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102화
나는 강효준 A&R이, 과장 아니고 1분 만에 순댓국을 마시는 걸 구경했다. 신기했다.
나는 너무 뜨거워서 찬물을 좀 부으려다가 앞에 앉은 사람이 들이마시는데 뜨거워서 식히는 게 좀 없어 보여 그만뒀다.
목소리를 듣고 예상을 했지만, 체격이 엄청 큰 데다 재벌 조카라고 들었으니 순간 쫄렸다.
그렇다고 내가 VMC 쪽 놈 눈치를 볼 정도로 심약하진 않다. 거기다 내가 얻어맞으면 달려와 줄 사람이 여섯 명은 있다.
강효준 A&R과 앞으로의 방향을 이야기한 후, 대충 대화를 마무리했다.
강효준은 나에게, VMC에 퍼스트라이트 전속 계약 건을 전달하고, TRV 인수를 멈출 때까지의 진행 과정을 상세하게 알려주기로 했다.
다행히 그쪽에 내 스파이가 있으니, 혹시 강효준이 딴 맘을 먹으려 해도 미리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스파이의 인간성은 안 믿지만, 실력은 믿는다.
그리고 강효준은 나에게 VVV에서 준비 중인 신인 카일롬의 자료를 전부 보내줬다. 멤버 다섯 명의 커버 영상, 컨셉 아트, 레퍼런스까지. 거기에 더불어 데뷔 후부터 1년 3개월 동안의 앨범 제작 일정을 보내줬다.
TRV는 다음 앨범도 내가 타이틀을 만들어야 나오는데, 카일롬은 데뷔 일부터 1년 넘는 일정이 미리 나와 있는 셈이다. 부럽다.
아무튼 현재 상태로 계획은 미니 앨범 3개. 최대치로는 상황에 따라 모든 수록곡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니까 1년 3개월 동안 대략 15곡. 잠을 줄이면 꽤 할 만해 보인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 * *
며칠 뒤 나는 멤버들을 나와 신지운의 방으로 모두 모이게 했다.
이 이야기는 TRV 직원의 귀에 들어가면 절대 안 되니까, 거실도 왠지 불안했다.
이번 활동이 끝나면 숙소를 이동하게 되어 하나둘 정리 중인데, 내 짐은 거의 다 작업실에 가 있어 옮길 것도 없었다.
나는 VVV엔터와의 조건부 계약 당사자인 퍼스트라이트에게 내가 이렇게 열심히 팀을 지키고 왔다고 공치사를 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신인들 미니 3개만 만들어주면, 1년 3개월 뒤에 VVV엔터와의 계약은 무효가 되고, 우리는 어떤 회사든 갈 수 있다는 거지. 물론 내가 가자는 대로 따라와야지. 배신자에게는 죽음뿐이야. 알지?”
혹시 누구 하나 싫다고 할까 봐 숨도 안 쉬고 빠르게 뱉었다. 먼저, 신지운이 이해를 못 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 지금 우리 앨범 만드는 것도 힘들어하잖아. 두 팀 곡을 만들겠다고?”
“잠을 좀 줄이려고.”
“여기서 줄이면 죽어, 진짜로.”
“오래 살아서 뭐하게.”
말싸움에서 이겨 먹으려고 막 뱉은 내 말에 멤버들의 표정이 구겨지는 게 보였다. 나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오, 아무 말이나 한 건데 반응이 왜 이러냐.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전속 계약을 해야 한다고.”
내 말에 멤버들이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더니, 박선재가 내 등을 떠밀었다.
“형은 일단 나가봐. 우리끼리 얘기 좀 할게.”
“아, 싫어. 나 빼놓고 얘기하지 마.”
“자기는 우리 빼놓고 혼자 가서 얘기해 놓고 무슨.”
그건 그렇지…….
나는 부모님에게 반항 중인 사춘기 청소년처럼 있는 대로 얼굴에 불만을 드러내며 내 방에서 쫓겨났다. 어차피 내 말대로 해줄 거면서 왜 상의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어야 10분이면 끝나리라 생각한 회의가 길어지자 좀 불안해졌다. 회의는 30분을 넘어, 40분에 가까워져서야 끝났다.
멤버들이 방을 나왔고, 전달은 한효석이 하기로 했는지 내가 앉은 소파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나머지 멤버들은 겉옷을 꺼내 입고 현관으로 향했다.
“연습실에 있을게.”
안주원이 그렇게 말해서 내가 대답했다.
“야, 내 얘긴 우리랑 계약서를 들고 올 VVV엔터 직원끼리만 아는 거다?”
“알아.”
황새벽이 대신 잘라 대답한 후 모든 멤버들이 떠나고, 내가 한효석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어?”
