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95화
나는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확인해 보았다.
이번 곡이 팬들에게 전하는 선물이라는 것을. 이제 팬들도 알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반응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어고 영어고 전부 울고 있는데, 그중 중간중간 나름의 이성을 찾아 곡을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스키퍼인 걸 떠나서 나 X나 탑백 귀인데 이건 된다]
[↳그치? 곡이 너무 잘 빠졌어ㅠㅠㅠㅠ]
[↳팬을 떠나서 편하게 들을 듯]
[↳컨셉 트레일러 보니까 뮤직비디오도 백퍼 잘 빠짐]
[이번 타이틀 X나 벅차 X발 계속 욕 나와 좀 고급스럽게 묘사하고 싶은데 그냥 X나 좋아 X발 내 문해력 어떡하지]
[↳왜 수정이 안 되지ㅎㅎ]
[↳나도 내가 쓴 줄ㅋㅋㅋㅋㅋㅋㅋㅋ]
[29일 1시까지 어떻게 기다려ㅠㅠㅠㅠ]
[누가 내 뒤통수 좀 때려바 기절하게]
팬들의 반응은 좋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안심할 수 있었다.
나는 초반 댓글을 확인한 후,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이번 컨셉 포토는 지금까지와 분위기가 달라서, 평소처럼 스태프들이 잘한다고 우쭈쭈 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다행인 게, 엔틱 가구들이 있는 중세 무도회장 같은 촬영장에서 최선을 다해 치명적인 표정을 하고 있는 도중에 스태프들이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여기서 도망칠 것 같다. 아직 프로가 덜됐다. 허허.
그래도 화보 한 번 했다고 촬영에 좀 익숙해지긴 했다. 이렇게 카메라가 코앞에 있는 클로즈업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의상, 컨셉, 모든 것이 낯설다. 햇살이들이 정말 이런 걸 좋아하겠냐고 스태프들에게 물어봤는데, 여자 스태프들이 다들 좋아할 거라고 장담했다. 프로들이니까, 믿어보기로 했다.
* * *
5년 만의 컴백. 그사이 학생이던 빅 블루의 팬들 상당수가 사회인이 되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자, 이준희의 팬인 @19940808 역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참이었다.
취업 준비 중이던 작년만 해도 컴백 소식을 듣자마자 일정을 싹 비워버리고 컴백만 기다렸을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무슨 컨셉이든 괜찮으니까 일단 내놔바]
[판단은 안 할게]
[그냥 내놓기만 해ㅠㅠㅠㅠㅠ]
그런 팬들 속에 @19940808도 모처럼, 닫아두었던 계정을 일단 열어두기는 했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의 하루가 너무 피곤하다 보니, 하이라이트 메들리가 공개되는 날 12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더 어릴 때는 사회인 팬들이 12시를 못 기다리고 잔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이해가 갔다.
다음 날 아침, @19940808은 출근 지하철에 타서야 전날 공개된 하이라이트 메들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빅 블루의 싱글 수록곡은 두 곡으로 한 곡은 타이틀이자 신곡, 또 한 곡은 빅 블루의 팬들이 오랫동안 요청해온 일본 타이틀의 번안곡이었다.
먼저 흘러나온 번안곡이 막 끝나자마자 어두워졌던 화면이 다시 밝아지며, ‘올해는 만나자’라는 제목이 보였다. 이후, 촬영장의 이준희가 톡을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곡 받았는데 같이할 멤버 구함]
곧 나머지 멤버들이 하나씩 핸드폰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처럼 한 영상에 보이는 다섯 명의 모습에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이어서 멤버들이 카메라를 보며 인사를 했다.
-스키퍼들, 우리 곧 만나요!
-보고 싶었어.
-금방 달려갈게!
-만나자. 지금.
멤버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이어지고, 화면이 밝아지며 녹음실에서 녹음 중인 멤버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아마도 후렴일 부분이 들렸다.
