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47화
반짝거리는 보라색의 룰렛이 서서히 멈췄다.
[보상을 선택하세요 (택1)]
[1. 부정적인 이미지의 5%를 삭제합니다]
“……어?”
잠이 확 깬다.
뒤를 볼 것도 없이 이거라고 생각하는 찰나.
[2. 외모에 대한 인지 부조화를 정상적으로 수정합니다]
“이건 도대체 뭔 소리야.”
나는 침대에 앉아서 표정을 꾸기고 혼잣말을 하며, 심각하게 보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삭제한다는 건 확 납득이 가는데, 외모에 대한 인지 부조화는…… 애초에 무슨 소리지?
그나저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삭제한다는 건, 혹시 지금까지 있었던 영상들을 삭제하는 셈이 되는 건가…….
그렇게 된다면 그건 지금 나의 상황에서 정말 좋은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싫다.
내 머릿속에서 이 일들이 지워지면 모를까. 내 머리에는 남고, 남의 머리에서는 지워진다는 게 억울하게 느껴졌다.
[2. 외모에 대한 인지 부조화를 정상적으로 수정합니다]
이건…… 크게 의미가 있나, 싶기는 한데.
그러니까 내가 가진 나쁜 이미지 때문에 생긴 선입견을 수정한다는 의미인가?
나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이번에도 선택을 보류했다. 어릴 때는 우유부단한 편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런 나약한 어른이 되었다. 허허…….
그렇게 고민하느라 시간이 꽤 걸려서, 야식을 다 먹은 신지운이 방으로 들어왔다.
“뭐야, 여태 안 잤어?”
“이제 자려고.”
내가 대답하는 사이 신지운은 침대에 드러누워 이어폰을 찾았다. 그리고 귀에 꽂기 직전에 내가 말했다.
“지운아, 너 더 써틴 출연자 중에 친구 있냐?”
내 말에 신지운이 이어폰을 내리며 대답했다.
“아니, 우리 소속사는 이번에 한 명도 안 나갔어. 효석이네 소속사에서는 꽤 많이 나간 것 같던데. 왜?”
“혹시 어그로 좀 필요한 연습생 있나, 해서. 화제성 많이 간절한 사람으로.”
“뭐 하게?”
“전화로 출연하게.”
“어?”
신지운이 어이없음을 표정에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뭐 하러 그래? 그쪽 화제성만 불려주는 건데.”
“그쪽도 시청률 내는데 나 팔아먹잖아. 나한테도 뭔가 좀 떨어져야지. 어차피 내가 무슨 소릴 해도 화제성 때문에 내보내줄 거 아냐. 오히려 내가 방송에서 VMC 욕해주길 기다리고 있을걸?”
내 말에 신지운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내 일을 내가 정하는 거니 더 이상 참견하지 않고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하여튼 은근 시크한 놈이다.
나는 한효석에게 혹시 방송에서 나와 전화가 가능한 연습생이 있냐고 물었고, 10분 정도 지난 후 연락이 왔다.
[효식 : 승주라는 형이요, 제발 자기한테 해달래요. 형한테 궁금한 거 많다고.]
[뭐가 궁금하대? 너무 센 건 안 되는데.]
[효식 : 잠시만요]
[효식 : 악편 분량 받는 법이요]
[효식 : 죄송해요]
이 친구 나랑 좀 마음이 맞네. 내가 물어봐 줬으면, 하는 질문을 딱 맞췄다.
[왜 죄송해. 고마워. 회사에서 허락해주면 그걸로 하자]
나는 그렇게 연락을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웠다. 오히려 잠이 잘 왔다.
* * *
퍼스트라이트 컨셉 포토를 촬영한 이후, 갑자기 덕질을 시작한 희은은 최근 아예 본인의 직업을 활용해 영상계를 만들었다. 희은의 고등학교 친구인 수정은 의리로 친구의 영상계를 구독하며 말했다.
“아니, 넌 영상 편집일 하면서 집에 와서 또 영상 편집을 하고 싶니?”
“그렇게 됐어.”
“실제로 보면 애가 괜찮아?”
“완전 괜찮다니까. 그리고 실물…… 하. 진짜. 이걸 어떻게 말로 설명하지.”
“내가 너 남자 보는 눈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나저나 정해원 팬들 진짜 일당백이다. 하나씩 있는 짤계랑 영상계가 다 전문가 수준이네. 아니지, 수준이 아니라 심지어 너는 그냥 찐 전문가잖아.”
“예술인이 일하게 만드는 얼굴이라!”
“……너 진짜, 많이 돌았구나.”
