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90화
“1위 하고 싶어.”
회의가 끝나갈 무렵, 민지호가 대뜸 말하자 잠시 304호가 조용해졌다.
운이 좋았으면 정규에서는 1위를 해볼 수도 있었지만, 음원 강자들이 줄줄이 나와 있는 시기라 1위 후보도 들어가지 못했다.
데뷔 1년 반. 더 라이징에서 함께했던, ‘라이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여섯 팀 중에 1위를 한 번도 못 한 팀은 우리가 유일하다.
민지호가 내 팔을 잡아 흔들며 말했다.
“형. 1위 시켜줘.”
“그걸 내가 어떻게 시켜줘.”
“형이 노력하면 할 수 있어.”
아이고 골치야.
나는 일단 알았다고 민지호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무심코 창밖을 보았다가, 새파란 하늘을 발견하고 무언가를 떠올렸다.
“나 팬미팅 이름 생각났어. 이번엔 진짜 괜찮아.”
내 말에 한효석이 마지못해 물었다.
“뭔데요?”
“파일럿.”
멤버들이 반응 없이 날 보고 있어서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왜 드라마 첫 편 던져볼 때 파일럿이라고 하잖아. 중의적으로 비행사라는 뜻도 되고.”
내 말에 박선재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왜 괜찮지?”
“그러게. 그럴 리가 없는데.”
신지운이 동의하고 있을 때, 민지호가 벌떡 일어서서 화이트보드로 달려가 한효석의 마커를 뺏어 들고 말했다.
“팬미팅 시작할 때 비행기 탔을 때 안내방송 나와야 돼. 녹음할 사람!”
“전부 녹음해 보고 제일 괜찮은 걸로 쓰자.”
한효석이 대답한 후, 안주원이 말했다.
“무대는 팬미팅 하는 중간에 시간이 바뀌는 거야. 밤 비행기 타고 이륙해서 일출을 보고, 낮에 착륙하는 걸로.”
그러자 신지운이 덧붙였다.
“중간에 벼락이나 난기류 같은 것도 있고.”
“지호야, 효석이가 쓰게 펜 줘라.”
황새벽이 뺏은 팬으로 비행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민지호에게 말하자 민지호가 ‘넵’ 하고 대답한 후 한효석에게 마커를 돌려줬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민지호가 황급히 되돌아가 말했다.
“팬미팅 티켓은 비행기 표 모양으로! 이륙에는 퍼스트라이트, 착륙에는 선라이즈나 햇살이라고 쓰는 거야.”
제목은 많은 걸 결정한다. 팬미팅 이름 하나 정하고 나니, 멤버들에게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 * *
박중운이 이직을 한 직후, VMC에서는 퍼스트라이트의 올해 일정, 앨범 같은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그러나 퍼스트라이트 멤버들이 워낙 자기들끼리 폐쇄적으로 회의를 하고, 결론까지 낸 후에 직원들한테 전달하는 식이다 보니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 후 VVV 엔터의 매니지먼트 부서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누구 하나 일을 가르쳐 주거나, 혹은 일을 맡기지 않았다. 일에 관해 질문을 해도 그냥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박중운은 VVV에서 자신이 가수를 담당하게 될 일은 절대 없으리란 걸 받아들였다. 그리고 확정적인 건 VVV의 매니저가 들으라는 듯이 말했을 때였다.
“아니, 차라리 애를 팼으면 위에서라도 인정해 주지, 곡을 빼돌리냐. 그런 매니저를 어느 아티스트가 믿어?”
유출이 드러난 직후부터 후회하긴 했지만, VVV에 입사한 이후부터는 그게 훨씬 더 심해졌다.
정해원은 생김새와 다르게 잘 웃고, 정도 많고, 특히나 제 편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치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옆에 있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곳에 떨어져 있으니 더 심하게 공허함이 느껴졌다. 몸은 편해도 정신적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오래 일하긴 틀렸다는 생각을 하니, VVV 엔터가 있는 VMC 본사 빌딩에서 일정이나 기획들에 대한 정보들을 정해원이 요구한 넘겨주겠다고 마음먹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VMC 빌딩은 출입 보안은 철저했지만, 직원 카드로 출입만 하고 나면 일 년 치 계획들이 회의실 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곤 했다.
그냥 보이는 걸 그대로 찍어서 전달해 주니 정해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 유출의 달인이세요?
“아, 미안한 마음으로…….”
-형이 미안하다니까 묻는 건데. 혹시 브엠뮤 때 CCTV 같은 건 못 구하지? 형한테 그 직원분이 제안한 거 있으면 좋은데.
