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16화
A&R팀에서 ‘불을 켜’만 가지고 회의를 했다는 건 진짜였다. 대강의 파트 분배도 결정되어 있었고, 수정 의견도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다. 심지어 컴백까지 스케줄도 어느 정도 나와 있었다.
타이틀곡 회의가 순식간에 끝났기 때문에, 남은 시간에 ‘불을 켜’의 디테일에 관한 회의를 이어갔다.
그렇게 회의가 딱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지원팀에서 링크가 왔다.
[TRV 연계 상담 센터 소개 보내드립니다. 톡이든 전화든 이 번호로 주시면 가장 빠른 시간에 상담 잡아드리겠습니다.]
해달라는 건 다 해주겠다는 박희택 사장의 말은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상태가 다 회복되어서 상담 같은 건 필요 없을 것 같은 기분이지만, 언제 내 멘탈이 박살 날지 모르니까 링크로 상담 센터 소개를 잘 확인해 뒀다.
어쨌든 당분간은 그냥 댓글이고 뭐고 인터넷 자체를 안 할 생각이었다. 국선아 때는 내가 너무 어렸다.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닌데 매일 악플을 하나하나 읽고 있었다. 그때는 그게 날 교정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냥 안 보는 게 답이었다.
* * *
아직도 회사에 계속해서 내가 진짜 합류하는 거냐는 기자들과 팬들의 연락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멤버들에게 일단 입조심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대응은 회사에서 할 거니까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마. 해도 된다고 할 때 해. 알겠지?”
“근데 형, 왜 아직도 형이 운전해?”
굳이, 굳이 또 한 차에 다 멤버들이 끼어 타고 숙소로 돌아가며 민지호가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계약서 쓸 때까지는 매니저지.”
내 말에 조용하던 안주원이 한마디 했다.
“그럼 빨리 쓰고 와.”
“야, 법무팀은 괜히 있냐. 다 따져봐야지.”
반발이 너무 심해서 합류를 못 하게 될 경우까지 전속계약서에 넣어야 하니까, 계약서가 법무팀을 통과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어쨌든 다음 활동이 결정되어 신이 난 멤버들이 시끌시끌했다. ‘불을 켜’를 틀어 놓고 자기 파트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뜬 가이드가 수치스럽다.
아까 회의에서 재분배를 하며 내 파트가 좀 생겼다. 분위기상 불러야 될 것 같아서 내 파트를 부르고, 다음 파트였던 황새벽이 노래를 부르는 대신 날 보며 놀라서 말했다.
“해원아, 너 오늘 되게 딴딴하게 못 부른다. 노래.”
……칭찬인가? 욕인가? 둘 다인가?
내가 갈등하는데 박선재가 말했다.
“근데 진짜 평소보다 안정감이 있어.”
곧 죽어도 잘한다는 말은 안 나오나 보다. 안다, 알아.
어쨌든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성대가 건강하니까 왠지 보컬에 자신이 생긴다. 그렇다고 막 불러제끼면 성대도 상하고, 남의 귀에도 고문이니까 그러진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서 애들만 내려놓고 가려는데, 민지호가 나를 돌려세웠다.
“오늘 같은 날 어떻게 그냥 가려고 해.”
“그럼 뭐해, 너네랑 술도 못 먹잖아.”
멤버 중 같이 술 마실 나이가 된 사람이 황새벽 하나다. 내가 투덜거렸다.
“하, 얘네 언제 커서 술 한잔 같이하냐.”
내 말에 옆에서 신지운이 빈정거렸다.
“와, 되게 어른이신가 봐여. 형 거의 12월 끝날 때 태어나지 않았냐?”
“12월 28일.”
“며칠만 늦게 태어났으면 나랑 동갑이네.”
“아니지. 네가 8개월을 일찍 태어났어야 동갑이니까 많이 어렵지.”
국선아 때도 이걸로 신지운이랑 말싸움했던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안주원이랑 친구로 지내니까 족보 정리 잘해야겠다.
아무튼 그사이에 박선재가 박스로 사다 놨던 과자를 꺼냈다. 고딩만 4명이다 보니 숙소에 몇 명 더 숨어 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음식이 사라진다.
민지호와 박선재가 과자로 케이크 비슷한 걸 만들고 있는 걸 보더니 안주원이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른 손으로 슥슥 몇 개를 빼고 정리해서 탑을 쌓았다. 확실히 전공자라 그냥 과자를 쌓아도 딴 사람보다 좀 이쁘게 쌓았다.
