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58화
피디한테 무언가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정말로 조심스러운 일이다. 특히 나 같은 뭣도 없는 신인에게는 더더욱. 나도 짬이 있는 피디였으면 절대 안 물어봤을 것이다.
황지석 피디가 피곤해 보이는 눈 밑을 쓱쓱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그…… 해원아, 뭐든지 과하면 안 좋아. 알잖아.”
책임 피디인 우혜정 피디가 미성년자들이 여럿 있는 걸 감안해, 최대한 논란거리를 피해서 방송을 만들자고 약속했다는 것 같다. 처음에 서바이벌을 또 나가냐는 퍼스트라이트의 멤버들의 부모님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그 약속이었다.
어쨌든 편집을 반대로 한다는 건 VMC의 국선아를 저격하는 셈이 될 거고, 그게 논란거리가 되길 바라기는 하지만 실제로 논란이 됐을 때 내 연약한 멘탈이 아슬아슬할 것 같긴 하다.
그래도 VMC가 신나 있는 지금도 이미 멘탈이 터질 것 같으니, 그쪽도 골치 아파하는 꼴을 봐야 내가 살겠다.
VMC가 즐거운 꼴을 보기 싫어요…… 라고 말하면 쉬울 걸, 에둘러 말할 방법을 찾았다.
물론 지금까지 황지석 피디가 나에게 피해준 것 없고, 더 라이징의 제작진 모두 기본적인 직업윤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란 건 안다.
하지만 엔터테인먼트 쪽에 잠깐이라도 있어보면 누구나 알게 되지 않나?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적, 내일의 적인 걸 알면서도 오늘은 동료.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믿지 말자.
“저 이번에 정말 좋게 편집해 주셨잖아요. 저 예능에서 그렇게 좋게 편집된 거 처음이거든요. 너무 감사해서요, 저도 뭐라도 도움이 되면 좋을 것 같은데 지금 제 머리로는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서요. 조금이라도 화제 될 만한 게…….”
내 말에 황지석 피디가 심각하게 한숨을 쉬었다.
* * *
황지석 피디는 국선아 때와 반대 이미지로 편집해 달라는 정해원의 말을 듣자마자,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돌리고 있었다.
어쨌든 정해원을 국선아와 반대 이미지로 편집한다는 건, 국선아에 대한 저격이 될 테니, 분명 화제성이 있는 소재였다. 시청률이 예상보다 훨씬 더 안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화젯거리가 될 만한 게 생기면 무조건 붙잡는 게 좋았다.
무엇보다 VMC에서 공격적으로 언플을 하고 있는 와중에,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래도 되나?
스무 살짜리의 말에 영향받고 싶지 않았으나, 황지석 피디의 경력은 짧았고, 심지어 서바이벌 경력은 정해원이 더 많았다.
저 말이 맞는 걸지도 모른다.
“일단…… 알았어.”
“네.”
정해원이 대답하더니 말을 이었다.
“저도 성질 좀 죽여볼게요.”
그럴 필요 없다는 빈말은 안 나왔다. 솔직히 TRV 연습실에서 거의 내내 퍼스트라이트의 모습을 찍다 보니, 왜 국선아에서 그런 편집이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퍼스트라이트는 아직 어린애들이었고, 정해원은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며 멤버들을 끌고 가고 있었다. 자기 멤버들에게만 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INO 멤버들, 그중에서도 형들에게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인원을 다 무대에 일부분으로 만들려 애쓰는 것이다.
퍼스트라이트 멤버들은 국선아 때부터 느낀 바가 있어서인지 정해원의 말이 정답이라 여기고 웬만하면 따랐지만, INO는 아니었다. 아마 국선아 때 퍼스트라이트 멤버들도 지금 INO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프로듀싱을 도맡는다는 사실 때문에 한 수 접어주고 들어가는 게 있지만, 국선아 때는 그마저도 아니었을 것이다.
정해원을 국선아 때와 완전히 반대 이미지로 편집하는 것.
사실 그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원인과 결과를 잘라내 버리던 국선아의 편집을, 전부 다 보여주는 편집으로 바꾸면 되는 거니까.
황지석 피디는 어느 정도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회의를 위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어쨌든 말이라도 하고 나니 내 기분이 산뜻해졌다.
그리고 때마침 TRV 직원 하나가 날 찾아왔다. 내 작업실 정리가 끝났다는 말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양이형의 작업실에 얹혀살며 회사 컨트롤 룸을 빌려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이 딱 좋았는데, 회사에서는 그래도 공중파 촬영을 해야 하는데 내 작업실이 없다는 게 너무 없어 보이지 않겠냐고 부탁해 왔다.
