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76화
‘소년들’의 무대를 거절하기는 어렵지만, 멤버의 7분의 6을 내줬으니 우리도 원하는 무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올해 모든 무대 중에 제일 반응 좋은 게 마태오인데 어떡하냐고, 내가 설득하니까 VMC 뮤직어워드의 연출 PD가 다행히 위에서 깨질 각오를 하고 무대를 올려줬다.
마태오의 무대가 시작되기 전, 스타일리스트 이예영이 목걸이를 걸어줘서 나는 키에 맞게 몸을 숙였다. 이예영이 말했다.
“그냥 서 있어도 된다니까.”
“왜요? 발 드는 것보단 이게 쉬운데.”
“이게 더 신경 쓰인다고. 네가 그냥 가만히 있어야 뭔가 인형에다가 메이크업하는 것 같고 편해.”
“사람이 왜 이렇게 이기적이에요. 누나는 편하고, 내 마음은 불편해도 돼요?”
“어!”
이예영이 단호하게 말하고 흐흐 웃더니 발을 들고 목걸이를 잠갔다.
유명한 브랜드의 목걸이였다. 협찬을 받은 건데, 명품 협찬이라는 게 원래 다 그렇게 까다롭게 진행되는 건지, 그 브랜드가 유독 까다로운 건지 회사끼리 회의를 몇 번을 했다.
이예영이 나에게 소곤소곤 말했다.
“원래 여기가 신인한테 진짜 협찬 잘 안 하는 데야. 이미지 엄청 신경 써서.”
“그래요?”
“그러니까 그 신경 쓰는 이미지에 맞는다는 거지, 해원이가. 신인인데 미리 침 발라 놓을 정도로.”
목걸이 하나 협찬해 주면서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아닐 것 같다. 그냥 뭐, 더 라이징으로 순간 화제가 됐으니 한 번 간 보는 정도겠지.
그래도 이예영이 이렇게 되게 대단한 일처럼 과장해 주는 건 고맙다. 하긴, 사람들 보는 앞에서 거울을 깨 먹을 정도로 또라이같이 굴었으니 이럴 만도 하다…….
오늘 보여줄 무대는 마태오와 첫 번째 프러포즈였다.
마태오는 이미 확정이었고, 연말, 가장 큰 무대니까 뭔가를 좀 더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내가 외부인으로 퍼스트라이트 미니 2집, 첫 번째 프러포즈 무대를 본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첫인상은 ‘양아치 고딩들이 어른인 척 가오 잡는 것 같다’였다.
그럼 반대로, 수트 컨셉을 아예 가오 잡는 고딩 양아치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제안했다. 자기는 귀염상인데 왜 그러냐고 신지운이 헛소리를 하긴 했지만 회사에서 무난히 받아줬다. 회사는 내 의견에 동의하는 모양이다.
* * *
마태오의 시작 전, VMC 뮤직어워드, 팬들이 브엠뮤라 부르는 시상식의 책임 피디에게 피디 하나가 물었다.
“진짜 이래도 돼요?”
“누가 느와르 컨셉 아니랄까 봐…… 해원 씨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가져왔더라고.”
“뭔데요?”
“죽이는 무대 만들어주겠다고. 연말 시상식에서 그거면 한 수 무를 이유가 충분하지 않냐고 하더라고? 하, 거기에 넘어갔지, 내가.”
위에서 욕먹는 것과 별개로, 결국 연말 시상식의 성공 여부는 끝내주는 무대 하나가 있고 없고에서 갈린다.
정해원이 직접 프레젠테이션한 무대는 설명만 들어도, 브엠뮤의 하이라이트가 되겠다는 확신이 왔다. 거절할 수 없었다.
거기에 성격은 또 능구렁이 그 자체라, 자기가 이 회사 PD 하나를 날린 건 깨끗하게 모른 척하고 사근사근 인사하며 태연하게 굴었다.
뒤에서 무슨 욕을 들을지 모르지만, ‘올해 브엠뮤 X나 볼 거 없다’라는 소리만 안 들을 수 있다면 이런 위험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인터넷 실시간 반응을 살피니 슬슬 음향 왜 저러냐, 카메라 왜 저러냐, 브엠뮤 개노잼이네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임팩트 있는 무대가 하나 나오긴 해야 했다.
때마침 퍼스트라이트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TRV에서는 이 무대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원래 TRV는 무대에 돈을 좀 짜게 쓴다는 느낌이 드는 회사였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거대한 스크린에 성당의 유리창을 떠오르게 하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화면이 나타났다. 그리고 무대가 보이자, 그 앞에 의자 여섯 개에 앉은 멤버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민지호가 가벽을 지나 의자 쪽으로 걸어왔다.
“……거봐, 이걸 어떻게 거절하냐고.”