“혹시 네가 살아가면서, 영상 쪽 일하는 사람인데, 이성이 남아 있는 사람을 만나잖아? 피해. 그 사람이 진짜 사이코야.”
하긴, 평소 희은이 일하는 시간을 가늠해 보면 저 말이 이해가 가기는 한다. 그런데 그렇게 일하고 모자라서 남은 여유 시간에 또 영상 작업을 하고 있었다.
수정은 핀잔을 하면서도 희은이 올린 영상에 조회 수와 스트리밍 시간을 올려주려고 영상을 플레이했다. 이번에 올라온 퍼스트라이트의 자체 예능에서 정해원이 나오는 부분을 편집해서 올린 영상이었다.
[퍼스트라이트/해원] 겁은 없지만 천둥은 무서워
영상을 보니 나이에 비해 신기할 정도로 어른스러운 모습이 앞부분에 붙어 있고, 후반부에는 천둥이 칠 때 움찔거리며 창문을 돌아보는 장면마다 찾아 붙여놓았다. 본인이 메인으로 잡힌 건 별로 없고, 대부분 배경에 있다가 카메라에 걸린 장면들이었다.
“진짜로 심하게 놀라는 것 같은데? 이 정도면 뭐 트라우마 있는 거 아니야?”
“우리 애가 뭐 트라우마가 한두 가지겠어?”
거의 기계 수준으로 영상 작업을 하던 희은이 대답하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다시 다른 영상의 보정을 이어갔다.
컷 편집은 순식간이었지만, 워낙 밤에 촬영한 예능이라 영상이 어두워 전체적으로 밝게 하느라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수정이 영상을 다 보고 나서 ‘좋아요’를 누르려고 보니, 올린 지 이제 한 시간 된 영상에 ‘싫어요’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수정이 ‘좋아요’를 누르며 말했다.
“그새 이런 팬 계정까지 와서 ‘싫어요’를 누르네. 인생을 이렇게 남 마이너스하는 데 쓰면 좋나. X나 시간 아깝다.”
“내 말이 그 말이야. 그것도 국선아 때 열여덟 살이었던 애를. 지금도 어린데, 그땐 진짜 애기잖아.”
팬의 영상계까지 찾아와 ‘싫어요’를 누르고 악플을 다는 정성 어린 안티들을 보니, 몇 안 되는 팬들이 저렇게 전투적이 된 게 이해는 갔다.
수정은 갑자기 알 수 없는 정의감이 생겨서 댓글을 달았다.
“경험상 이럴 땐 법이 답이야.”
[sooo_1818 : 아티스트의 악플 관련 pdf를 모으고 있습니다. 아래 메일 주소로 보내주세요.]
그 댓글을 올리고, 희은이 고정까지 시켜놓자 확실히 영상에 긍정적인 댓글만 남았다. 희은이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진짜 네 메일 주소야?”
“응. 안 쓰는 메일. 진짜로 pdf 오면 받아서 회사로 보내지 뭐.”
“TRV? 거기 법률팀 일 안 하는데.”
“원래 일 안 하는 애들은 일거리를 줘야지 하더라고. 개인이 보내면 복붙 답장하니까 여러 명이 모은 거 합쳐서 동네방네 요란 떨면서 보내야지.”
“너희 회사가 너를 그렇게 전투적으로 만들었니…….”
“응…….”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인 수정이 자기 원래 메일로 들어갔다. 이미 메일이 99+개 와 있는 메일함을 열었는데 이미 메일이 들어오고 있었다.
“뭐야. 메일이 벌써 와.”
“우리가 일당백이잖아.”
수정은 순식간에 쌓이는 메일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사이에도 희은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오늘 12시에 하이라이트 메들리가 올라올 테니, 그전에 빨리 끝내야 했다. 집중해서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 수정이 말했다.
“어, 댓글에 정해원 더 써틴 출연했다는데?”
“어? 왜?”
희은이 심장이 철렁해서 돌아봤다. 수정이 핸드폰으로 방금 올라온 영상을 찾아 보여주었다. TYT의 새로운 예능 <더 써틴>이었다.
탈락 위기의 한 연습생이 핸드폰을 받아 전화를 하는 장면이었다. 같은 소속사에서 데뷔를 준비하던 한효석에게 온 영상통화였다.
-어, 승주 형.
-응, 효석아.
자기보다 늦게 소속사에 들어와 한참 먼저 데뷔한 동생에 대한 연습생의 묘한 감정이 표정에서 드러났다. 한효석은 거의 모교 선생님처럼 이것저것 서바이벌 출연자로서 주의해야 할 점을 말해주다가 말을 이었다.
