기에 병실에 붙어 있기 힘들 터.

아무래도, 단비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그 사람이, 도윤의 얼굴 위로 화악 하고 나타났을 때.

“보윤… 이……?”

쩍 하고 갈라진 도윤의 목소리가 병실 내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사이로.

저물어 가는 붉은 노을이 비추는 사람의 정체는, 분명 도윤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얼굴이었다.

보윤이 마침내,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

“내 이름. 처음으로 그렇게 불러 준 거.”

“…….”

멍하니 굳어 있는 도윤을 보며, 이윽고 보윤이 미소 지었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만큼이나, 아름다운 미소였다.

“고마워… 깨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그런 보윤을 멍하니 바라보던 도윤의 입가에도, 어느덧 희미한 미소가 자리한다.

벌어지지 않는 입술 근육을 억지로 움직이며.

도윤도, 진심을 담아 보윤을 향해 말한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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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화

도윤이 깨어나던 그 시각.

향내 가득한 분향소 내부에, 한 남자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단비야! 역시 여기 있었구나!”

분향소 정면을 향해 묵념하고 있던 긴 생머리의 여성이 멈칫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호식이 오빠?”

유독 새하얀 피부에 얼굴 여기저기에 귀여움이 묻어나는.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된 여성, 단비가 지금 막 분향소 내로 들어서는 호식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헉, 헉… 전화기… 오랫동안 꺼져 있길래… 역시, 여기 있을 줄…….”

“숨 좀 돌리고 얘기하셔도 돼요.”

쓰게 웃은 단비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을 힐끗 돌아본 단비가 한층 목소리를 낮춰 말을 잇는다.

“…조금 살살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기, 분위기가 분위기다 보니…….”

“아… 그, 그래.”

깊게 심호흡하며 숨을 내쉰 호식이 이내 굳은 얼굴로 단비를 바라본다.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보세요? 혹시…….”

단비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호식이 천천히 말한다.

“단비야, 도윤이가…….”

호식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단비가 화악 하고 다가섰다.

어느새 단비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듯, 울상이 되어 있었다.

‘이거, 장난 한번 잘못 치면 일 나겠…….’

“오빠가, 오빠가 왜요? 우리 오빠… 불쌍한 우리 오빠…….”

단비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기 시작했다.

“나… 다시 수능 치려고 했어요. 다시 수능 쳐서, 의대에 가려고 했어요. 의사가 되면, 내 손으로 직접 오빠를 치료해 줄 수 있으니까… 살려 줄 수 있으니까…….”

“그, 그게, 단비야.”

호식이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부모님을 그렇게 잃었을 때… 후회 진짜 많이 했어요. 하지만 후회만 했지, 노력 따위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래서 오빠까지 이렇게 되고 뒤늦게나마 의사가 되려고 한 건데, 만약 오빠가 잘못되면…….”

단비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발견한 호식이 다급히 말을 덧붙인다.

“깨어났어!”

“…네?”

단비가 멍하니 반문했다.

“도윤이 그놈! 지금 막, 깨어났다고!”

“……!”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던 단비의 두 눈이 점차 커져 가기 시작했다.

덥석!

호식의 두 손을 잡은 단비가 하이톤의 목소리로 외친다.

“진짜예요!?”

“단, 단비야, 아까 조용히 좀 얘기하라고…….”

주변에서 집중되는 시선을 느끼며, 호식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게 지금 문제예요!? 우리 오빠, 정말로 깨어났어요? 진짜요?”

어린아이처럼 되묻는 단비를 보며, 이내 옅게 미소 지은 호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깨어났어.”

“맙소사…….”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단비가 급히 호식의 팔을 이끌었다.

“우리, 빨리 오빠한테 가요!”

“그, 그래.”

돌변한 분위기의 단비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호식이 이내 단비에게 이끌려 갔다.

“아, 잠깐…….”

순간 단비가 우뚝 걸음을 멈추자, 호식이 이번에는 또 뭐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분향소를 향해 다시 몸을 돌린 단비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엄마, 아빠… 두 분이, 오빠를 살려 주신 거죠?”

“…….”

“정말… 고마워요.”

분향소 내부에 울려 퍼지는 단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호식이 조용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도윤이 깨어나고 다시 3개월이 지난, 서울중앙지검 1층 로비.

지금 막 출입문으로 들어서는 박은비를 발견한 김나래가 그쪽으로 달려갔다.

“은비야, 은비야. 들었어?”

“…응? 뭐가?”

“강 검사, 국정원 파견 검사로 발령 났다며!”

“아, 그 얘기…….”

박은비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진실임을 확인한 김나래가 울상을 지었다.

“우리 강 검사, 불쌍해서 어떡해…….”

“…왜 불쌍한데?”

“어머, 얘 좀 봐. 너는 같은 검사면서, 몰라?”

“……?”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박은비를 보며, 한숨을 내쉰 김나래가 말을 잇는다.

“국정원 파견 검사 그거. 허울만 좋은 감투일 뿐, 실상은 좌천성 인사라는 거, 모르는 사람들이 없잖아.”

“…….”

“더군다나, 총장님 직속 라인인 강 검사가 국정원 파견 검사로 발령 날 줄이야, 어느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 벌써 강 검사가 총장님에게 내쳐졌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니까?”

“음, 글쎄…….”

박은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물론 박은비 또한 국정원 파견 검사의 실상에 대해 대부분 알고는 있었다.

국정원으로 파견 나간 검사들은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 하지만, 특히 중점적으로 하는 일이 바로, 정부의 ‘국정원 댓글 조작사건’ 개입 여부다.

민감한 선거 기간에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지.

만약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면, 누구의 지시였는지.

당시 최종 결재권자는 누구였는지.

권력의 중점에 있는 청와대와 정부에 전면으로 맞서는 일이다 보니, 국정원 파견 기간이 끝난 검사들은 당시의 행동에 따라 그 인사가 천양지차였다.

예를 들어, 대검찰청 공안부 과장으로 있던 검사가 국정원 파견 검사를 거친 후, 1년도 되지 않아 일반 지검 형사부장으로 가는 경우다.

대검 실무참모가 1년을 못 채우고 다른 청으로 옮기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검사들이 이를 보복성 인사라 비난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당시의 정부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검사들 또한 국가의 녹을 먹고 사는 사람들.

일반 월급쟁이 샐러리맨들과 다를 바 없었다.

회사로 치면 그룹 임원진이나 다름없는 청와대에 밉보이는 순간.

어쩌면, 그런 보복성 인사는 당연한 결과나 다름없었다.

삼권분립이니 하는 소리는, 그저 이름뿐인 소설 속 이야기였다.

상념에서 벗어난 박은비가 말한다.

“뭐, 총장님도 생각이 있으시니까 강 검사를 국정원으로 파견 보내시는 것 아닐까?”

“뭐?”

김나래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한차례 제 머리를 쓸어 넘긴 박은비가 말을 잇는다.

