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101화
트레일러가 공개된 후 나는 작업실로 가서 전화를 기다렸다.
잠시 후 VVV엔터의 강효준 A&R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VVV엔터 A&R이 퍼스트라이트를 응원하는 문자를 한 사실 자체가 기억에 강하게 남았고, 그중에서도 ‘순항’이라는 단어를 쓴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올해는 만나자’는 빅 블루가 팬들에게 전하는 말이지만 곡 자체는 함께 항해를 시작하자는 내용이다. 항해에서 비롯된 순항은 흔한 말이지만, 지금 사용할 때는 노림수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VMC에게서 들은 말이라고는 입 닥치란 말뿐이라 내가 순혈 마법사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 순항하라는 덕담을 들으니 약간이나마 경계가 누그러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게 스톡홀름 신드롬인가 싶기도 하지만…….
전화를 받아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퍼스트라이트의 순항을 기원한다고 하신 거요, 진심이세요?”
-진심이 아닐 것도 없죠?
무슨 질문이 그러냐는 듯한 대답이라, 나는 빨리 말을 이었다.
“신기해서요. VMC에서는 ‘소년들’로 따로 기획을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과묵한 건지, 조심스러운 건지 아주 대화가 이어지지 않게 만드는 놈이다.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다시 말을 이었다.
“팀장님은 그걸 원하는 게 아닌 것 같아 보여서요.”
-아.
“무엇보다…… 솔직하게 말하면 VMC 대표님 조카분이라고 들어서요. 힘 좀 써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그냥 다 뱉어버리니까 강효준 팀장이 물었다.
-……우리 A&R팀에 아는 사람 있어요?
“아뇨.”
스파이가 있어요.
그리고 설마 그 스파이가 유출범일 거라고는 생각 못 할 것이다.
나는 내 할 말을 이어갔다.
“뭐가 어떻게 되든, 저희 1년 뒤에 TRV에서 나갈 거예요. 그때까지도 팀 유지하고 싶거든요.”
물론 멤버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어차피 표면적으로 퍼스트라이트 멤버들의 의견은 무조건 일곱 명이 함께 가야 한다는 신지운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니 누가 뒤로 딴생각을 하더라도 내가 신경 쓸 건 아니다. 멤버를 못 믿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함께 가고 싶어 하리라는 확신이 있다.
다만 이 멤버 놈들의 개인기가 너무 좋아서, 천지에 놓여 있는 유혹을 밟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있지만.
-그럼 저도 편하게 부탁드릴 수 있겠네요.
또 대답으로 끝나면 이번엔 전화를 끊어버릴 생각이었는데, 저쪽이 뜸을 들이니 나도 잠시 기다렸다.
강효준 A&R이 말했다.
-일단 뵙죠.
* * *
VVV엔터 4본부 A&R팀 강효준 팀장은 약속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회사를 나서려다 잠시 멈춰 섰다.
아무래도 사내에 스파이가 있는 것 같은데…….
얼마 전, A&R들 사이에서 시끄러웠던 정해원의 음원 유출 건으로 VVV엔터에 오게 되었다는 매니저를 떠올려 봤으나, 작곡가가 자존심이 있지, 자기 데모 유출한 유출범에게 연락해서 VVV엔터의 내부사정을 물었을 것 같진 않았다.
여러모로 강효준 팀장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사건이긴 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박중운이었다. 엔터계에서 일할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저렇게 비정상적인 속도로 성장하는 프로듀서와 생긴 연을 알아서 잘라 버렸을 리 없다.
만취 상태에서 저지른 짓이거나, 멍청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멍청한 건 마찬가지지만.
VVV엔터의 4본부는 신인 프로젝트를 위해 신설되었다. 부르기는 본부라고 불러도, 레이블을 의미했고 VMC의 총수는 그것을 조카인 강효준에게 떼주었다.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그룹을 전담하는 1본부에서 쌔빠지게 구르고 있을 때 외삼촌 되는 분이자 대표님께서 이번 신인 프로젝트를 맡겼을 때는 드디어 나도 낙하산!? 하는 심정이었다.
지금도 1본부에 있을 때와 다름없이 구르고 있기는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인 그룹을 띄워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청사진을 그려봤을 때, 거기 잘 들어맞는 인물이 있었다.