숙소에 초는 있는데 라이터가 없어서 다들 날 돌아봤다. 내가 라이터를 꺼내 초에 불을 붙이고 있으니 한효석이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근데 해원이 형, 합류 확정되면 담배 끊어야 돼요.”
“어? 뭐?”
잘못 들었나.
“요즘 다 금연 구역이잖아요. 그렇다고 아이돌이 건물 나가서 흡연 구역에서 담배 피울 거예요?”
내가 다급하게 머리를 굴리는데 황새벽이 말했다.
“차에서 피우는 건 꿈도 꾸지 마라.”
“잠깐만.”
“빨리 불 끄고.”
금연을 해야 한다는 건 생각을 못 해봤는데…….
나는 일단 불을 껐고, 내가 너무 상심해 보였는지 옆에서 멤버들이 낄낄거렸다.
그러고 나서, 다들 누구랄 것도 없이 소파로 달려갔다. 사람은 7명, 소파는 3자리. 치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다. 애초에 누구 하나 들어가서 씻거나 잘 생각이 있는 사람이 없다. 얘네 은근히 자기들끼리 모여 있는 걸 좋아하는 거 아닌가 싶다.
나는 한발 늦어서 바닥에 앉았다. 과자를 집어 먹으며 황새벽이 물었다.
“근데 무대는 어떻게 하게?”
“몰라. 생각 안 해봤어. 안 되면 방송사고 내는 거지.”
옆에서 민지호가 말했다.
“마스크 써.”
“그건 좀 이상하지 않겠냐?”
“그래도 일단 무대에 올라가긴 해야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과자는 순식간에 없어졌다. 멤버들이 과자를 더 꺼내려고 일어서니까 한효석이 말했다.
“안 돼, 관리해야지.”
“아, 오늘은 좀 먹자.”
민지호가 시비를 걸어서 내가 민지호 입을 손으로 막고 한효석에게 말했다.
“그래도 이 마이웨이들 중 하나는 FM이라 다행이다.”
내 말에 한효석이 멈칫하더니 날 봤다.
“왜?”
내가 물어보니까 한효석이 말했다.
“이제 제 편 들어줄 사람 있구나 싶어서요.”
그 말을 듣고 나니 한효석도 피곤했겠구나 싶었다. 솔직히 여기 있는 놈들이 그렇게 말 잘 듣는 놈들은 절대 아니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성공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이어지는 한효석의 진지한 말에 분위기가 확 가라앉는다. 뭐, 분위기 깨는 건 눈치 없지만 그 말을 한효석이 하니까 무게감은 있다.
한효석이 다니는 중앙예고는 대한민국 최고의 예고이고, 예술가로서는 엘리트 코스다. 거기까지 가는데 얼마나 죽기 살기로 노력했을지는 안 봐도 알 수 있다.
아이돌은 그걸 포기하고 선택한 길이었다.
그때 진지함을 깨고 민지호가 깐족거렸다.
“난 음악이 하고 싶은 일인데.”
“그 말이 아니잖아.”
“뭐. 어느 면이 아닌데.”
또 싸운다, 또.
내가 피곤해서 말했다.
“야, 그렇게 계속 싸울 거면 그냥 둘이 시원하게 주먹질 한번 해. 간만에 스케줄도 없는데.”
“…….”
“……제가 그냥 이기죠.”
한효석의 말에 민지호가 코웃음 쳤다.
“미쳤냐?”
“난 전공이 있는데, 근육량이 비교가 안 되지.”
“효식아. 싸움은 근육으로 하는 게 아니야.”
“효석이라고, 한효석.”
또 마지막까지 꿍얼꿍얼거린다. 아, 애새끼들. 언제 크냐.
* * *
결국 너무 늦어져 집에 못 가고 나는 거실 바닥에서 잤다. 일요일에 박희택 사장 전화로 깬 이후 제대로 잔 건 처음인 데다, 정신 상태까지 좋아서 거의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깼다.
일어나 보니까 나 빼고 나머지는 다 모처럼 푹 자고 있었다. 나는 오늘 유일하게 외부 스케줄이 있는 신지운을 깨웠다.
조용히 흔드니까 잠이 덜 깬 신지운이 눈을 다 못 뜨고 일어났다.
오늘이 올해 초부터 촬영한 웹드라마의 마지막 촬영이었다.
본인은 전혀 연기에 관심이 없지만, 퍼스트라이트의 성공이 불투명해지니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연기 쪽을 밀어줬다.
신지운은 본인이 댕댕이라고 끈질기게 밀고 있기 때문에 양아치 역할을 맡은 걸 억울해했다. 아무래도 거울 보면 다른 사람이랑 다르게 보이는 것 같다.