“그도 그럴 게, 그 대단한 명성그룹도 최종적으로는 박보윤 검사가 담당하기는 했지만… 강 검사가 전부 처리한 거나 다름없잖아? 어쩌면, 재벌 총수에게 중형을 선고받게 만든, 제1호 검사인데, 그에 대한 총장님의 신임도 이해가 가.”

“야! 하지만 강 검사는, 이제 막 일선에 복귀한 환자라고! 환자한테 그런 중임을 맡긴다는 게 말이 돼?”

“…그만큼 총장님이 강 검사를 신뢰한다는 뜻이겠지.”

이어지는 박은비의 말에 김나래가 울상을 지었다.

물론, 사랑하는 미래의 남편이 조직 수장의 신임을 받는다는 사실은 자신도 환영이지만.

복귀하자마자, 또 이렇게 님과 생이별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국정원으로 파견을 가게 되면, 또 최소 1년은 못 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순간 누군가를 발견한 박은비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턱으로 뒤를 가리켰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직접 물어보시지 그래?”

“뭐?”

“나래 니가 그토록 바라던 님이, 저기 오시는데?”

박은비의 말에 눈을 크게 뜬 김나래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강, 강 검사님…….”

바로 등 뒤까지 접근한 도윤을 발견한 김나래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 김나래 사무관님, 안녕하세요?”

“……!”

김나래가 눈을 크게 떴다.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어?’

도윤과 마주친 거라고 해야, 고작 1번이었다.

그 1번도, 도윤이 사고로 누워 있기 전이었으니, 1년도 훨씬 더 되었다.

그런데, 그런 도윤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다.

이 말은…….

‘역시, 강 검사님도 나한테 관심이 있었던 거야!’

특수한 이능력으로 기억력이 비정상적으로 뛰어난 도윤의 능력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김나래가 옅게 얼굴을 붉혔다.

‘지금이 기회야! 오늘이야말로…….’

무언가 결심한 표정을 지은 김나래가 도윤을 향해 무어라 말하려는 그 순간.

“총, 총장님?”

놀라 눈을 ‘흡’ 뜬 박은비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응? 총장님?”

이내, 김나래가 박은비의 시선이 향하는 출입문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

김나래 또한 박은비와 똑같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보무도 당당하게 지금 막 청사 내부로 들어서고 있는 깔끔한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

박은비와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분명 현 검찰의 총수, 정승만 검찰총장이었다.

“반갑습니다, 총장님!”

코앞까지 다가온 정승만을 보며, 두 여성이 다급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도윤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오던 정승만이 멈칫하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 반가워요.”

“서울중앙지검 검사 박은비입니다.”

“5급 사무관, 김나래입니다!”

정승만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박 검사랑 김 사무관이군요. 고생 많습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말끝을 흐리며, 힐끗 멍하니 서 있는 도윤을 향해 시선을 돌린 정승만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일선에 복귀하자마자, 이런 아리따운 여성 두 분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게 아니라…….”

도윤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정승만이 말을 잇는다.

“혹시, 이 늙은이랑은 저녁 먹기 싫은 거 아니지? 뭐, 여성분과의 선약이라면 내가 양보하겠네. 부하 직원의 혼삿길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니, 그게…….”

무어라 말을 이으려는 도윤을 보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김나래가순간 눈을 빛냈다.

‘기회야!’

완벽한 기회였다.

도윤과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를 만들면서, 조직의 우두머리인 정승만과 친분까지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런 기회를, 김나래가 놓칠 리가 없었다.

김나래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희도 동석해도 되나요, 총장님!?”

“…응?”

“아 그게, 저희도 식전이라…….”

살며시 얼굴을 붉힌 김나래가 쿡 하고 박은비의 옆구리를 찔렀다.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박은비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괜찮을까요, 총장님?”

“뭐, 늙은 나야 환영이지. 강 검사는, 어때?”

“아, 상관없습니다.”

“그럼 다 같이 가지.”

정승만의 OK 사인에 김나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스!’

김나래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 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총장님. 식사 전에, 미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빨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응? 일단 보는 눈이 많으니, 자리 옮기면서 얘기하지. 아가씨들도 따라와요.”

“아, 네!”

이윽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정승만과 도윤의 뒤로, 두 여성이 뒤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일전에 제안하셨던 국정원 파견 건 말입니다.”

“……!”

비교적 작은 목소리였지만, 바로 뒤에 있던 김나래와 박은비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갑작스레 등장한 관심사에 김나래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자.

도윤이 천천히 말을 잇는다.

“그거… 아무래도, 제가 당장 하기에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응?”

고개를 갸웃한 정승만이 곧이어, 되묻는다.

“뭐야? 천하의 강 검사가 고작 정부의 눈치 따위에 겁먹은 건 아닐 테고… 뭐, 특별히 이유라도 있나?”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도윤이 이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을 잇는다.

“제가… 파견 기간 중에… 아마도, 식을 올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식?”

멍하니 반문하는 정승만을 보며, 도윤이 말을 잇는다.

“결혼, 말입니다.”

도윤을 제외한 세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우뚝 걸음을 멈췄다.

“결혼?”

“결혼요?”

“에……?”

세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

도윤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진다.

“이르면… 올해 안에요.”

바야흐로, 김나래의 원대한 꿈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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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화

지금 막 집으로 돌아온 김나래가 그대로 침대에 엎어졌다.

‘용서 못 해.’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속으로 중얼거린 김나래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자신의 순수한 마음이 짓밟혔다.

마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 버려진 느낌.

김나래는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할 수 있지? 나한테 밥까지 같이 먹자고 했으면서…….’

애당초, 말이 되지 않지 않은가?

1년여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일선에 복귀한 지 이제 고작 몇 개월이다.

이쯤 되면 도윤이 국정원 파견 검사라는 자리를 피하기 위해 만든 핑계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절대 포기 못 해.’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이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직접 이 두 눈으로 상대를 확인하고, 만약 그 상대가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다면…….

“뺏을 거야.”

꾹 다문 김나래의 잇새 사이로 억눌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던 김나래가 이내 벌떡 하고 몸을 일으켰다.

“1주일 연차 정도면 충분하겠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김나래의 눈빛 사이로 표독스러움이 묻어난다.

오늘부터, 김나래는 도윤을 쫓아다닐 계획이었다.

어차피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돈으로 안 되는 것 따위는 없었다.

직접 나서 노력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집안이라면, 어지간한 상대쯤은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만약, 그래도 물러나지 않는다면…….

‘정말로 뺏어야겠지. 억지로라도.’

속으로 중얼거린 김나래가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김나래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잠시 후, 수화기 너머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김나래가 입을 열었다.

“…아빠, 저예요.”

“오, 우리 나래. 네가 어쩐 일이냐? 애비한테 전화도 다 하고…….”

“제가 뭐, 일이 있을 때만 아빠한테 전화했나요?”

