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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89화 (89/380)

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89화

나는 전화를 받았다.

“네.”

그러자 TYT 음악 콘텐츠본부, 이용민이 말했다.

-요즘 빅 블루 곡 작업하신다면서요?

“어…….”

-아, 아직 공개하면 안 되나 보구나. 아무튼 박중운 매니저가 우리랑 의사소통 과정에서 문제가 좀 있었던 것 같더라구요.

……그 형한테 유출하라고 시킨 게 이 새끼였어?

-유출이고 뭐고, 난 그런 말 한마디도 한 적이 없거든. 박중운 매니저도 인정했어요. 나는 그냥 스카우트를 한 건데, 자기가 뭘 해줘야 한다고 착각한 것 같더라고.

“…….”

-그래도 피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부분은 내가 책임지고 사과할게요.

저렇게 말해도, 박중운 매니저가 위험 감수하고 내 데모를 빼돌린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딱 잡아 ‘데모곡 유출’을 하라고 시킨 건 아닐지 몰라도 그에 상응하는 언질은 있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빡치기는 하지만, 동시에 빅 블루의 영향력이 대단하기는 하다는 생각이 든다. 변명이든 뭐든, 적어도 협박은 아닌 전화가 걸려온 걸 보니.

-그럼 잘 넘어가 줘요.

아닌가? 이제 슬슬 덮고 넘어가자는 협박인데 내가 눈치가 없었나…….

나는 거기에 대한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중운이 형은요?”

-아, 중운 씨. 이직 권유를 한 건 맞는데…….

대답이 애매하다. VMC에게 잘 보이려고 내 데모곡을 유출하는 건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빅 블루가 사용할 곡을 유출한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내가 물었다.

“VVV엔터로 스카우트한 거였어요?”

-그렇죠.

엔터계에 1강. VMC의 전신이나 다름없는 VVV엔터. 현재로서 미국 시장도 그렇지만, 아시아 내의 인기에서 최상위권은 여돌, 남돌 할 것 없이 VVV엔터가 잡고 있다.

VVV엔터가 아닌 회사에서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팀이 빅 블루인데, 그 빅 블루가 앨범이 안 나오고 있으니…….

언젠가 자기 엔터 회사를 차리고 싶어 하던 박중운 매니저 입장에서 VVV엔터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말이 없으니 이용민이 물었다.

-해원 씨도 그렇지만 빅 블루 멤버분들도 좀 그래하겠죠?

웬일로 내 대답에 박중운 매니저가 상향 이직을 하느냐, 백수가 되느냐가 달린 것 같다. 반대로 말해서, 주기로 한 일자리를 안 줄 때, 이용민은 지금 내 대답을 핑계로 댈 거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박중운 매니저가 그쪽 회사로 들어가면 나도 쓸 만한 정보 좀 빼다가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나에게 사과할 때 그 형 표정을 봐서는 충분히 해줄 것 같았으니까.

예를 들어 우리가 일본 진출을 하게 된다면, VVV가 일본 시장은 아주 꽉 잡고 있으니 그쪽 일정을 알고 있어서 나쁠 게 없다.

……근데 내가 너무 박중운을 유출의 달인 같은 걸로 생각하나? 아니, 애초에 내가 비밀번호가 얼마나 복잡한데 그걸 손 움직임만 보고 알아내냐고.

무엇보다 나는 이제 적을 늘리고 싶지 않다. 배신감은 가시를 삼킨 것처럼 속을 쿡쿡 찌르고 있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아군이 필요하다. 빅 블루가 그렇듯이, 여러 장르에 퍼져 있는 아군이.

게다가 여기서 어차피 내가 달리 얻어낼 것이 없다는 것도 빡치니까.

“그냥 VVV에 자리 주세요.”

-……음?

“화가 나긴 해도, 힘들 때 많이 도와주던 형이라서요.”

-…….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결정해 주세요. 그래도 어떡해요, 사람이 먹고살 길은 있어야지…….”

뭐 대충 그런 어른스러워 보이는 말을 하니까, 의외로 이용민은 좀 감동한 듯했다.

-한번 알아는 볼 텐데, 확답은 못 주겠네.

“그거면 됐어요. 그럼 저는 없던 일로 하고 전화 끊겠습니다.”

-네, 그럽시다.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예상 못 하게, 운전 중이던 강영호 매니저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말했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해요. 이런 식으로 넘어가 주면 주변 사람들 다 배신하고 연봉 잘 쳐주는 VVV로 가지!”

“아니, 형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다 배신하다니.”

“어떻게 자기 데모곡 유출한 사람을 봐줘? 그게 말이 돼요?”