“해원아, 형은 스파이가 아니야.”
-그래도 시도는 해봐. 혹시 모르잖아. 사람이 많이 다니던 날이니까, 그날 CCTV 자료는 다 백업해 놨을 것 같아. 아무튼 난 작업해야 하니까 파이팅하세요.
“저기 해원아.”
-응?
“형이 진짜 미안해.”
-응.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 * *
컴백 날짜는 3월 마지막 주로 정해졌는데, 나는 아직도 타이틀을 만들지 못했다.
나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인정해야 했다. 슬럼프거나, 재능이 없거나. 그리고 당연히, 나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정체기를 슬럼프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슬럼프의 원인은 명확했다. 박중운 매니저가 유출범이란 걸 알게 된 날부터 모니터가 텅 비어 있었으니까. 유출 직후까지도 퀄리티는 낮아도 아무거나 찍어보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거의 두 주 가까이 제자리였다.
이럴 때 상태창이 날 팍팍 도와줬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 새친구는 내가 무언가를 달성하거나, 떠올리지 않으면 비활성 상태가 되는 것 같다.
다행히 A&R팀에서는 아예 곡이 안 나올 때를 대비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멤버들이 언제나 그렇듯 A&R팀이 들려준 곡들을 안 내켜 한다는 것이다. 내 귀에는 지금 내가 만들 수 있는 곡과 비교도 안 되는 하이퀄리티로 들렸지만, 멤버들에게는 아닌 모양이다.
나는 답이 안 나오는 곡 작업을 밀어놓고, 박중운 매니저가 나에게 VMC에서 닥치는 대로 찍어 보낸 자료들을 확인했다.
“직업을 잘못 골랐네. 스파이가 돼야 했어.”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VMC가 보유한 채널들의 일 년 치 계획을 죄다 찍어 보냈다.
시간도 때울 겸, 박중운이 보내준 자료들을 확대해서 하나씩 확인했다.
“……오, 이 기획 재미있겠다.”
재미있어 보이는 기획도 있고, 이걸 진짜 돈 들여서 할 생각인가, 싶은 기획도 있었다. 그렇게 구경을 하다가 나는 10월에 예정된 예능을 발견했다.
‘소년으로부터(가제)’
딱 봐도, TRV를 인수한 후 소년들을 중심으로 만들고자 하는 예능이었다.
그런데 회의실 밖에서 찍은 사진이라 제목만 흐리게 보이고, 자세한 내용은 아예 안 보였다. 나는 박중운 매니저에게 다시 톡을 보냈다.
[형, ‘소년으로부터’ 이거, 자세한 내용 찍어줄 수 있어?]
[회의실 안쪽이라 찍기 어려운데]
그렇게 보내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좀 더 자세하게, 고화질로 촬영한 사진이 도착했다. 다시금, 직업을 잘못 고른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나는 다시 도착한 사진을 확대했다.
[‘소년들’의 멤버들이 그동안의 아픔을 털고 한 팀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모큐멘터리]
그리고 꽤 자세한 구성안이 있어 확인했는데, 한 줄씩 읽어 내려갈수록 욕이 튀어나왔다.
완전히 흥미 위주로 만들어진 구성이었다. 멤버들 중 누가 조작 멤버인지에 대한 시청자들의 의문을 이용해 흥미를 유발하려는 편집 방향이 구성안 안에 녹아 있었다. 어차피 관련자들은 소송 중이거나, 구속된 상태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VMC는 이 조작을 PD의 개인적인 일탈로, 본인들을 피해자로 못을 박아뒀으니까.
“아니…… X발, 이 새끼들 뭐야.”
퍼스트라이트 멤버들로 뭘 좋은 이미지를 잘 만들어주겠다는 것조차 아니었다는 걸 지금 알았다.
시청률이 뭐라고 이렇게 돌아버린 기획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프로그램이 편성된 채널은 얼마 전, VMC에서 2024년에 리뉴얼하여 재개국한다고 꽤 시끌시끌하던 채널이었다. 아마 이 힘들인 재개국 채널에 제대로 어그로를 끌, 화제성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 같다.
이렇게 어그로를 끌 만큼 끌어서, 잘되면 좋고, 안되면 팽하는 건가?
나는 최소한, 만에 하나 일이 다 우리 뜻대로 안 돼서 퍼스트라이트가 VMC 소속이 되더라도 그 녀석들은 잘 케어해 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전혀 아니란 걸 지금 알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비어 있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VMC가 나에게는 악역이지만, 나머지 멤버들에게는 선역까진 아니어도 필요악 정도는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지금 알았다.