지금까지는 내가 곧 떠날 사람이라는 마음이 있어서 더더욱 작업실을 거부한 게 컸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퍼스트라이트를 떠나는 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작업실을 받을 마음이 생겼다.
아무튼 그래서, 할 수 없이 작업실을 받아주기로 했다. 이렇게 말하면 재수 없게 들리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필요 없는데 받아준 거니까.
내가 작업실 마무리 정리를 마쳤을 때는 여덟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진작 달라 그럴걸.”
나는 작업실 문 앞에 서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난번 정규 앨범이 상당히 잘 나간 것에 흥분했는지, 작업실은 작지만 전망이 무지하게 좋은 곳으로 줬다. 광화문과 북악산이 보이는 방향에 있는 작업실이었다.
탁 트인 전망이 좋아서, 바로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했다. 어머니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응, 해원아. 밥은?
“먹었지. 몇 신데.”
-먹긴 뭘 먹어. 맨날 먹었대.
안 먹긴 했다. 허허. 전화 끊고 짜장면 시켜야겠다. 역시 이사 첫날은 짜장면이니까.
“엄마, 아빠도 집에 있지?”
-있지. 잠깐만?
어머니가 아버지를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서, 핸드폰을 내려놓고 찾으러 떠났다. 핸드폰을 뒤집어 놔서 검은 화면만 보였다.
“아니…… 안 끊긴 거 맞지?”
나는 검은 화면이 황당해서 큰 소리로 불렀다.
“엄마! 아빠!”
그러니까 잠시 후 아버지가 핸드폰을 들었다.
-왜! 무슨 일이야!
“아니, 핸드폰이 깜깜해서 외로웠어.”
부모님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난 당당하다.
아무튼 내가 말을 이었다.
“나 회사에서 작업실 받았거든.”
-그래? 거기야?
“응. 잠깐만.”
나는 핸드폰으로 창문을 보여드렸다.
“경복궁 보여.”
-어이구…….
-그 회사는 무슨 스무 살짜리한테 그렇게 좋은 방을 줘? 그래도 된대?
아버지랑 어머니는 좋아하시기 전에 걱정부터 하셨다. 내가 다시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내가 필요 없다고 했는데 억지로 준 거야.”
내가 말하고 나서야 부모님도 안심한 표정이었다.
한참 근황 토크 후에 전화를 끊고 나서 짜장면을 시키려는데 멤버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이어서 더 라이징 제작진이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떠났다. 퍼스트라이트에 워낙 낯가리는 놈들이 많아서 이럴 땐 자리를 피해준다. 편집 참 쉽지 않았겠다.
“숙소 돌아간 거 아니었어?”
“짜장면 시켜 먹는다며? 나도 먹으려고.”
황새벽이 말하면서 가져온 신문지를 바닥에 깔았다. 단톡방에 그렇게 말하긴 했다.
신지운이 작업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일곱 명이 다 못 앉겠는데.”
“그러면 신문지를.”
민지호가 말하며 신문지를 문을 통과하게 밖에 복도까지 깔아놓았다.
“이렇게 깔고 앉으면 되지!”
그 말에 한효석이 한숨 쉬고 말했다.
“……알겠으니까 자랑스러운 표정 하지 마.”
어이는 없지만 우리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신문지를 작업실 안과 밖에 골고루 깐 후에 가위바위보를 했다.
작업실 주인은 나인데, 내가 문밖에 복도에서 먹게 됐다.
“내가 작업실 주인인데 첫 끼부터 밖에서 먹네.”
“그럼 가위바위보를 이겼어야지.”
황새벽이 말하자, 착한 안주원이 말했다.
“그럼 해원이는 방 주인이니까 문턱에서 먹어.”
엇, 안 착하다.
“야, 이게 말이…… 근데 또 복도보다는 괜찮은 것 같긴 해.”
복도는 지나다니는 직원들과 눈이 마주칠 테니까. 문턱이 아주 넓고 평평한 데다 등도 기댈 수 있고 나름 괜찮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가 보다. 이걸 받아들이다니…….
잠시 후 음식이 도착해 늘어놓고 보니, 사실 안이나 밖이나 민망한 건 똑같다. 지나가는 직원들마다 멤버 반은 작업실에, 나머지 반은 복도에, 나는 문턱에 앉아 있는 걸 보며 백 퍼센트의 확률로 터졌다.
배달이 도착했을 때쯤부터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더니, 먹는 중에는 주륵주륵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탕수육을 집어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멤버들을 돌아봤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자꾸 난다.