평소에 그렇게 말이 없더니 갑자기 많이 화가 났다.

잠시 생각하다 내가 말했다.

“아, 형도 그런 제안 받았구나?”

“…….”

생각보다 속이 빤한 사람이라 바로 말이 없다. 나는 흐흐 웃고, 강영호 매니저가 사다 준 샌드위치를 뜯으며 말했다.

“형.”

“뭐요.”

“그냥, 고맙다구요.”

내 말에 그냥 한숨만 쉰다. 나는 말을 이었다.

“형, 우리랑 같이 가는 게. 장기적으로 무조건 이득이에요. 진짜로.”

내 말에 강영호 매니저가 힐끔 날 보더니 말했다.

“아니까 남았죠.”

“그래요?”

“애초에, 우리 일이 아티스트랑 하는 일인데, 중운이 형 그런 식으로 일하면 어느 아티스트가 신뢰하겠어요.”

강영호 매니저는 저런 믿음이 있어서 우리 옆에 남았나 보다. 강영호 매니저의 말처럼 장기적으로, 저 믿음이 옳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 * *

예상대로 그날 저녁에 바로 박중운 매니저의 장문의 문자가 왔다. 뭐 대충 미안하다, 고맙다, 원하는 거 있으면 전부 말해줘라, 그런 내용이었다.

그래서 바로 약속을 잡고 박중운 매니저를 만났다. 쉬는 동안 본 영화들에서 증거가 안 남으려면 만나서 말하는 게 최고란 걸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 VVV 일본 활동 일정이랑 VMC에서 준비하는 서바이벌 알려달라고 하니 박중운 매니저는 알게 되면 최대한 바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후에 바로 빅 블루의 이준희에게도 상황이 이렇게 됐다고 알렸다. 다행히 이준희는 내 데모가 퍼져서, 내 이미지에 타격이 생긴 거니 박중운 매니저에 관한 것도 내가 결정할 일이라고 했다.

다음 날은 상담이 있었다. TRV와 연계된 상담 센터는 병원에 부설 센터라, 전문의와 상담사가 따로 있는 곳이었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답을 회피했고, 성인군자이신가, 싶을 정도로 화 한 번 안 내던 상담사가 드디어 언성을 높였다.

“불안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는 건, 그때만 넘기면 되는 일이 아니에요.”

“불안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난 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아이고.

내가 봐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대답이다.

“죄송해요. 제가 생각해도 짜증 나는 대답이었어요. 전문가는 선생님이신데, 선생님이 맞죠, 당연히.”

“…….”

“……화나셨어요?”

내가 나름 표정과 말투로 애교를 부려가며 물었더니 상담사가 휴 한숨을 쉬고 말했다.

“발작은 한 번 일어나면 그 이후에 특정 상황이 아니라도 일어날 수 있어요.”

“그냥 피곤해서 기절한 거예요.”

“그럼 지금 발작에 대한 걱정이 아예 없어요?”

그건 아니지만.

“걱정이 되면 얌전히 앉아서 쉬고 있어요. 그럼 괜찮아지더라구요.”

“계속 그런 식으로 대답하시면, 진전 없이 돈만 날리는 거예요.”

지난번에, 상담사는 내가 불안함을 느꼈던 순간을 가급적 기록해 두라고 했었다. 근데 나도 내가 언제 불안한지를 모르겠다. 이제 그냥 불안이라는 게 사라진 걸지도 모른다.

근데 멤버들이고, 상담사고 내 말을 믿지 않는다.

상담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결국 치료가 늦어지면 계속 불안한 상황만 늘어나게 될 텐데, 그럼 결국 다시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

나 오늘 심한 말 많이 듣네.

내가 대답이 없으니 상담사가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그건 싫으시잖아요.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말하겠어요?”

약을 먹으면 멍해지는 게 싫다. 해외 활동할 때 혹시 걸리면 들고 있는 약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싫고. 아니, 다른 것보다 내가 지금 이렇게 멀쩡한데 왜 상담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국선아 때에 비하면 나는 지금 모든 면에서 월등히 상황이 좋아졌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하고 있고, 무대에 서면 점점 더 햇살이들이 나를 좋아해 주고, 종종 성가시게 구는 사람은 있지만, 그래도 결국 우리에게는 앞으로 갈 일만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뒤로 돌아가지 않을 거고, 어느 선에서도 멈출 생각이 없다. 갈 수 있는 곳까지는 가보고 싶다. 가는 도중에 숨이 모자라서 가라앉아 익사하는 한이 있어도.