“뭐, 그건 아니지.”

잠시 수화기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김나래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 정도 웃음이 잦아들자, 비로소 김나래가 본론을 꺼낸다.

“아빠, 아빠가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죠?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고.”

“…응?”

갑작스러운 김나래의 말에, 사내가 멍청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아빠도 그랬다면서요. 엄마랑 결혼하기 위해서…….”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김나래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사내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니?”

경계심 가득한 사내의 목소리에, 통화임에도 김나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겼어요.”

“어떤 놈… 아니, 어떤 사람이야? 아빠는 딸을 믿지만, 노파심에 한마디 하자면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다. 어줍지 않은 녀석이라면…….”

“아빠도 잘 아는 사람일 거예요.”

“…응?”

사내가 이번에도 멍청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김나래가 수화기에 대고, 말을 잇는다.

“그 사람. 현직 검사거든요.”

“…검사라면 일단은 기본은 되었구나. 하지만, 요즘은 검사들도 또라이 같은 놈들이 많…”

“그것도, 지금 현재, 그 검사들 중에서도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스타 검사요.”

“…….”

사내가 잠시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킨다.

사내의 직업 특성상, 정보력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신문의 헤드라인이나 뉴스에 나갈 기사를 채택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사내였으니까.

더군다나, 그 신문이 대한민국 3대 신문사 중 한 곳에서 발간되는 곳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

사내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지금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스타 검사에… 나래 네 또래의 사람이라면,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거예요, 아빠.”

이어지는 김나래의 말에 사내가 신음처럼 말을 내뱉는다.

“강도윤…….”

이름 석 자가 귀에 또렷이 박혀들자 김나래가 표정을 굳히며 말을 잇는다.

“인물이면 인물, 인기면 인기, 능력이면 능력까지. 심지어 정승만 총장의 직계 라인에 여당 소속 정치인들의 신임마저 받고 있죠. 이만한 인물이라면, 눈 높은 아빠라도 땡큐 아니에요?”

“그야…….”

사내의 목소리에서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지자.

더욱더 표정을 굳힌 김나래가 쐐기를 박는다.

“만약 이 정도 인물도 성에 차시지 않는다고 하면, 저는 그냥 평생 독신으로 살겠어요. 혹여나 나중에 정략결혼이라도 시키실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아니, 그게 아니다, 나래야.”

사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층 표정이 밝아진 김나래가 묻는다.

“그럼, 도와주시는 거죠?”

“내가 도와주는 건 문제가 안 된다. 그보다는, 한 가지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어.”

“확인요?”

수화기를 들고 있던 김나래가 고개를 갸웃했다.

“언론 쪽에서도 들리는 소문이 있다. 조국일보에서 마지막에 태도를 바꾼 이유가, 총리님의 손녀딸과 강도윤, 그 친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어서였다는…….”

“그건 전혀 문제가 안 될 것 같네요.”

“…응?”

김나래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한다.

“두 사람, 사실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것, 이미 청사 내에 쫘악 소문이 퍼졌거든요. 찬바람까지 쌩쌩 부는 게, 초면인 사람들만 못하다는 평이 자자해요.”

“…그래?”

그건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 사내의 목소리에도 호기심이 어렸다.

“네, 박보윤 검사는 아빠가 전혀 신경 쓰실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내가 나서지 못할 것도 없지. 솔직히, 나래 네 말대로 그 친구가 요즘 이 나라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니까. 업계에서는 훗날 대권을 노릴 인재라는 평까지 벌써부터 나돌 정도이니…….”

“그럼, 도와주시는 거죠!?”

김나래가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우리 딸 일인데, 아빠가 도와줘야지.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거라.”

“고마워요, 아빠!”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수화기에 대고 입을 맞춘 김나래가 이윽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김나래가 차갑게 눈을 빛냈다.

“그 누구도, 내 남자는 건드리지 못해.”

김나래의 한기 가득한 목소리가 방 내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서울 외곽지.

한적한 커피숍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

도윤이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정승만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이제 얘기해 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결혼이라니?”

“그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허허허… 여자라고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네가 결혼이라니. 그것도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정승만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몸을 묻었다.

표정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상대는 누구야?”

“…….”

“나 몰래 어디 참한 아가씨라도 숨겨 두고 있었던 거구만. 더 섭섭해지기 전에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잠시 침묵을 지키던 도윤이 대답한다.

“안 그래도 이쪽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총장님은 제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시니까요.”

“…….”

이어지는 도윤의 대답에 한차례 멈칫한 정승만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윤의 집안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정승만이었다.

그런 도윤이, 자신을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보다 더 가슴 뭉클하고, 기분 좋은 소리가 어디 있을까?

“너…….”

“항상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깨어나면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자리에서 일어난 도윤이 정승만을 향해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그런 도윤을, 정승만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이 권력의 중점에 있는 검찰총장이기 때문에?

절대 아니다.

이 행동에 가식 따위는 전혀 없다는 것을 정승만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봐 온 눈앞에 있는 놈은, 부러질지언정 절대로 누군가에게 굽히지 않는 올곧은 놈이었으니까.

그런 놈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한다.

그것도, 한참 결혼 얘기가 나오고 있는 이 자리에서.

어느새 정승만의 입가에도 따뜻한 미소가 어렸다.

“…고개 들어.”

“…….”

“자식 놈이 오랫동안 고개 숙이고 있는 것, 보고 싶지 않아.”

이어지는 정승만의 말에, 도윤이 그때서야 자세를 바로 했다.

정승만과 마찬가지로, 도윤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정승만이 묻는다.

“뭐,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꿈에서 사람 감동받게 만드는 말 같은 거라도 배웠나?”

“설마요.”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정승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이고, 제 복장을 스스로 살펴보던 정승만이 도윤을 향해 묻는다.

“지금 나 괜찮나?”

“예?”

“입고 있는 복장 말이야. 이제 곧 며느리를 맞이하게 될 텐데,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맞이할 수는 없잖아?”

이어지는 정승만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도윤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저한테는 언제나 최고십니다.”

“아니, 그런 입에 발린 소리 말고! 좀 제대로 보라니까? 아가가 나중에 내 흉이라도 보면, 네가 책임질 거야!?”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에잉, 재미없는 놈.”

쯧, 하고 혀를 찬 정승만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곧이어, 가만히 서 있는 도윤을 보며 정승만이 버럭 고함친다.

“아 그렇게 계속 서 있을 거야!?”

“아니 뭐, 성질내실 것까지야…….”

도윤이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언제 오기로 했어?”

정승만의 물음에 힐끗 시계를 바라본 도윤이 대답한다.

“곧요? 20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지금쯤 근처까지 왔겠네요.”

“아직 시간 좀 남았군. 그래서, 뭐하는 사람이야? 설마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겠지?”

“이제 곧 보실 건데, 뭐 그리 궁금하시다고…….”