강효준 팀장은 작년에 공개된 모든 아이돌 음원, 심지어는 믹스테이프까지도 전부 들어보았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작곡가는 단연 정해원이었다. 작곡도 곧잘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성장 속도였다.
정해원이 천재라는 부분은 부정할 생각이 없지만, 미숙한 상태로 만든 첫 곡은 자극적인 맛은 좋았지만 좀 쌈마이한 느낌이 있었다.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음원 차트를 뚫었다는 것은 전문가인 강효준 팀장의 귀뿐만 아니라, 대중의 귀도 사로잡았다는 의미였다.
강효준 팀장이 정해원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빅 블루와 작곡하기 전인, VMC 뮤직어워드에 오른 소년들의 무대에서였다.
정해원이 편곡한 ‘더 킹’을 듣는 순간 강효준 팀장에게는 깨달음이 왔다. 아직도 강효준 팀장이 온전하게는 이해하지 못한, 4본부 신인 그룹의 컨셉에 맞는 곡을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는 깨달음.
더불어 다행히 정해원도 원하는 것이 있었다. 최대한 거래에 응할 생각이었다.
강효준 팀장은 정해원이 오라고 한 밥집에 들어섰다. 가게 밖에서 흐릿하게 봐도 파워 연예인인 남자가 있어서 몸을 숙이고 확인해 보니 정해원이 맞았다.
실물을 보니 TRV가 저렇게 생긴 멤버가 있는 그룹을 이렇게밖에 못 키웠다는 게 한심하다가, 그게 자기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싹해졌다.
강효준 팀장이 먼저 인사를 했다.
“강효준입니다.”
그러자 모자 위에 후드를 뒤집어쓴 정해원이 점퍼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며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정해원이 말했다.
“제가 술을 안 마셔서요. 배고프실 시간이 아닌데 죄송해요.”
“여기 맛있어요?”
“24시간 하는 데가 뭐.”
열려 있어서 온 거지, 맛있어서 오는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아무튼 대답하는 투에서 밤샘 작업의 익숙함이 느껴졌다.
화면으로 볼 때는 내내 웃거나 애교를 떨고 있어서 그 이미지가 박혀 있었는데, 정작 앞에 보이는 정해원은 의외로 시크한 편이었다.
어차피 메뉴라고는 순댓국과 편육밖에 없어서 그렇게 시켰다.
거의 시키자마자 식사가 나와서 얼떨결에 먹기 시작하자 정해원이 물었다.
“재벌들도 순댓국 먹어요?”
“제가 아니고 저희 외삼촌이 재벌이고, 외삼촌은 순댓국 없어서 못 먹죠.”
그 대답에 정해원이 흐흐 웃고 나서 물었다.
“부탁하실 게 작곡이에요?”
“스파이가 그래요?”
“아뇨, 오면서 생각해 보니까 그거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스파이가 없다는 말은 안 하는 걸 보니 있긴 있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순댓국 맛집이라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차에 후루룩 들이마셨더니 정해원이 이상한 사람 보듯이 보고 있었다.
아무튼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마셨나 보다, 추측했는지 정해원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무슨 작곡인데요?”
“VVV엔터에서 신인 남자 그룹을 준비하고 있어서요.”
“아, 들었어요. 카일롬인가.”
심화된 세계관, 만화적 설정을 가진 아이돌 그룹이 늘어나긴 했다는 것을 강효준 팀장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4본부가 전담하는 카일롬은 강효준 팀장이 생각하기에 너무 과하게 만화적이었다.
지금 VVV엔터의 사장 취향이었다.
아직 멤버 공개는 되지 않고, 관련 애니메이션이 먼저 나왔는데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다. 강효준 팀장의 생각과 똑같았다. 너무 과하게 만화적이라는 반응.
다섯 명의 멤버가 천사고, 루시퍼가 하나씩 타락시키고 있고 뭐 그런 내용이었다. 팬클럽이 생기면 그 팬들과 함께 루시퍼를 쫓아내고 타락했던 천사들이 순수를 되찾는 내용으로 간다는데, 여전히 강효준 팀장은 그 설정을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강효준 팀장은 정해원에게 핸드폰을 보여줬다. 외부인에게 미공개 컨셉 포토를 보여주는 게 좀 찝찝하긴 했으나, 필요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예쁘게 생겼네요, 다들.”