그러니 지금 나는 어떤 이유로도 쉴 수 없었다.

“전 진짜로 점점 더 괜찮아지고 있어요.”

“괜찮아지는데, 자기 음원 유출한 사람을 용서해 줘요?”

“……누가 그래요?”

“그건 말할 수 없죠.”

아니, 어느 멤버가 이렇게 입이 가벼워?

“제가 필요해서 그런 거예요.”

아, 상황을 다 설명할 수도 없고. 진짜 필요해서 그래요…….

하지만 설명이 없으니 믿는 표정이 아니었다.

아무튼 이런저런 딴소리로 시간을 끌다가, 상담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어서 잽싸게 일어났다.

“전 끝났으니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몇 분 남았다고 잡을까 봐 나가려 하니까 상담사가 말했다.

“술만큼은 절대 안 돼요.”

“네?”

아니…….

담배도 끊었는데, 이젠 술도…….

뭐, 상담사가 하라고 한 것 중에 제일 쉬운 일이긴 하다.

그보다 한 번만 더 쓰러지면 그땐 병원 치료를 피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조심해야겠다.

* * *

그 후 멤버들과 회의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우리에게 내준 304호로 이동하니 억지로 상담 일정을 잡아준 안주원이 물었다.

“상담 잘 받고 왔어?”

안주원이 물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응, 정상이래.”

“정상 같은 소리 하네.”

안주원 기준에서 쌍욕이 돌아왔지만 나는 모르는 척했다.

최근에 다들 너무 스케줄이 많았어서, 단톡방으로 얘기만 했지, 제대로 된 회의 시간을 가진 건 모처럼이었다. 최대한 빨리 앨범을 내고 싶다고 우리가 닦달하는 바람에 일정부터 잡고, 앨범 준비를 시작하게 생겼다.

거기에 미니 활동이 끝나고 바로 시작할 팬미팅 이름도 못 정했기 때문에 회의가 시급했다. 멤버들 중에 제일 정리를 잘하고, 필체가 좋은 한효석이 멤버들의 의견을 적기로 했다. 그 모습에 화이트보드를 가져다준 직원이 말했다.

“퍼스트라이트 멤버분들은 최고 연장자가 스물한 살인데, 왜 이렇게 아날로그를 좋아해요?”

그 말에 내가 대답했다.

“저도 그게 항상 궁금했어요. 얘네는 왜 이럴까.”

“그쵸?”

직원이 흐흐 웃고 304호를 나갔다. 07년생인 박선재가 말했다.

“난 기계 별로 안 좋아해.”

옆에서 황새벽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공감하는 걸 보니 그냥 애늙은이들인 것 같다.

아무튼 우리는 제일 먼저 팬미팅 이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퍼스트라이트의 첫 번째 공식 팬미팅. 나는 제일 먼저 손을 들었지만, 한효석이 모른 척했다.

“효식이, 나.”

“의견들 좀 내주세요.”

“야.”

“형은 제발 작명 좀 하지 마요.”

“나도 가끔은 괜찮은 아이디어 내.”

“뭔데요.”

“둥근 해가 떴습니다. 솔직히 괜찮지 않아?”

“멤버들, 의견 좀 내주세요.”

“그래도 의견인데 화이트보드에 적기는 해줄래.”

내가 말하니까 그래도 형을 참 많이 존중하는 녀석이라 한숨 쉬며 칠판에 적었다. 신지운이 옆자리에서 말했다.

“그래도 계속 시도하는 형의 용기는 높게 쳐줄게.”

“아니, 너에게 높게 쳐지고 싶지 않아.”

“진짜 나보다 반년 빨리 태어난 걸 다행인 줄 알아.”

히히. 다행이다.

그 이후에 의견은 여러 개 나왔지만 의견 차가 좁아지지 않아,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전달받은 미니 앨범 구성 시안에서 건의할 부분들도 쭉 정리하고 나서, 한효석이 말했다.

“그리고 이제 저희가 미니 앨범 전까지 자컨 일정이 있는데요.”

이제 자컨 회의인가, 했더니 한효석이 말했다.

“그러니까 촬영 전에 빨리 아이노 형들이랑 할 경기 전략을 짜야 할 것 같아요.”

멤버들은 이미 설 특집으로 KQS에 편성된 야구 예능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설 연휴에 공중파에 노출될 기회인데 좋지 않냐는 멤버들의 말에 나도 어느 정도 넘어갔다.

하지만 그게 먼저가 아니라.

“멤버분들. 자컨 회의부터 해야지.”

다행히 내 말에 멤버들이 정신을 차렸다. 하, 야구가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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