“당연히 오래 걸리죠.”
“이 계획을 싫어하는 멤버가 있었어?”
“조건부 계약 자체야 다들 좋아하죠. 퍼스트라이트가 가장 확실하게 유지될 방법인데.”
“근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안 그래도 바쁜데 시간 아깝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한효석이 말했다.
“형, 우리 곡 안 만들 거예요?”
“뭔 소리야, 우리가 최우선이지.”
“그럼 두 팀의 프로듀서가 되겠다는 소리잖아요.”
“응. 그렇게 부자 돼서 회사 차려서, 너희가 버는 돈은 너희 다 줄게.”
회사를 차리는 일 자체에는 자신이 있다.
내가 매니저 생활 도중에 꾼 예지몽에서, 대부분의 기억이 흐릿하지만 내가 매니지먼트를 만들고 운영한 일은 정확하게 기억한다.
맨손으로 시작해 뜨지 못한 그룹을 띄우려 애쓰는 일에 비하자면, 자본이 있는 상태에서 퍼스트라이트처럼 앨범을 내면 손해는 안 나는 그룹을 데리고 회사를 차리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비교하자면.
한효석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뭐가 문젠데.”
“형 생각은 안 해요?”
“뭔 소리야.”
이 팀을 안고 가고 싶은 건 내 욕심이다.
내 회사를 차려서 나가는 것도 내 욕심이고.
나는 이 계약으로 저작권료를 많이 벌 거고, 그 돈으로 회사를 차려서 내가 밀어주고 싶은 애들만 데려다가 우주 끝까지 밀어줄 거다.
내가 말했다.
“네가 보기엔 형이지만, 나도 어려. 스물한 살에 과로사했다는 사람은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다.”
그 말에 한효석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나는 잽싸게 말을 이었다.
“효식…… 아니, 효석아.”
그리고 한효석에게 맞춤으로 설득을 시작했다. 효식이는 진지한 놈이니, 우선 얼굴에 진지함을 깔아줬다.
“형은 인생의 모든 순간이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어떻게 매 순간 힘을 내가며 살겠어, 피곤하게. 필요할 때, 몰아치는 조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
“그리고 내 생각에, 올해가 퍼라에게 제일 중요한 해야. 그걸 위해 1년 정도는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도 큰일 안 나.”
그리고 1년 3개월 뒤에 ‘내 회사’에 가서 정상을 찍어보자꾸나.
나의 욕망이 느껴졌는지, 근심 걱정으로 가득하던 한효석의 표정이 슬며시 펴졌다.
“……대신 저희한테 계속 도움을 요청해야 해요.”
“너희 맨날 내 작업실 오잖아. 와서 기웃거려.”
“기웃거려도, 언제 끼어들어서 도와줘야 하는지 모르겠거든요. 형 작곡할 때 머릿속으로 구상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써버릴 때가 많잖아요. 천재가 그러고 있는데 범인들이 어느 타이밍에 어떻게 껴서 도와줘요.”
“효식이, 형은 천재가 아니라 기술이 좋은 거야. 말하자면 장인에 가깝지.”
“형. 세상 어떤 직업도 겨우 1년 하고 자기를 장인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
“형은 가끔 보면 양심이 없는 것 같아요.”
……허허.
내가 민망해서 헛기침하니까 한효석이 중요한 대화가 끝나서인지, 웬일로 늘 꼿꼿하던 자세를 무너뜨리며 말했다.
“그게 다예요. 형이 필요할 때 무조건 우리한테 도움을 요청한다고 약속만 하면, 그렇게 할 거예요, 전부.”
됐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멤버들이 동의했으니 이제 TRV 인수에 대한 후속 처리와 전속계약서를 작성 중인 강효준 A&R에게서 긍정의 답이 돌아오는 일만 남았다. 잘됐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야 자신 있게 햇살이들을 볼 수 있게 됐다.
* * *
하이라이트 메들리 반응은 좋았다.
하이라이트 메들리는 타이틀 이상으로 황새벽의 솔로곡을 집중해서 보여줬는데, 이미 햇살이들이 솔로곡 떡밥 내놓으라고 문을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쾅쾅!!!!!]
[맡겨 놓은 거 찾으러 왔습니다^^]
안 그래도 이미 다 찍어 놨다. 아직 공개만 안 했을 뿐.
솔로곡 반응이 좋으니 황새벽은 더 긴장했다. 하, 내성적인 녀석…….
나는 멤버들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안무를 연습했다. 이번에는 안무가 힘들다기보다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멤버들이 디테일을 잡는 데 고생을 하고 있었다.