정해원이 중얼거린 말 그대로였다. 퍼스트라이트가 전국에서 잘생긴 학생들을 싹 모아 데려온 것 같다면, 카일롬은 예쁘장한 학생들을 모아 온 것 같은 그룹이었다.
애니메이션도 그렇고, 컨셉 포토도 그렇고. 돈을 트럭으로 퍼다가 쏟아 부어가며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잘난 연습생에, 그 돈을 생각했을 때 망하면 우선 큰일이고, 거기에 온전히 자기 탓이 될 판이었다.
강효준 팀장이 한숨을 한번 쉬고 말했다.
“사실 아직도 이 컨셉을 좀 못 따라가겠는데…….”
“……A&R이 못 따라가면 어떡해요?”
“좀 오글거려서.”
그 말에 정해원이 표정을 찌푸렸다.
“오글거린다고 벽을 세우면 못 하는 게 많아져요.”
“…….”
“별로 안 좋아하는 회사의 팀이지만 그건 제 문제고, 저 친구들 문제는 아니니까. 그런 말 안 하시는 게 좋겠어요. 특히 A&R이시면.”
아, 이 새끼 성깔 있구나?
강효준 팀장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미 타이틀을 받았는데 덜 오글거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방금 안 쓰는 게 좋다는 말을 반복하니 정해원이 힐끔 강효준 팀장을 보며 말했다.
“맘대로 하세요. 자기 손해지.”
그 대답에 강효준 팀장은 흐흐 웃었다. 확실히 성깔이 있었다. 국선아 출연으로 많이 짓눌려 있는 상태인데도.
정해원이 피곤한지 손으로 자기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저 세계관 색깔이 확실한 곡을 원하신다는 거죠?”
“아, 그 말 좋네. 색깔. 네, 그렇습니다. 과하면 과할수록 좋아요.”
“그럼 뭘 해주셔야 하냐면.”
‘뭘 해줄 수 있나’라고 묻지 않고, ‘해주셔야 한다’라고 못을 박아버린다.
성깔도 보통이 아니지만, 스물한 살 같지 않은 능구렁이기도 했다.
강효준 팀장은 생각해온 것이 있었으나, 정해원의 말을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정해원이 말을 이었다.
“지금 미리, VVV엔터에서 퍼스트라이트와 계약해 주세요. TRV 전속이 끝나는 날짜로.”
“조건부로 말이죠.”
강효준 팀장은 대답하면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본인이 생각한 걸, 그대로 정해원이 말하고 있었으니까.
정해원 역시 강효준 팀장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상대방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네. 조건부로. 그 조건이 달성되면 1년 뒤 VMC와의 계약은 무효화되는 걸로.”
“그럼 조건을 달죠. 내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형식의 곡을 만들어요.”
“카일롬 곡 한정으로요.”
“물론입니다.”
“대신, 조건부 계약이라는 건 비밀이에요.”
“당연한 말을 하시네.”
퍼스트라이트가 어차피 1년 뒤 재계약 기간에 VVV엔터와 계약이 되어 있다면, VMC 입장에서 돈 들여 TRV를 인수할 이유가 없었다.
정해원 입장에서는 팀을 지킬 확률이 높은 방식이었고, 강효준 팀장 입장에서는 퍼스트라이트야 어떻게 되든 관계없이 마음에 드는 프로듀서의 곡을 원하는 만큼 받아낼 수 있게 되었다.
정해원이 말했다.
“대신 이미 VMC와 TRV의 합병을 돌이킬 수 없다면 다 소용없는 일이지만요.”
회의적인 말투에 강효준 팀장이 대답했다.
“무슨 일이든, 마지막 도장 찍기 전까진 다 돌이킬 수 있어요.”
그러자 정해원이 안심하는지 씩 웃었다. 그러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피차 인사치레는 하지 말죠. 고생 심하게 할 텐데. 대신 우리 그룹이 잘 될 때를 전제로 한다면, 정해원 씨 지갑은 두둑해지겠네요.”
“잘됐네요. 그 지갑으로 회사 차려서 우리 애들 데리고 나가면 되니까.”
정해원이 대답하고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강효준 팀장이 팔짱을 끼고 의자 뒤로 기대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나머지 퍼스트라이트 멤버분들이 1년 뒤 VVV엔터에 남고 싶어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 조건 좋은데.”
그러자 정해원이 다시없이 한심한 소리를 들은 사람 같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절 따라올 거예요.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