-아, 해원이 형한테 궁금한 거 있다고 했죠? 바꿔줄게요.
-진짜? 옆에 계셔?
-네.
그리고 곧 화면으로 정해원이 나왔다. 이승주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네에. 저랑 동갑이시라구요? 스무 살.
-아, 네.
-다음에 볼 땐 말 편하게 해요, 우리.
-아휴, 어떻게 선배님한테……. 아, 그런데요. 제가 진짜 궁금한 게, 저는 악편이어도 괜찮으니까 분량을 많이 받고 싶거든요.
이승주는 정말로 다급했는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정해원이 어느 정도 능청스러운 성향이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아. 근데 제가 막 이렇게 말하려니까 뭐 악편 전문가 같아서 민망한데.
정해원이 말을 이었다.
-센터 욕심내시구요, 같은 조 연습생들이랑 계속 싸워요. 본인 의견대로 하자고.
-어…….
-순위 발표 할 때 계속 화난 표정으로 있으면 제일 좋구요. 아, 다른 사람들 연습할 때 잠들어 있으면 그 장면 한 열 번쯤 나올 거예요. 그렇게 하시면 돼요. 하실래요?
-어…….
-왜요. 안 해요?
-……아, 그게요.
잠깐 어색한 침묵 후, 정해원이 물었다.
-내가 부러워요? 분량 확보해서?
-…….
-사실 나처럼은 되기 싫죠?
-…….
-나도 그랬어요.
그리고 분위기를 다시 띄우려는 듯, 정해원은 경쾌한 투로 농담을 건네며 전화를 마무리했다.
* * *
하이라이트 메들리 공개를 앞두고, TRV 내부 분위기는 상당히 좋았다.
뚜렷한 상승세가 선주문량에서 드러났다. 선주문 7만. 지난번 선주문량의 두 배가 넘는 수치였다.
새로운 예능으로 유입된 팬이 있는 데다가, 기존 팬들도 새로운 멤버 영입 이후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단단하게 결집되어 앨범 판매량을 훌쩍 높였다.
“역시, 이 회사가 딴 건 아무것도 없어도 짬은 있지.”
“최악 아니에요?”
“그치. 근데 그 회사를 아직도 다니네, 내가?”
모든 직원들이 이번 컨셉과 곡이 퍼스트라이트에게 딱 맞는 옷처럼 보인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고, 선주문량을 보니 그러한 의견 끝에 예측한 출하량이 딱 맞아떨어졌다.
“해원 씨가 세계관 처음 가져왔을 땐 반응 좀 안 좋았잖아요, 솔직히.”
“그니까요, 그때는 이게 뭔 소린가 자컨 팀에서도 이해를 못 해가지고.”
그렇게 긴가민가한 상태로 시작한 퍼스트라이트 컴퍼니 시리즈가 퍼라컴 입덕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팬들을 유입시켰다. 특히 트랙리스트가 공개되기 하루 전날, 퍼스트라이트 컴퍼니 2편이 공개되며 빌런즈의 정체가 밝혀졌는데 트랙리스트에 ‘투 빌런즈’라는 수록곡이 있다는 사실에 민지호와 한효석의 유닛곡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올라오며 반응은 점점 뜨거워졌다.
선주문량이 초동까지 이어지는데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관문은 오늘 더 써틴에서 온에어로 흘러나간 정해원의 전화였다.
TRV는 분위기가 보수적이라 앨범 발매 직전에 이런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시도는 자제시키는 편이었으나, 이번에는 웬일로 정해원의 의견에 따랐다.
정해원의 예상대로, 본인에게 유리한 말을 꺼내더라도 화제성에 목이 마른 더 써틴 입장에서는 이 전화를 잘라낼 수 없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메들리가 공개되기 전, 홍보팀 직원 하나가 말했다.
“지금…… 해원 씨 전화 실트에 있는데요?”
“……어? 그 정도야?”
개인 생일은 실트에 올라가도, 퍼스트라이트의 데뷔 일은 올라가지 못했다. 개인의 인지도가 팀을 앞지른다는 게 가장 여실히 보이는 부분이었다.
#악편_아웃
[나처럼은 되기 싫죠? 이 말이 진짜ㅠㅠㅠㅠ]
[정해원이 악편+짜깁기로 분량 얻었으니 이득이라던 사람들이 꼭 들어야되는 말인 듯]
그리고 정확히 12시.
하이라이트 메들리가 업로드된 후 TRV가 들썩였다.
출하량 예측이 잘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