그러려면 1위, 적어도 1위 후보에는 오르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1위는 상징적인 거니까. 그리고 공백기 동안 팬들의 유입이 컸으므로, 이번 앨범은 지금까지의 어떤 앨범보다 중요했다.
나는 신지운이 의지는 무너지지 않을 곳에 하는 거라고 한 말을 떠올렸다. 작곡에 의지하지 말라고.
사실 나는 작곡에 의지한 게 아니다. 내 의지력에 의지한 거지. 스스로도 내 의지력이 반쯤 무너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니, 그게 얼마나 모자란 생각이었는지, 두 주째 비어 있는 모니터를 보고 깨달았다.
나는 그제야 지원팀에 연락했고, 처음 내 발로 상담센터를 향했다.
* * *
의사는 초반에 약물치료를 세게 해서 불안 증상을 때려잡아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 정도로 환자 노릇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약만 처방을 받았다.
신기하게도,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부터 돌덩이가 들어찬 것 같던 머릿속이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탑라인이 떠올라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양이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형. 들어봐.
나는 너무 급해서 차 안에서 녹음한 멜로디를 들려줬다. 주변 잡음이 섞였지만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건 다 들어 있었다.
양이형이 허 웃었다.
-지금 갈게.
“어때?”
-좋으니까 간다고 하지.
양이형 기준에서 ‘좋다’는 민지호 기준으로 ‘형 이거 미쳤나 봐 너무 좋아 어떡해 빨리 무대 올라가야 되는데 세 달 남았어!’와 같은 대답이었다. 희한하게 별로일 땐 둘 반응이 비슷하다. ‘별론데?’ 세 글자 말하고 끝이라는 면에서.
양이형은 곧바로 내 작업실로 달려왔고, 나와 함께 회의에 들어갔다. 막혔던 게 뚫리니 신이 나서 떠들다가 양이형이 자기 작업실로 돌아간 후, 나는 내 핸드폰을 확인했다. 박중운 매니저가 보낸 사진이 있었다.
사진을 확인하고, 나는 이번엔 화가 난다기보다 멍해졌다.
“……어?”
아직 편성이 안 된 기획에 내 이름이 있었다.
[I'll be back(가제)]
[여러 가지 아픔을 가진, 데뷔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이돌 지망생들이 멘토 정해원과 함께 성장해가는 이야기]
나는 뭐라고 내 기분을 설명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VMC가 내 입을 다물게 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니 TRV가 VMC에 인수되면, 나는 그냥 툭 떨어져 나오게 되는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안되면 안되는 대로, 잘되면 잘되는 대로. VMC는 나를 활용할 계획이 있었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고, 그래서 더 큰 충격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이번 재계약 전, VMC는 나를 자회사와 따로 계약을 시키려고 했었다. 나는 그때 거기서 내민 계약금을 그저 합의금이라고만 생각했고, 나를 무대에 세울 생각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기획안을 보니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럼 이용민이 과한 충성심 때문에 개인적으로 벌인 일인가?
[배신자2 : 의외로 VVV에서는 TRV를 인수하면 널 밀어줄 계획이 있는 것 같더라. 이것 외에도 혹시 보이는 자료 있으면 보낼게. 곧 그만둘 것 같으니까.]
정말 그렇다면 이용민을 날리기까진 못해도 좀 타격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박중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이거 진짜야?”
-……그럼 내가 널 속이려고 이걸 만들어서 붙였겠니?
“그럼 있잖아. 형, 혹시 VVV에서 힘 좀 있는 사람 만나면.”
-해원아, 나 여기 곧 그만둘…….
“왜 그만둬? 무슨 소리야. 쭉 다녀야지.”
아니, 이 형이 이제 좀 도움이 되고 있는데 그만두겠다고 하네?
“힘내. 내가 해봐서 아는데 백수 재미없어. 내가 이런 일 겪고도 형 믿는 거 알지?”
-……그래서 힘 좀 있는 사람 만나면?
“내가 TRV가 VMC에 인수되면, 뭘 시켜도 다 열심히 잘해보려고 했는데 음악 콘텐츠 본부 이용민 씨가 날 공격한 거 알고 있고, 그래서 엄청 섭섭해하고 있다고 전해줘. 막…… 아, 속상해서 울더라고.”
뭐, 그쪽에서 믿든 안 믿든. 전달해서 내 쪽에 나쁠 것도 없는 이야기다. 내가 잘해볼 생각이었다는 말 어디에 화를 내겠나. 반대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