“아 미리 대비는 해야 될 것 아냐! 대비!”

“…….”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치며 외치는 정승만을 보며, 도윤이 입을 다물었다.

“허… 내가 다 떨리는구먼. 그 박보윤이도 마다하던 네놈이 여자라니, 어디 TV에 나오는 톱스타라도 오는 건 아닌지…”

“마침 저기 오는데요?”

순간 도윤이 출입문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정승만의 온몸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어, 험!”

또각, 또각, 또각, 또각.

손님이 많지 않은, 한적한 커피숍이었기에.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더욱 크게 귀청을 때려온다.

정승만이 출입문을 등지고 있는 형태였기에, 유독 청각에 더 집중되는 것도 있었다.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정승만의 표정 또한 눈에 띄게 굳어갔다.

이윽고, 그 구두 소리가 ‘딱’ 하고 멈추자.

“…안녕하세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에, 정승만이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

정승만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떠졌다.

“너…….”

경악으로 가득한 정승만의 목소리가 카페 내부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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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화

다음 날부터, 김나래의 피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도윤의 사는 곳, 가족과 같은 기본적인 정보부터, 평소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그가 움직이는 동선까지 인력을 동원해 가며, 하나하나 전부 파악하기 시작했다.

“일단 단순히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말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결혼할 상대가 있는 건지, 확인하는 게 먼저겠지.”

새하얀 종이 위에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거리던 보윤이 눈을 빛냈다.

전자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만약 후자라면 확실한 준비가 필요했다.

“언론의 무서움이 어떤 것인지, 철저하게 느끼게 해 주겠어.”

현재 연예인만큼이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도윤인 만큼, 그 상대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일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게 많으면, 잃을 것도 많은 법.

대단한 사람일수록, 물어뜯을 곳 또한 많았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더욱더 쉽다.

가능성은 낮지만, 상대가 평범한 일반인이라면 무너뜨리는 것은 문제도아니다.

직장이 있다면 직장에 압박을 넣을 수도 있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그 가족을 건드리면 된다.

그 정도 힘쯤은, 김나래의 집안에 충분히 있었으니까.

“아무리 대단한 집안의 사람이라도, 언론의 힘이라면 사람 하나 매장시키는 것쯤은, 일도 아니니까.”

물론, 그 정도로는 눈도 깜빡하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집안 자제라면, 예외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상대가 평범한 일반인일 확률보다 더욱더 낮을 것이다.

“그 정도 대단한 사람이라면, 상대 쪽에서 먼저 사소한 스캔들 기사라도 터졌어야 정상일 테니…….”

여타 언론에서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을 만한 집안의 자제라면, 해 볼 만했다.

상념에서 벗어난 김나래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이 감정에 앞서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 없이 움직일 생각은 결코 없었다.

두 번, 세 번.

철저한 사전 조사 이후, 그 상대에 맞는 맞춤형 대응책을 준비할 작정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누군가를 떠올린 김나래가 이내 새빨간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기 시작했다.

* * *

중심일보 편집부 국장실.

“서울중앙지검 강도윤 검사한테 적당한 애들 몇 명 붙여.”

“…예? 그게 무슨…….”

상관의 말에, 편집부장 박대기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두 번 얘기하게 할 거야?”

편집부 국장, 김나대가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게… 애들이라 하심은, 기자들을 붙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부서에 상관없이, 똘똘한 애들로 몇 붙여서, 조용하고 은밀하게 밀착 취재해.”

말이 좋아 조용하고 은밀한 밀착 취재지.

미행이나 다름없는 일이라는 것을, 기자 짬밥 십수 년 차의 박대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타깃이 생겼을 때, 신문사에서 흔히 써먹는 방법 중 하나였으니까.

“눈에 불을 켜고 움직여야, 밥 벌어먹고 살 거 아냐!? 이리 눈치가 없으니, 이즈패치인가 뭔가 하는 놈들한테 맨날 특종거리나 빼앗기지.”

“…….”

‘애초에 분야가 다르잖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고 올랐지만, 가까스로 눌러 참은 박대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강도윤 검사라면, 국장님 생각대로 분명, 사소한 스캔들 기사 하나로도 특종거리가 될 겁니다.”

“암, 그렇고말고.”

이제야 말귀를 알아먹는다는 듯, 김나대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김나대를 바라보며, 박대기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그런데 국장님, 송구스럽지만… 제가 최근에 강도윤 검사와 관련된 얘기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 외에, 어떠한 정보도 들은 게 없는데… 혹시, 따로 들으신 얘기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거 없는데?”

“예?”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김나대를 바라보며, 박대기가 멍하니 반문했다.

다시 미간을 찌푸린 김나대가 계속 말한다.

“그래서 내가 지금 너한테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 아냐?”

“…….”

“대한민국에서 인기 좀 있다 했던 놈들 중에, 스캔들 기사 하나 안 나 봤던 사람 있어?”

“그건…….”

박대기가 순간 말문이 막히는지 말끝을 흐렸다.

“뭐든지, ‘최초’ 타이틀이 중요한 거야. 강도윤이 정도 되는 인물이면, 그 같잖은 스캔들 기사만으로도 사람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보일 것 아냐? 최소 조회수 수십만은 기본이겠지.”

“…….”

“더군다나, 그쪽으로 정보가 전혀 없다시피 할 정도로 아주, 아주 깨끗한 놈이야. 그런 상황에서 ‘뻥’ 하고 기사가 터진다고 생각해 봐.”

“그야 그렇지만…….”

박대기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까지 국장이 한 말 중 딱히 틀린 말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스캔들 기사’ 따위를 터뜨렸다간, 오히려 역풍을 맞을 우려가 농후했다.

아무리 최고의 인기인이라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현직 검사가 아닌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등의 죄목 따위로 엮어 넣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박대기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안다는 듯, 김나대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무슨 걱정하는지 알아. 그래서, 오늘부터 애들을 붙이라는 것 아냐?”

“그 말씀은…….”

김나대가 비릿한 미소를 입에 물었다.

“같은 검찰청 여직원도 좋고, 하다못해 여동생도 좋아. 얼굴만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뒷모습 사진 정도면, 충분하겠지.”

“…….”

“이왕이면, 둘만 오붓하게 등 돌리고 있는 사진으로. 그 정도면, 국민들도 ‘혹시?’ 하는 마음을 품지 않겠어?”

“만약, 전혀 그런 관계가 없는 여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박대기가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김나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한다.

“그래서 남들 오해하기 딱 쉬운 사진으로 구하라는 것 아냐? 그래야 일이 잘못되었을 때, 우리도 둘러대기 좋을 것 아닌가?”

“아……!”

박대기가 이내 감탄사를 터뜨렸다.

“과실범죄를 제외하고, 모든 범죄에는 ‘고의성’이라는 요건이 필요해. 신빙성 있는 물증이 있었기에, 우리도 착각했다고 적당히 사과하면 끝날 문제야.”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박대기의 대답에 김나대가 다시 표정을 풀었다.