책임 PD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더 라이징을 본 사람은 누구나, 이 인트로가 KQS 예능, 더 라이징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단숨에 눈치챘다.
사전 녹화한 인트로가 종료된 후, 생방송이 송출되었다.
검은 수트를 판타지적으로 장식하고, 컬러 렌즈를 낀 퍼스트라이트가 등장하자 심심해하던 시청자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퍼라 진짜 무대 X나 잘한다…….]
[와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얘들아 시상식에서 마태오 안 했으면 좋겠어…… 거기 다른 여자들도 있잖아…….]
[마태오 무대 내내 나도 모르게 숨 참았네ㅎㅎㅎㅎ 근데 나 햇살이 아님ㅋㅋㅋㅋㅋㅋㅋ]
[더 라이징 때도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경기장 스케일에서 하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X나 웅장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좋아서 욕 나온다…… 이거 맞는 거냐…….]
[나 지금 무대 보다가 퍼라 정규 주문함ㅎㅎ 그냥 포카 가지고 싶어서ㅋㅋㅋㅋㅋ]
[↳친구야 원래 퍼라는 포카가 가지고 싶으면 입덕이란 말이 있어]
[↳그렇게 포가입…….]
[↳퍼라 저 얼굴로 셀카 노력파야! 같이 포카지옥에 빠지자ㅋㅋㅋㅋㅋ]
[↳여기 따듯하고 좋아ㅎㅎ]
그리고 무대는 올해 초에 나온 미니 2집 타이틀곡, 첫 번째 프러포즈로 이어졌다.
[X발 이 노래가 이렇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거 되게 사랑스러운 노래였는데……?]
[원래 연하남이 어른인 척하는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마피아가 날 좋아하는 노래가 됐어……?]
[↳오히려 좋아]
잔잔하던 실시간 반응이 끓어 올랐다.
그리고 브엠뮤가 중후반 정도 진행되었을 때, ‘소년들’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소년들 나온다]
[뭉치는 거 싫어했는데, 또 나온다니까 또 설레네…….]
[퍼라는 그냥 정해원 외 전부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초에 퍼라가 조작멤 뺀 소년들이라]
그렇게 술렁거리고 있을 때 ‘더 킹’이 시작되었다.
[더 킹이다ㅠㅠㅠㅠㅠ]
[와씨 오랜만에 보니까 소름 돋는다]
[봤어? 편곡 정해원이라고 써있었던 듯?????]
[뭐야 진짜 편곡했네]
[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해원 멘탈 쎄네 난 무대 쳐다보기도 싫을 것 같은데 자기가 편곡을 했어?]
[심지어 개좋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
엄청나게 많은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무대 아래로 내려왔을 때 몸의 힘이 확 풀렸다. 나는 백스테이지에서 한동안 무대 후유증을 가라앉혀야 했다. 우리 팬이 아닌 사람들이 더 많은 이곳에서도 이런데, 콘서트 후유증은 어떻게 감당하나 미리 걱정이다.
멤버들 자리가 빈 객석에 혼자 앉아 있으면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대기실로 돌아왔다. 내가 편곡했으니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내가 없으니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망하든 잘하든 긍정적으로 생각할 이유가 있긴 하다.
대기실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는데 무지하게 멋있다. 망하기는 틀렸으니 나는 그만 보고 모처럼 소파를 독차지하고 누웠다.
다행히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빅 블루의 컴백곡.
그런 기회가 왔다는 게 너무 좋아서 누워서 발을 동동 구르니까 같이 모니터를 보던 박중운 매니저가 말했다.
“뭐가 그렇게 신났어?”
“빅 블루 선배님들 곡 만들 생각을 하니까. 안 되더라도 그냥 좋아.”
회사끼리 이야기해야 하는 문제니까, 나는 제안을 받자마자 회사에 말했다. A&R 팀에서는 우리 앨범에만 지장이 안 가면 좋다고 했다. 당연히 내가 만든다고 생각하는 이 분위기 아주 좋다. 나 없으면 회사가 안 굴러갔으면 좋겠다. 너무 집착 같나…….
내가 생각한 컨셉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첩보물.
이제 며칠 뒤 막내가 31살이 되는 팀의 이미지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우리와 반대의 분위기, 진짜 으른 느낌을 처음에는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앨범이 나오지 않았던 긴 시간을 기다려준 팬들과 함께 부를 만한, 오랜 친구에 관한 컨셉이었다.
그런데 전자는 빅 블루가 첩보물 컨셉을 이미 여러 번 권유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건 퍼스트라이트를 위해 킵하기로 했다.
만약 자기 분야에서 최고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멤버들이 시간을 할애하게 하려면, 멤버들의 마음이 움직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5년 만에 무대에 선 빅 블루가 할 첫 마디를 생각해보았다. 다른 게 없다. 분명히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라고 말할 거다.