[바다로 나가자 (가자) 낯선 곳의 이방인이 되어도]
[너와 함께면 네 손을 잡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이제 리더인 최정민과 다니엘이 서른넷. 팬들은 어른스러운 분위기의 타이틀을 예상하고 있었으나, 정작 공개된 곡은 오히려 데뷔곡의 분위기에 가까웠다.
예상하지 못한 아련하고, 따듯한 분위기의 타이틀에 @19940808은 지하철에 서서 울컥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19940808은 전날과 달리 쏟아지는 잠을 이기고 12시를 기다렸다.
그날 12시.
뮤직비디오 티저가 공개되었다.
바닷가에 서퍼들이 입을 법한 티셔츠를 파는 가게, 또는 카페, 또는 가정집에 앉은 멤버들이 자리에 앉아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우편함에 넣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이 그 편지를 열었다.
[스키퍼, 원하는 곳을 말해. 어디든 따라갈게!]
팬클럽의 이름이자, 선장을 뜻하는 스키퍼에게 그렇게 편지를 보낸 장면 이후, 멤버들이 정신없이 여행 가방을 챙기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이건 팬들에게 전하는 곡이었다.
@19940808은 그 사실에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 * *
모처럼의 음원 공개.
팬들은 물론이고 빅 블루 본인들도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음원이 공개되는 시간, 빅 블루의 멤버들은 사전녹화를 위해 공연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모든 멤버들이 공연장에 모이자마자, 서로 얼싸안고 인사하는 대기실에 이준희가 들어섰다. 막내가 나타나자마자 형들이 맹수들처럼 달려들자 이준희가 바로 의자로 향하며 말했다.
“며칠 전에 봤잖아. 인사 생략하자.”
그러자 최정민이 섭섭해하며 말했다.
“다른 팀 막내들은 어, 먼저 형들 안부도 물어봐 주고 그러던데 우리 막내는 왜 이렇게 무뚝뚝하냐. 생전 먼저 연락 한번 안 해주고. 형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나 대본 읽어야 하니까 조용히 좀.”
이준희가 냉랭하게 말하고 대본 책을 펼쳤다. 시선은 그쪽으로 두고 있었지만 슬금슬금 멤버들이 장난치려고 다가오는 걸 알고 한숨을 쉬었다.
“이잉, 막내야.”
“형아 보구 시퍼쩌?”
“……아니,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삼십 대가 돼도 이러냐.”
이준희는 자기가 뭐라고 해봤자, 자기들이 떨어지고 싶을 때까지 들러붙어 있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멤버들을 놔두고 대본에 집중했다. 본인이 막내인 탓이니 별수 없었다.
그렇게 대기실에서 음원 공개를 기다리며 멤버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최근 근황 이야기를 하며 떠들고 있었다.
음원 공개 시간이 다가올수록 멤버들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이준희는 그 모습에, 멤버들이 모처럼 무대에서 팬을 만나는 것에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자기 필드에서 주름잡고 있는 멤버들이, 여전히 팬에게 새로운 곡을 보여주는 모습에는 긴장한다는 것에 이준희는 안도했다.
10대 중반에 만나서, 한창 활동하던 시기까지. 그렇게 가족보다 더 많이 붙어 있던 멤버들이었지만 한동안 자주 만나지 못하니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이 너무 확신하고 끌고 와서 멤버들이 여기까지 와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금은 했다.
그러나 지금 멤버들을 보니, 여전히 팬들을 만나는 일, 무대에 오르는 일에 긴장하고, 설레하고, 기대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준희는 대본을 읽는 시늉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더 이상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후 한 시. 음원이 발매되기 직전, 모든 세팅을 마친 멤버들이 심호흡을 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은 후, 핸드폰을 내려놓고 무대로 향했다.
무대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몇몇 팬들이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눈물 많은 멤버이자 특히 팬들의 얼굴을 잘 외우는 유찬희는 5년을 기다려 준 팬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쏟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왔지? 진짜 미안.”