“좋아. 나머진, 믿고 맡기도록 하지.”

“예, 걱정 마십…….”

벌컥!

순간 노크도 없이 출입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아빠!”

“오! 나래야!”

이내 갑작스레 방문한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한 김나대가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신의 품에 안기는 김나래의 등을 연신 쓰다듬으며, 김나대가 박대기를 향해 휘휘 손사래 쳤다.

“이만 나가 봐.”

“예, 국장님.”

깊게 허리를 숙인 박대기가 이내 출입문을 빠져나갔다.

쿵!

작은 소음과 함께 출입문이 닫히자, 김나래를 품에서 떼어 낸 김나대가 씨익 미소 지어 보였다.

“우리 딸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실까?”

“당연히 아빠 보고 싶어서 왔죠!”

“요 녀석!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말을 해라!”

김나대가 손을 들어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헤헤’ 하고 한차례 웃음을 터뜨린 김나래가 말한다.

“아빠 보러 온 것도 있고, 겸사겸사 일전에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되어 가나 해서…….”

“그게 진짜 본목적이구만.”

김나대가 자못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김나래가 자신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를 부리자, 마지못해 표정을 푼 김나대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걱정 안 해도 된다. 이미 모두 다 조치해 놨으니. 아마, 니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될 거야.”

“네? 그럼…….”

“적당한 스캔들 기사 하나 부탁했다. 정말로 올해 결혼할 생각이라면, 이참에 언론에 공개적으로 발표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해명을 위해서라도 직접 움직이겠지. 어느 쪽이든, 베일에 꽁꽁 감춰져 있던 진실이 어느 정도는 수면 위로 떠오를 게다.”

“사랑해요, 아빠!”

김나래가 다시 한 번 김나대의 품에 안겨 들었다.

씁쓸하게 미소 지은 김나대가 딸의 등을 토닥이며 말한다.

“어지간히 놈이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하기야, 그 정도 인물에 능력이라면, 어디 내놓아도 빠질 것 없기야 하지. 집안이 좀 걸리긴 하지만…….”

“벌써 집안까지 알아보셨어요?”

고개를 파묻고 있던 김나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굳이 알아보고 할 것도 없이, 고아에 고졸 출신이라는 건, 국민들 대부분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니? 그것들이, 그 친구의 스타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요소이기도 하고.”

“아!”

이어지는 김나대의 말에 김나래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은 기다려 보자꾸나. 기자들이 떡밥을 물어 오면, 그때부터 움직여도 늦지 않을 테니까.”

김나래가 밝은 미소로 대답한다.

“네! 그럼 저는 아빠만 믿고…….”

똑, 똑, 똑.

순간, 다급하게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두 부녀가 출입문을 향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들어와.”

“국, 국장님!”

김나대의 말과 동시에, 벌컥 하고 출입문이 열리더니, 아까 나갔던 박대기가 다시 국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인상을 찌푸린 김나대가 말한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방정맞게…….”

“강, 강도윤 검사 결혼 상대가 밝혀졌습니다!”

“……!”

순간 부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 봐.”

김나대의 물음에 한차례 짧게 심호흡한 박대기가 대답한다.

“처음에는… 워낙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 빅뉴스다 보니, 다른 쪽에서 먼저 냄새를 맡고 터뜨린 기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박대기가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리자, 김나대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탕탕 쳤다.

“속 시원하게 말해 봐!”

“그래요, 빨리 말해 봐요!”

옆에 있던 김나래도 눈을 앙칼지게 치켜뜨며, 재촉했다.

꿀꺽하고 마른침을 삼킨 박대기가 이내 말을 잇는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봤을 때, 특정 언론사가 정보를 독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도 언론 3사야! 독점이라니! 지금이 뭐, 80년대 땡전뉴스라도 되는 줄 알아!? 대통령이 뒤에서 버티고 있기라도 하다는 거야, 뭐야!?”

김나대의 호통에, 김나래도 제 허리에 척 하고 손을 올렸다.

워낙 허무맹랑한 얘기였기에, 김나래는 기도 차지 않았다.

이곳이 어디인가?

보수의 중심 3사 중 하나, 중심일보다.

설령 상대가 다른 3사 중 하나라고 해도, 정보 독점은 있을 수 없다.

그따위 행동을 했다간, 여타 다른 언론사들의 분노를 한 몸에 받아 내야 할 테니까.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박대기가 이내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은 아니지만, 그다음은 됩니다!”

“…뭐?”

“아니… 어쩌면, 언론계로 한정하면, 대통령님보다 더한 파워를 가진 분이실지도…….”

“설, 설마…….”

순간 벼락이라도 관통한 듯, 김나대가 온몸을 잘게 떨었다.

묘한 분위기 속에, 김나래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귀신같이 들어맞곤 한다.

두 사람의 생각에 쐐기를 박는 박대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박보군 총리님. 그리고, 조국일보…….”

무거운 침묵 속, 박대기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결혼 상대가 다름 아닌… 박보윤 검사였습니다.”

털썩!

다리 힘이 풀린 김나래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김나래의 목소리가 방 내부에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애초에 성사 자체가 되지 않는 게임의 허무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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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5화

해가 한 번 더 바뀌어.

어느덧, 연분홍빛 벚꽃의 파도가 세상을 뒤덮기 시작한 4월.

드디어 내일이, 도윤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가장 먼저 식장에 도착해 있던 호식이, 도윤의 위아래를 쓸어보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휘익- 우리 친구, 멋진 건 알았지만 턱시도까지 빼입으니, 연예인 저리 가라 할 수준인데?”

로비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던 도윤이 호식을 돌아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언제까지 신혜 씨 기다리게 할 거야?”

“나야 뭐, 누구누구 때문에, 일거리가 산더미라 당장은 힘들겠네.”

호식의 대답에 한차례 멈칫한 도윤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어 보였다.

“너, 정 그러면 굳이…….”

“아, 오해는 하지 말고.”

호식이 재빨리 손사래 치며 말을 잇는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나도 기업인 집안사람이잖아? 가업은 물려받지 않더라도, 한번 제대로 경험은 해 봐야지.”

“그런 거면 차라리 니가 회장을 하는 게…….”

“니가 주인이 되지 않으면 전혀 의미 없네요.”

도윤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호식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이제 그만 쉿. 기분 좋은 날, 골치 아픈 얘기는 잠시 접어 두자고. 그리고, 굳이 이 일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치킨집 대주주까지는 가능할걸?”

“…….”

입을 다문 채 멍한 표정을 짓는 도윤을 보며, 호식이 두 손바닥을 쫘악 펼쳐 보였다.

“내가 말했지? 호식이 치킨, 대박 칠 거라고.”

“…….”

“역시 사람은 꿋꿋하게 한길만 파야 돼. 결국 이렇게 봄날이 오잖아?”