나는 이준희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한번 뭉쳐야지.’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작곡을 공부하던 초기에 빅 블루를 생각하며 만들었던 트랙을 떠올렸다.
빅 블루가 팬에게, 팬이 빅 블루에게 하고 싶은 말.
[올해는 만나자]
“올해는 만나자…….”
나는 소파에 앉아서 바로 핸드폰 녹음기를 켰다. 그리고 박중운 매니저를 힐끔 보다가 내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을 건네주며 말했다.
“형, 잠깐만.”
“나한테까지 보안을 해?”
“우리 회사 곡이 아니라서.”
“아, 그러네.”
박중운 매니저는 어이없다기보다 약간 섭섭했던 것 같다. 설명을 해주니 바로 이해하고 말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슬슬 해.”
“네에, 감사합니다.”
박중운 매니저가 잠시 나간 사이 나는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생각나는 소리들을 아무렇게나 녹음했다. 가사도 ‘올해는 만나자’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나머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괴언어로 흥얼흥얼거렸다. 영어도 뭣도 아닌 내가 좋아하는 발음대로 주절거린 거라 박선재가 내 이름의 해를 써서 ‘해언어’라고 했다.
그사이 VCR과 소년들의 무대가 끝나고, 멤버들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내가 맥북을 덮고 일어났는데, 소년들의 나머지 멤버들도 들어오고 있었다. 서로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있어서 나는 보안을 위해 맥북을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박중운 매니저에게 맡겼다.
외부인 들락거리는 것이 신경 쓰인다. 진심으로 오늘이 끝이었으면 좋겠다.
브엠뮤가 별 사고 없이 끝나고, 나는 반응을 찾아볼 정신도 없이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긴 시상식 동안 생각한 내용을 다시 정리했다.
멤버들이 맥주라도 한잔하라고 말해서 한 캔 사서 뜯어놨는데 그대로 잊어버려 옆에서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안주원이 맥주를 턱짓하며 물었다.
“안 마셔?”
“어, 버려도 너 안 줘.”
“나 3주만 지나면 술 마실 수 있는데.”
“응, 3주 뒤에 마셔.”
나는 1월 1일 직후부터 고주망태가 될 기미가 보이는 안주원을 칼차단하며 생각한 컨셉과 괴상한 가이드를 간단히만 정리했다.
지금까지의 어떤 곡보다 빨리 정리가 되었다. 내가 퍼스트라이트보다도 훨씬 더 잘 아는 사람들을 위한 곡이었다. 이미 다 내 머릿속에 있던 걸 꺼내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이준희가 별로라고 하면 접어야 하니까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괴상한 가이드와 코드 진행, 트랙과 편곡 방향을 문자로 다다다다다 보냈다.
이준희만 좋다고 하면 콘서트가 끝난 후부터 작업에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좋다고 해야 될 텐데……. 내 마음에는 확실히 드는데…….
* * *
빅 블루의 멤버 이준희는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스케줄이 있어,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이동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빅 블루의 팬들이 공항에 가득했다.
이준희는 익숙하게 인사를 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까지 시간 여유가 있어 핸드폰을 확인하니 정해원에게 문자와 파일이 와 있었다.
[주니 형! 이런 느낌으로 만들어 보려구요]
이준희는 바로 이어폰을 귀에 끼우고 정해원이 보낸 것들을 확인했다.
딴과 탁, 칫, 같은 악기 소리도, 언어도 아닌 가이드, 그리고 빅 블루 그 자체인 트랙이 들렸다.
[올해는 꼭 만나자는 우정에 관한 노래예요.]
“준희 형, 왜 그러세요?”
이준희가 그것을 들으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으니, 매니저가 물었다. 그러나 이준희는 집중하느라 옆에서 걱정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올해는 만나 바빠도 시간 내줘 내가 너 있는 데까지 달려갈게]
이준희는 2012년에 데뷔한 이후, 많은 음악을 받아봤고, 그만큼 많은 대본도 받아보았다.
음악도 극본도, 선택하는 감이 좋다는 평이 많은 이준희에게 첫 느낌부터 ‘되겠다’는 확신이 들게 만드는 작업물은 사실 아주 드물었다. 최근에는 그 짜릿함이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첫 느낌이 ‘괜찮네’ 정도 느낌이 드는 것도 어려운 작업물이라는 걸 알았다.
‘되겠다’는 확신은 그만큼 이준희에게 일상적이지 않은 감정이었다. 자주 오지 않는 기회였다.
그 확신이 지금 들었다.
이건 빅 블루가 뭉치는 정도가 아니라, 빅 블루의 대표곡이 될지도 모르는 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