나는 민지호나 한효석만큼은 아니지만 안무 습득이 빠른 편이라서, 일찌감치 연습을 마쳤다. 내가 거울 앞에 앉으니 민지호도 잠깐 쉬려고 내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형, 난 개인적으로 이번 타이틀이 지금까지 중에 제일 좋아.”
“다행이네.”
그렇게 이야기하며 쉬고 있는데, 밖에 있던 직원 하나가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나와 민지호가 일어난 직후 TRV의 부대표 최기문이 들어섰다. 최기문 부대표와 함께 있는 건 친구로 보였고, 더불어 투자자로 보였다. 최기문 부대표는 웬일로 우리의 인사를 아주 친근하게 받아준 후 친구와 좀 더 이야기를 하다 나갔다.
아마 회사가 합병된 이후에 나온 자금으로 한 살림 차릴 생각인 모양이다. 민지호가 곧바로 바닥에 앉으며 나에게 말했다.
“형 부대표 싫어하지?”
“X나 싫지.”
솔직히 합병을 무산시키려는 것 중에 부대표가 돈 버는 게 꼴 보기 싫은 마음이 아주, 아주 조금도 없었나…… 하면 그건 아니다. 뒤통수를 맞아 길길이 날뛸 부대표를 생각하니 피로가 싹 날아간다. 히히.
그나저나, 내가 전해 듣기에 최기문 부대표의 아버지인 TRV 대표는 이 합병을 원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아들이 하자고 밀어붙여서 하게 된 것뿐.
그래도 나름 1세대에서 2세대까지의 아이돌을 성공시킨 경험이 있는 사람이니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내가 또 어른들이 은근 이뻐하는 스타일이지…….
근데 왜 햇살이들이 자꾸 나보고 상견례 문전박대상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어른들이 나 좋아한다고 내 입으로 말할 수도 없고…….
아무튼 우리는 연습을 마쳤고, 새벽 사녹을 위해 이동했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 나는 팬들에게 퍼스트라이트가 유지될 거라는 확신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X버스를 켰다.
[해원 : 햇살이들. 컴백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떨리니까 저랑 우리 멤버들 손 꼭 잡아주세요. 절대로 절대로 놓으면 안 돼요. 우리 끝까지 같이 있어요.]
너무 집착 같나? 뭐 내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 햇살이들도 내 집착에 익숙해질 때가 됐다고 본다.
나는 그렇게 글을 올리고, 무대로 향했다.
사전 녹화 전, 무대 위 멤버들이 팬들과 각자 인사를 나눴다. 나도 무대 끝에 앉아서, 팬들과 인사를 했다.
“해원아, 이번 컨셉…….”
“진짜 찰떡…….”
햇살이들이 각자 말끝을 흐리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게 귀여워서 웃음이 터졌다.
이번엔 판타지 분위기를 내려고, 멤버들 모두 화려한 장식이 달린 제복에 탈색도 빡세게 하고 렌즈도 색이 있는 걸 꼈다. 너무 과하지 않나, 싶었는데 햇살이들 보기에 괜찮은 모양이다.
그럼 됐다. 마음이 확 놓였다.
* * *
@regular_1228, 이재희는 활동을 할 때마다 정해원의 팬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두터워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함께 온 친구도 마찬가지인지 이재희에게 소곤거렸다.
“해원이 팬 진짜 많이 늘었다.”
“응, 당연하다고 생각해.”
이재희가 뻔뻔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친구가 흐흐 같이 웃었다.
그나저나 뮤직비디오 티저에 나온 컨셉 그대로 무대에 올라오면 심장이 버틸 수 있을까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무대를 올라오는 멤버들을 보자마자, 이재희의 친구가 중얼거렸다.
“미쳤다, 뮤비착이야…….”
첫 사녹은 뮤직비디오 의상 중 하나였다. 멤버 전원의 외모가 워낙 강렬해, 과한 컨셉이 하나 같이 잘 어울렸다.
정해원이 무대 끝에 와서 인사를 했다. 팬들이 예쁘다고 아우성치니 생김새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따듯한 웃음을 지었다.
“왜 만날 때마다 점점 더 애틋해지는지 모르겠어요. 애틋한 사이가 되나 봐.”
그렇게 말하고 멤버들이 부르자 자리로 돌아갔다. 정해원의 여우 짓에 익숙해진 이재희도 어찔했으므로, 근처에 새로 입덕한 햇살이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쟤 왜…….”
“저렇게 생겼는데 왜…….”
그치, 저렇게 생긴 애가 왜 저렇게 자기 좀 사랑해 달라는 눈으로 보는지 궁금하지. 나도 그랬지…….
이재희는 생각하며, 1초라도 최애의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