가만히 듣고 있던 도윤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내 말 안 들으면, 앞으로 길어도 10년. 그 안에는 반드시 후회할 거다.”

“헹이다! 배 아파서 하는 말인 거 모를 줄 알고?”

호식이 장난스럽게 가운데 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도윤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이번에는, 홀 입구 쪽에서 박판섭과 배영준이 걸어왔다.

“축하합니다, 강 검사님.”

먼저 손을 내미는 배영준을 보며, 도윤이 옅게 미소 지었다.

전생이라고 해야 할까?

회귀 이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연.

새로운 인연이나 다름없는 호식이나 박판섭과 달리, 배영준은 이전의 생에서도 인연이 있던 존재였다.

그만큼, 도윤에게도 어떤 특별한 감정이 있었다.

“이제 말 편하게 하시죠, 배 기자님. 아니, 영준이 형.”

도윤의 말에 배영준이 멈칫했다.

“편해지면 말 놓겠다더니, 이러다가 평생 강 검사님이라 불리겠습니다.”

“동감.”

옆에 서 있던 호식도 짧게 거들었다.

순간 멋쩍게 미소 지은 배영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내, 내가 그랬나?”

“말 나와서 하는 말이지. 우리보다 나이도 몇 살이나 많은 형이! 그리고, 도윤이 저놈 입장에서도, 훨씬 이득일걸? 장차 언론사 회장을 넘어, 어쩌면 저 박보군 총리님을 이어 언론인 출신 국무총리가 되실 수도 있는 분인데!”

“야! 너무 오버한다!”

배영준이 당황한 표정으로 손사래 쳤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박판섭이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 일련의 일들을 통해, 배 기자님의 능력은 저도 충분히 몸소 느꼈습니다. 배 기자님은,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으신 분입니다.”

“박 사장님까지…….”

배영준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호식이 이번에는 박판섭을 돌아보며 말한다.

“와, 그런데. 형님이 사장님 소리 들으니까 이상하다. ‘보스’나 ‘두목님’이 딱인데…….”

“풉!”

순간 헛웃음을 터뜨리는 배영준을, 박판섭이 슬며시 노려봤다.

“…딸꾹.”

배영준이 놀라 딸꾹질을 해대기 시작한다.

도윤이나 호식과 달리, 아직은 박판섭이 많이 낯선 배영준이었다.

장난이었다는 듯 곧바로 표정을 푼 박판섭이 호식을 돌아보며 말한다.

“나도 언제까지 형님 소리 듣고 살 수는 없지.”

“그거, 전국에 있는 조폭들의 수장인 형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이상한데요?”

‘전국에 있는 조폭들의 수장’이라는 말에 박판섭이 입을 다물었다.

호식이 조금 굳은 얼굴로 말을 잇는다.

“검찰 쪽에서도 형님 쪽만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어요. 이번 일들로,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전국 조직 대통합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그들의 귀에도 들어갔으니까요.”

“…그래서, 조직을 해체하려고 하네.”

“……!”

예상치 못한 박판섭의 대답에 호식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도윤도 저런 대답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그와 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형님. 그냥 참고만 하시라는 말이지. 이런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닌…….”

호식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박판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언제까지 조폭 타이틀로 일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지.”

호식이 도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좋은 날에 이런 얘기 하는 거… 나도 조금 그렇지만, 마침 영감님도 자리에 같이 있으니, 마저 하지.”

“얼마든지요.”

도윤이 옅게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도윤을 향해, 박판섭이 말을 잇는다.

“영감님이 예전에 했던 얘기가 있지. 자식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는 말자고. 자식은, 아비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

“그런 자식들에게 ‘건달’이니, ‘조폭’이니, 뭇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아비의 모습을 보인다면, 나도 싫을 거야. 더 나아가, 만약 ‘아빠처럼 멋진 조폭이 되겠어!’ 따위의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뒷목 잡고 쓰러질지도 모르지.”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는 박판섭을 보며, 호식이 동감한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박판섭이 진지한 얼굴로 계속 말한다.

“내 자식에게만큼은,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아비가 되고 싶네.”

“…….”

“내 자식만큼은, 나와 같은 인생을 살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내 작은 바람이야.”

박판섭이 도윤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그래서 결정한 일이네. 전국에 있는 모든 깍두기들이 나와 같은 생각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은 나와 같은 생각일 거라 생각하네. 어차피, 그런 생각을 가진 놈들은 내가 당장 조직을 해체하더라도, 오히려 이걸 기회라 여기고 다시 세력을 끌어모으겠지. 혹시나 그놈들이 사고를 치면…….”

박판섭이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잘 좀 부탁하네, 영감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어떤 놈들이 있는지는, 이 머릿속에 다 들어가 있으니까요.”

도윤이 제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씨익 미소 지었다.

안도의 미소를 지은 박판섭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고마웠네, 영감님. 결혼, 진심으로 축하하고. 비록 조직은 해체하지만, 나를 포함한 내 밑에 수하… 아니, 직원들은 영감님이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달려갈 거야.”

도윤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무서운 형님들 도움이 필요할 일 자체가 없었으면… 하는 게 제 소원이지만요.”

“뭐, 그건 나도 동감이야.”

박판섭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때, 배영준이 고개를 갸웃하며 호식에게 묻는다.

“그런데… 신혜 씨는, 왜 같이 안 왔어?”

“아, 그게…….”

“뭐야? 영준이 형한테 얘기 안 했어?”

“아… 하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는 호식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도윤이 배영준을 바라본다.

“신혜 씨, 배가 너무 불러서 도저히 올 수가 없었다고 하네요.”

“배가 너무 불렀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던 배영준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과속?”

배영준의 말을, 박판섭이 받았다.

주변의 집중되는 시선을 느끼며, 호식이 제 머리를 긁적였다.

“봉투 하나 더 준비해야 겠구먼.”

박판섭이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주억였고.

“뭐가 그리 급하다고, 이리들 빨리 가는 건지…….”

배영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하하하하하.”

호식이 연신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 때.

“오빠!!!”

구원투수의 등판에, 호식이 눈을 빛내며 몸을 돌렸다.

“오, 단비야!”

그제야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의 단비를 발견한 배영준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저 집안은 유전자 자체가 우월한 것 같아요.”

“이번에도 동감이네.”

박판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막 등장한 단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나밖에 없는 오빠의 결혼식이라고.

평소 잘 하지 않는 화장까지 한 단비의 모습은, ‘귀여움’과 ‘예쁨’이 동시에 공존했다.

예쁘기로 소문난 보윤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의 외모였다.

“아, 안녕하세요.”

도윤의 동료들을 발견한 단비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단비는 언제 봐도 이쁘다니까?”

호식이 흐뭇한 미소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면 지 동생인 줄 알겠네…….”

“오빠나 신경 써! 내가 이런 날은, 머리도 좀 만지고 외모에 신경 쓰라고 했지!?”