“진짜 미친놈들 같다.”
“어, 만 원 감사.”
신지운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이제 무섭지가 않아. 내가 금연에 성공하고 있잖아.”
그러자 박선재가 말했다.
“형 진짜 대단하다. 금연 어려운 거 아니었어?”
“뭐 몇 달이나 피웠다고. 그렇게 금단 증상 올 정도 아니야.”
“하긴.”
물론 오늘처럼 가을비 오고, 술 한 잔 생각나면 동시에 떠오르긴 한다. 금연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술자리에서 알딸딸한 상태로 바깥 공기 마시며 피우는 담배의 맛은 종종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신지운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비오니까 분위기 죽인다.”
나도 그건 수긍했다.
“그러게, 좋긴 좋다.”
이 상황이 어이는 없지만, 정말로 분위기는 좋았다. 멤버들과 이렇게 모여 있는 것도 웃기고, 먹자마자 곧바로 앉아서 작업할 수 있는 내 장비들도, 야경도, 비 냄새도 좋다. 황새벽이 한 그릇 더 짜장면을 비비며 말했다.
“이사 올 때 비 오면 좋은 거 아니냐?”
그 말에 민지호가 맞장구쳤다.
“맞아, 이사하는 날 비 오면 잘 산다고 했어. 형 잘살겠다.”
“응.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식사를 하며 나는 우리의 미션곡, ‘나비의 춤’을 떠올렸다.
나비의 춤은 학교에서 같은 학교 학생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며 ‘나비 같다’고 생각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가사는 다소 모호하지만, 뮤직비디오가 드라마적으로 모든 내용을 설명했다.
MC인 이희세의 걸그룹, 루나리스가 다니는 여고를 배경으로 멤버 한 사람이 발레를, 안경을 쓰고 시집을 든 다른 한 멤버가 그걸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발레를 하던 학생은 시집을 든 학생에게 먼저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넨다.
[너의 춤은 버터플라이 댄스,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어]
[말 걸기 힘들어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나의 마음은 나비의 춤, 안녕이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우리는 달라 달라서 좋아]
일상, 성격, 그리고 민초, 반민초도 안 맞지만 두 사람은 친구가 되고 나머지 루나리스 멤버들과 함께 우정을 나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발레리나는 마지막에 시인이 된 친구에게, 학교 다닐 때 네 시집의 책장 넘어가는 모습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 같았다고 말하며 끝난다.
멤버들에게 처음 이 곡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조용하다가 한 명씩 말했었다.
-발레 하는 애가 인싸네.
-모르는 애한테 말 거는 걸 보니 용맹하다.
이 선천적 내향인들은 그게 소감이었다.
나는 멤버들을 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국선아 첫날에, 한효석이 자기소개하고 발레를 했잖아. 그때 무슨 생각 들었어?”
내가 물어봤는데, 한효석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동시에 대답했다.
“쟨 무조건 데뷔하겠다.”
그러더니 전부 똑같은 소리 한 게 웃긴지 신문지에 드러누워 웃는다. 한효석은 민망한지 못 들은 척하고 다 먹은 짬뽕 국물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치. 좀…… 많이 다르지.
가사를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아예 원래 우리는 시작부터 다르다고 생각하고 나니까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이렇게 낯을 가리던 놈들이지만 언젠가 한 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관심사도 같으니 금방 서로가 편해졌다.
그러고 보니.
목표가 같았었지, 우리는.
내가 빨리 자리를 치우려 하니까 황새벽이 말했다.
“야, 그냥 작업해. 우리가 치울게.”
“어떻게 알았냐, 작업할 거…… 그럼 내가 아이스크림 살게.”
“카드 줘.”
주머니 사정과 상관없이 누가 사주겠다는 건 절대 거절하지 않는 멤버들이다.
내가 카드를 주니까 멤버들이 바로 가위바위보 해서 아이스크림 사 올 멤버와 정리할 멤버를 나눴다. 그사이 나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수정을 하다가, 옆에 아이스크림을 놓는 걸 보고 흠칫 놀라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멤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많이 달라져도 돼?”
“많이 달라져야 될 것 같은데.”
신지운이 대답해서, 내가 되물었다.
“연습은 어떡하냐. 밤 계속 새야 될 것 같은데.”
내 말에 민지호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말했다.
“그냥 하는 거지, 뭐.”
“맞아. 그냥 하는 거지.”
옆에서 박선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히 다들 체력만큼이나 습득력도 좋다. 연습을 무서워하지 않는 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