신지운의 연기 스케줄은 TRV의 배우 매니지먼트 소속 매니저가 따로 담당하고 있었다. 매니저가 도착해 먼저 나갔던 신지운에게서 지갑을 안 들고 나갔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나가는 김에 지갑을 들고 차로 나왔다.
차 문을 여니까 오늘이 마지막 촬영이라 신지운은 차 안에서 X이라이브를 켠 상태였다. 신지운이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지갑 놓고 갈 뻔했어. 아니야, 나 안 덜렁거려. 오늘만 까먹은 거야. 왜 자꾸 덜렁이래?”
신지운이 채팅을 읽으며 팬과 티격태격하다가 나한테 손을 뻗었다.
아, 지갑 주러 왔지.
얼어 있다가 급하게 들고 있던 지갑을 주려는데 손에 힘이 빠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얼른 지갑을 주워서 다시 신지운에게 건네줬다. 손이 덜덜거리고 떨렸다. 신지운과 눈이 마주쳤는데, 좀 굳으려다가 프로답게 다시 싱글싱글 웃었다.
“와, 감사합니다. 매니저 형이 지갑 가져다줬어.”
신지운이 말하는 사이에 나는 서둘러 차 문을 닫았다.
와 씨, 큰일 났는데.
회사에서 통과한 기획안대로라면, 나는 무대는 안 서도 회사의 자체 제작 예능에는 출연해야 한다.
본격적으로 어그로를 끌어 볼 생각인데, 신지운이 X이라이브를 진행 중이라는 걸 알자마자 몸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지갑을 건네주는 손에도 힘이 쭉 빠졌다.
두 주 내로 자체 예능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 상태로는 안 될 것 같다.
* * *
X이라이브 카메라에는 지갑을 건네주는 장면은 거의 방송 직후에 편집되어 몇몇 SNS에 업로드되었다.
[지운이 안 그렇게 생겼는데 은근 물건 잘 놓고 다니네]
[매니저님 수전증ㅋㅋㅋㅋㅋㅋ]
[아니 근데 손 왜 이렇게 예뻐ㅋㅋㅋㅋㅋㅋㅋㅋ]
[국혐이 아님? 합류할지도 모른다니까]
[↳이걸 진짜 한다고?]
[↳↳국혐이 멘탈 센 거 하나는 진짜 인정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 생각 아예 안 하는 성격이라…….]
[근데 손 왜 저렇게 떨어?]
[↳약 같은 거 아니지?]
[↳설마요ㅋㅋㅋㅋㅋㅋ]
[↳↳이건 너무 갔지 그건 범죈데. 그리고 약 빠는 사람 피부가 저렇게 깨끗할 수가 없음]
[↳↳그럼 왜 저래?]
[↳↳↳긴장했겠지]
[↳↳↳↳국혐이 눈을 봐라 긴장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님]
[아니 근데 그러고 보니까 국혐이 눈 본 적이 없네]
[그러네]
[애초에 얼굴 나온 적도 없지 않아?]
[애들이랑 있을 때 보면 항상 마스크하고 모자 쓰고 있던데]
[매니저가 그렇게 수상하게 다녀도 돼……?]
* * *
큰일 났다.
이미 TRV에서는 내 프레젠테이션대로 예능을 준비하고 있으니 더 미룰 수도 없었다.
나는 혹시 싶어서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날 찍어봤다. 괜찮은 느낌이라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다시 찍으려 하니까 또 손에 힘이 빠졌다.
“……와 씨, 내가 날 찍는 것도 못 한다고?”
2년 동안 카메라를 켜보질 않았으니 내가 이럴 줄 몰랐다.
이거…… 진짜 망했는데?
나는 다시 모자와 마스크를 썼다.
그 후 양이형의 작업실로 가느라 버스를 탔는데 황새벽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황새벽이 물었다.
-어디야.
“작업실 가는데. 아, 전화 잘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내 카메라로도 날 못 찍거든. 그러니까 오늘 내로 셀카 20장, 1분 이상 동영상 찍어서 보낼게. 못 찍으면 너한테 백만 원.”
아마 신지운 연락을 받고 걱정돼서 전화했을 황새벽이 약간 황당해하며 말했다.
-……센데?
“어. 세게 해야지. 히키 짓도 지긋지긋하다.”
트라우마는 피하는 게 답이고 현명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2년 내내 피해 다녀보니까 그게 난 이제 좀 지긋지긋하다.
방구석에 다시 처박히는 것보다 뒤지는 게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