순간 단비가 도윤을 향해 버럭 소리치자, 도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식장에서 기본 메이크업까지 다 지원해 주는데, 지가 불편하다고 안 했대요.”

“뭐얏!?”

마치 고자질하듯,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리는 호식의 목소리를 들은 단비가 도끼눈을 떴다.

홱 하고 고개를 돌린 도윤이 그쪽을 노려보자, 호식이 능청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식장 좋네. 나도 여기서 결혼할까?”

“벌써부터 언니 고생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 얘기도 이리 안 듣는데, 오죽할까! 안 되겠어. 오빠 신혼여행 갔다 오는 대로, 내가 철저하게 교육을 시켜야…….”

단비의 잔소리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머지 일행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어흠, 신랑은 봤으니, 이제는 신부도 봐야겠지?”

“식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그 전에 자리나 좀…….”

“아, 나도 같이 가요!”

박판섭과 배영준을 뒤따라, 호식도 황급히 자리를 떠나려 한다.

그때.

“곧 식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축하를 위해 찾아주신 하객분들은 지금 바로 식장 안으로 입장하여 자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로비에 울려 퍼지자, 단비가 재빨리 도윤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가! 언니 기다리겠다!”

“신랑분, 입장해 주세요.”

곧이어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옷매무새를 바로 한 도윤이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식장 안에 입장하기 시작한다.

짝, 짝, 짝, 짝, 짝.

카펫 위로 걸음을 옮기는 도윤의 주변으로, 박수갈채가 터져 나온다.

“잘생겼다!”

“잘 가요, 강 검사님!”

“품절남 대열 합류 축하!”

여러 사람들의 축하 속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도윤이 이내 사회자 앞에 섰다.

그리고…….

“신부, 입장해 주세요.”

곧이어.

깔끔한 정장 차림에, 올백으로 머리를 넘긴 박성준 회장의 손을 잡고.

이제는 평생을 함께하게 될 반려.

그녀가 천천히 입장하기 시작했다.

도윤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마침내, 도윤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

옅은 화장에, 웨딩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보윤이 면사포 뒤로 미소 짓는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성대한 결혼식이,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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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6화

9년 뒤.

노란색 코트에 앙증맞은 신발.

새하얀 피부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누가 봐도 ‘귀엽다.’라며 감탄사를 자아낼 만한 여자아이가 가방을 메고 걸어간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그 여자아이가 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의 손을 꼭 잡고, 걸음을 옮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남자아이 또한, 그 외모가 여자아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머, 쟤들 좀 봐요.”

“이뻐라… 둘이 닮은 것 같은데, 남매겠죠? 어느 집 애들일까요?”

“동생 챙기는 것 좀 봐. 귀여워 죽겠네요.”

초등학교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아들딸들을 기다리고 있던 젊은 엄마들이 연신 그 아이들을 힐끔거리기 바빴다.

남매의 외모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더군다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인파 또한 상당히 많았다.

“엄마!”

순간 땅바닥만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던 사내아이가 고개를 발딱 치켜들더니, 그 작은 발을 놀려 한 곳을 향해 뛰어간다.

“같이 가, 강태하!”

여자아이도 그에 뒤질세라, 뜀박질을 시작했다.

남매가 향하고 있는 곳.

그 끝에는, 한 명의 여성이 옅게 미소 지은 채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여성에게 이동된다.

“세상에…….”

“어디 연예인이래요? 뭐가 저렇게 이쁘데?”

“모전자전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네요. 애기 엄마 얼굴이 저러니…….”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할 때, 누군가 고개를 갸웃한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진짜 뭐 탤런트나 그런 쪽 종사자신가?”

“저도 낯이 많이 익네요. 요즘 티브이에 나오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예전에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엄마!”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한 사내아이가 여인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강태하, 엄마가 위험하게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지?”

이제 갓 서른이나 넘었을까?

옥에 티 아닌 옥에 티라면, 키가 상당히 작다는 것이었지만 그런 신체적 조건도 여인의 미모는 숨길 수 없었다.

여인이 고운 아미를 찡그리자, 사내아이가 금세 울상이 되었다.

“엄마가, 너무 반가워서…….”

“어허. 길거리에서 우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재빨리 사내아이를 안아 든 보윤이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강태하! 엄마 힘들잖아! 당장 안 그쳐?”

입을 뾰루통하게 내밀고 있던 여자아이가 제 허리에 앙증맞은 손을 척 올려놓았다.

“아……! 저 생각난 것 같아요! 그 왜. 예전에 법조계의 꽃이라는…….”

소위 8학군이라 불리는 있는 집 자식들이 다니는 학교였기에.

누군가 여인의 정체를 금세 알아챘다는 듯, 소리친다.

“자, 갈까?”

이윽고, 양손에 남매의 손을 꼭 쥔 여인이 주변의 시선을 뒤로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길 한쪽에 세워 둔 검은색 고급 세단 앞에 멈춘 여인이, 남매를 뒷좌석에 태웠다.

부르르릉!

부드러운 엔진 시동음과 함께, 이내 차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아빠는 언제 와?”

“아빠 지금 바쁘시다고 했지!”

운전석에 오르던 여인이 멈칫한다.

“괜찮아, 성아야.”

“엄마?”

움찔 몸을 떠는 여자아이를 향해 싱긋 미소 지어 준 여인이 사내아이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태하, 아빠 보고 싶어?”

“응! 보고 싶어!”

“그런데 어쩌지? 아빠가 지금 많이 바빠서, 당장은 우리 태하랑 놀아 주러 못 오실 거 같은데.”

사내아이의 얼굴이 다시 울상이 되었다.

“아빠 이제 백수인데, 왜 그렇게 바빠?”

“백, 백수…….”

여인의 머리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우리 아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을까?”

“아, 아파!”

여인이 손가락을 들어, 사내아이의 볼을 쭈욱 하고 잡아당겼다.

“아빠가 왜 백수야!?”

옆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도 사내아이의 반대쪽 볼을 같이 잡아당겼다.

“으프유(아파요).”

이내 두 사람이 손을 내려놓자.

새빨개진 양 볼을 연신 문지르던 사내아이가 묻는다.

“아니 나는, 엄마처럼 검사가 젤루 멋진 직업인데, 그만두고 다른 거 한다니까…….”

사내아이가 울먹이며 말끝을 흐렸다.

무어라 말하려던 여자아이도 멈칫하더니,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여자아이도 아빠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두 아이를 잠시 바라보던 여인이 말한다.

“오늘 저녁에, 아빠 오라고 할까?”

“정말!?”

“정, 정말요?”

남매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자, 여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마침 엄마도, 아빠가 보고 싶은 참이니까.”

“와!!!!!!!”

이내 차량 내부에 환호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즐거운 얼굴로 두 아이를 바라보던 여인이 핸들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차량 룸미러 아래.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자그마한 가족사진에는, 네 사람의 가족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물론 가장으로 보이는 사내의 얼굴은…….