유찬희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팬도 울고, 멤버들도 울고. 이준희가 핀잔했다.
“고별 무대야? 계속 활동할 거니까 그만들 좀 울어.”
“막내가 너무 컸어…….”
최정민이 중얼거리며 멤버들을 모으고 말했다.
“오랜만에 스키퍼와 스태프분들께 인사 한번 하자.”
“와, 인사 몇 년 만이야.”
멤버인 박민하가 말한 후, 최정민이 5년 만에 팀 인사의 선창을 했다.
5년 만에 맞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에 인사한 후 무대가 시작되었다.
[기다리란 말 이제 안 할래]
[우린 항구를 떠나 저 먼바다를 항해할 거야]
[언젠가 만날 거란 말 더는 안 믿어]
[비가 와도 눈이 발목까지 쌓여도]
[지금 네 손을 잡고]
[나는 너를 믿고 떠날 거야]
[바다로 나가자 (가자)]
[낯선 곳의 이방인이 되어도]
[너와 함께면 네 손을 잡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오로지 팬들을 위해 뭉치고, 팬들을 위한 노래를 불렀다. 5년 만에 만난 빅 블루의 멤버들과 팬들은 모처럼 만난 단짝 친구들처럼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
어차피 빅 블루 멤버들에게 음원 순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팬들과 재회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 * *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음원 순위다.
당연하지. 가수 본인들이야 다양한 지표가 있겠지만 작곡가인 나에게 중요한 건 음원 순위 하나다.
하지만 정작 음원 발매 당일, 내 눈으로 순위를 보기에는 너무 쫄렸기 때문에, 내 작업실에서 최대한 아이돌과 상관없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영화 음악들을.
작곡을 시작해 보니, 영화 음악을 스코어링하는 건 정말 대중음악과 완전히 다른 장르라는 생각이 든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래서인지, 내 가장 큰 취미이던 음악이 업이 된 지금도 영화를 보고, 영화 음악을 듣는 일은 나에게 그저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럴 날,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 긴장이 누그러질 것 같은데 의사가 불안장애에 술을 마시는 건 불난 곳에 기름 붓는 것과 다음 없다고 해서 그 한 잔도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눈을 감고, 영화 음악을 들으며 쉬는 일이었다.
한동안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을 때, 작업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의자를 돌려 뒤를 보니, TRV 직원이었다.
혹시 음원 관련된 이야기를 하러 왔나, 나가봤더니 내가 찍은 화보가 실린 잡지가 회사에 도착해 주러 온 것뿐이었다. 물론 그게 ‘것뿐’은 아니긴 하다…….
나는 잡지를 슬쩍 열어봤다가 너무 민망해서 다시 덮었다. 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봐야겠다.
잡지를 밀어놓고, 다시 음악을 듣고 있는데 또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잡지 받았어요.”
직원인 줄 알고 대답하며 잡지를 집어 들었는데, 문에 붙어 있는 유리창 밖에 서 있는 건 신지운과 안주원이었다. 어차피 다들 지문 인식으로 들어올 수 있는데 왜 저기 서 있나, 의아해하며 보고 있는 사이, 두 사람이 뭔가 이야기하더니 안주원이 종이에 뭔가 써서 유리창에 붙였다.
‘실시간 1위’
“……와.”
실시간 차트에 1위로 진입하는 게 가능한 거였구나.
우리에겐 너무 까마득한 일이라 현실감이 없었다. 역시 빅 블루구나, 싶은 생각이 들 뿐.
그나저나 지금이 몇 시인가, 시계를 봤는데 이미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어.”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어와서 알려주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생각하며 문 쪽을 봤는데, 다른 종이를 붙여 놓았다.
나는 그대로 굳었다.
‘탑백 1위’
방금 전까지 내가 술을 찾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하마터면 이 기분을 취한 상태로 느낄 뻔했다니.
온전한 정신에 온전한 희열이, 손가락 마디 끝까지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