아주, 아주, 익숙한 사람의 것이었다.

* * *

널따란 사무실 한가운데.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던 서류들을 챙겨 넣으며, 중년 사내가 말한다.

“이걸로 모든 서류 절차까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변호사님. 아니, 이제 부회장님이라고 불러 드려야겠군요.”

중년 사내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내.

호식이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세월이 흘러, 장난기 가득하던 얼굴에는 제법 진중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호식을 바라보며, 중년 사내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런데… 명성의 이름은, 정말로 완전히 버릴 생각이십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지요.”

일 초의 망설임도 없는 호식의 대답에, 중년 사내가 못내 아쉽다는 듯 말을 잇는다.

“변호사님도 아시겠지만, 이쪽 바닥이라는 게 기존에 쌓아 둔 평판이라든가, 브랜드 가치, 회사 네임드 따위가 제법 크게 작용하는 바닥이지 않습니까? 비록 한때 휘청거리긴 했지만, 오상규 씨가 일부 이미지를 회복해 놓은 것도 있고…….”

“아, 괜찮습니다. 저희는 이미, 걸어 다니는 1인 브랜드를 가지고 있거든요. 물론, 아주 좋은 이미지 쪽으로.”

“…예?”

호식의 대답에, 중년 사내가 멍하니 반문한다.

힐끗 시간을 확인한 호식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그 순간.

사무실 출입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내 사무실 내부로 들어서는 사내.

올 블랙 정장 차림에, 멋들어지게 앞머리를 세워 넘긴, 세월이 흘러 이제는 성숙한 느낌마저 물씬 풍기는 사내였다.

“왔냐?”

호식의 반응에 얼떨결에 따라 일어서던 중년 사내가, 지금 막 들어서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당, 당신은…….”

중년 사내는 기본적으로 기업 관련 업무를 맡아 보고 있었지만.

그 대부분의 일이 법과 관련된 일이다 보니, 법조계 인사들 또한 상당히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내는, 법조계 인사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강, 강도윤 부장검사님?”

“그 친구, 이제 검사 아니에요.”

“…예?”

옆에 있던 호식의 말에, 중년 사내가 멍하니 반문했다.

“사표 쓴 지 벌써 몇 달은 지났거든요. 모르고 계셨어요? 이쪽 바닥에서는, 나름 핫 이슈였는데.”

“아, 제가 한국으로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

정신을 차린 중년 사내가 재빨리 손을내밀었다.

“이번 그룹 인수인계 건을 맡고 있는 정상수라고 합니다.”

“강도윤입니다.”

마주 고개를 숙인 사내, 도윤이 중년 사내의 손을 맞잡았다.

“영광입니다. 설마 이런 곳에서, 검찰계의 살아 있는 전설을 뵙게 될 줄은…….”

“아주 그냥 뛰다 못해 날아가겠습니다. 그놈 얼굴에 그리 금칠하지 않으셔도 되요.”

호식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이죽거리자, 중년 사내가 표정을 굳혔다.

“아니, 진심입니다.”

“…….”

“궁서체로 말하는 제 진심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도윤이 진성 빠돌이셨구나.”

작게 중얼거린 호식이 시선을 거두자.

중년 사내가 도윤을 향해 계속 말을 잇는다.

“그런데, 강 검사님이 여기는 왜…….”

“걔가 회장 할 거예요.”

“예?”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중년 사내가 멍하니 반문했다.

그제야 잠자코 서 있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새로운 그룹 회장은, 부끄럽지만 제가 맡게 될 것 같습니다.”

“……!”

중년 사내, 정상수의 두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그 말씀은…….”

“이제 아시겠죠? 브랜드 이미지 따위, 왜 걱정하실 필요가 없다고 한 건지.”

“…….”

호식의 말에 정상수가 입을 다물었다.

회사 이미지?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세가 기울 대로 기운 ‘명성’이라는 브랜드보다, ‘강도윤’이라는 1인 브랜드의 가치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제품의 품질이나 디자인 같은, 회사 역량으로 지금껏 쌓아 온 이미지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지금의 이 나라에서.

‘강도윤’이라는 이름은 국민들에게 신뢰의 아이콘이나 다름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서민 출신의 검사가, 뼛속까지 금수저인 재벌들을 연이어 구속시키고.

썩을 대로 썩은 정치판마저 모조리 뒤집어엎어, 국민들의 영웅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기업을 세우겠다고 한다.

‘역효과? 아니야. 오히려, 서민지원 사업 같은 걸 대대적으로 벌여, 초기 이미지만 잘 쌓아 두면, 더욱더 시너지 효과를…….’

정상수의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순식간에 두드려진다.

이쯤 되면, 정상수 또한 이곳에 투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상수가 못내 아쉽다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쩌면 훗날, 대권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 손에 꼽히는 인물이 눈앞에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도 ‘이런 사람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된다면…….’ 따위의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지 않던가?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호식이 입을 열었다.

“아,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겠는데. 이놈, 이제 그룹 회장으로 만족할 만한 놈은 아니에요.”

“그 말은…….”

말끝을 흐리는 정상수를 보며, 호식이 씨익 미소 지었다.

“뭐 한창 잘나갈 때 검사 자리도 때려치웠는데, 회장 자리 하나 못 때려치울까요?”

“…….”

잠시간의 고요한 침묵을 지나.

아무런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도윤을 보며, 정상수가 묻는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룹 이름은 혹시, 생각해 두신 바가 있으신지요?”

“그룹 이름은…….”

조용하게 서 있던 도윤이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비단그룹으로 하겠습니다.”

* * *

홀로 남은 사무실.

소파에 몸을 묻은 도윤이 머리를 뒤로 기댔다.

창가로는,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노을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피곤하네…….”

도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정말로, 쉼 없이 달려왔다.

소설에나 나올 법한 회귀를 겪고.

팔자에도 없는 검사가 되었으며.

불가능할 거라 생각되던 재벌들과 정치인들을 연이어 구속시켰다.

그리고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가정까지.

우우웅, 우우웅.

순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도윤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윽고, 휴대전화 화면에 떠오른 발신자를 확인한 도윤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응, 나야.”

“오늘은 올 수 있지? 이제 한계야. 오늘마저 못 온다고 하면, 애들 폭동에 못 이겨, 거실 한복판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는 부인을 볼 수 있을 거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쁘지 않은데?”

“까분다?”

“갈게.”

“…….”

순간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도윤이 멈칫한다.

“…진짜 온다고?”

“그래.”

“준비 좀 하고 있을게!”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이내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도윤의 입가에, 완만하게 휜 곡선에 그려졌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인생에서, 이것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을까?

이제는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검사’ 강도윤이 아닌.

‘회장’ 강도윤으로 말이다.

“행복하다.”

기분 좋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도윤의 말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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