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112화
서촌 인근의 내 작업실로 4본부 A&R 두 사람이 더 도착했다.
한 팀 데뷔하는데 A&R이 많이도 매달려 있다.
아무리 아이돌 세계가 치열하다, 어쩐다 해도, 결국 대기업의 실패 확률은 현저히 낮다. 이렇게 빵빵하게 지원받은 신인이 망하는 경우는 드물다. 처음에는 몰라도, 언젠가는 뜬다.
[주간 히트곡 메이커 L급]
[등록된 작업실에서 체력 저하가 20% 줄어듭니다(1/1)]
[현재 상태 20(+4)/100% (10%이하에서 슬립모드가 시작됩니다)]
작업 중에 체력 확인이 가능하니까, 훨씬 계획적으로 작업할 수 있었다. 거기에 작업실에서 체력 저하가 느려지는 게 확실히 실감 난다.
오늘 하루가 유난히 길었는데도 이만큼 작업을 하고, A&R들과 가사와 편곡 방향에 대해 회의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체력이 남아 있는 걸 보니까.
그나저나 여기가 무슨 동네 사랑방도 아니고, 나올 얘기 다 나온 것 같은데 A&R들이 안 간다. 강효준이 에너지 드링크와 홍삼을 사 올 때 간식을 사 왔는데 뭔 간식을 죄다 마른안주로만 사 와서 다들 그걸 뜯어 먹고 있었다.
결국 내가 강효준에게 말했다.
“바쁘시죠?”
“아, 가라고?”
“티 나요? 조심스러웠는데.”
내 말에 A&R 둘이 흐흐 웃는다. 세 사람 중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A&R이 말했다.
“이상하게 편안하네, 해원 작가님 작업실이.”
내가 지들보다 어리니까 그렇지, 이놈의 유교 사회…….
슬슬 VVV엔터 사람들은 하나 같이 진상인가, 생각할 때, 연장자가 속내를 드러냈다.
“음악이라도 들을까요? 작업 중인 트랙 혹시…….”
아니, 퍼스트라이트가 쓸 것도 부족한 거 뻔히 알면서 이러네.
내가 말했다.
“에이, 그런 것까지 안 들어보셔도 VVV에 좋은 곡 넘쳐나잖아요.”
“곡이 넘쳐나는 거지, 좋은 곡이 넘쳐나는 건 아니잖아요.”
연장자가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애초에 좋은 곡이 넘쳐나면 우리가 이렇게 발품 팔고 다니겠어요?”
하긴, 그건 맞는 말이다.
아무래도 쉽게 못 쫓아낼 것 같아, 겸사겸사 내 쪽도 궁금한 걸 얻어내기로 했다.
“TRV도 그렇지만, 인수 어그러지면서 VMC 쪽도 ‘소년들’ 기획 엎어진 거 아니에요? 뭐라고 안 해요?”
기사까지 나온 기획이 엎어졌다. 최기문 부대표만큼 빡칠 사람이 충분히 더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소년들’의 나머지 멤버. 두 명의 조작 멤버야 오히려 욕만 더 먹을 테니 발 빼고 싶었을지 몰라도 조작이라기에 애매한 나머지 한 멤버, 최윤솔은 속이 뒤집혔을 것이다. 이번 방송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 테니까.
막내 A&R이 대답했다.
“하죠, 그래도 생각보다는 조용히 넘어갔어요.”
하긴, 저지른 사람이 대표 조카인데, 앞에서는 욕하기 힘들겠지. 내가 다시 물었다.
“아니, 근데 VMC에서 누가 이렇게 국선아에 집착하는 거예요. 피디들 다 소송에 걸리거나 잘렸는데.”
“아, VMC에 이춘형 이사님 라인…….”
막내가 믹스너트를 한 움큼 집으며 무심코 뱉었다 멈추더니, 강효준 눈치를 본다. 슬쩍 검색해 보니 이춘영 이사는 지금 VMC 대표의 차남이었다.
곧바로 스파이에게 이춘형 이사 라인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A&R들이 떠난 직후에 이름이 왔다.
[배신자2 : TYT 뮤직 콘텐츠 본부 김주철 본부장]
어. 익숙한데.
기억을 더듬다가, 나는 내가 TRV와의 반년 계약 후 재계약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나간 기사에 적혀 있었다.
김주철 본부장이 나와 VMC 산하, 터미널 엔터의 계약을 추진 중이라고.
그니까, 소년들, 말하자면 그 오디션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게 이 라인이었다는 말이었다.
* * *
VVV엔터의 세 사람은 작업실을 나섰다.
그렇게 가라고 눈치 주더니, 정작 갈 때는 정해원이 배웅을 하러 따라 나왔다. 강효준은 확실히, 괜히 박희영에게 곡을 만들어 보낸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을 좋아했다.
“가세요.”
주차한 곳까지 와서 그렇게 인사하고 돌아선 정해원이 멀어진 후에, A&R팀 막내가 말했다.
“컨셉이 완전 바뀌네요. 그래도 타이틀 이걸로 가는 거죠?”
그러자 임수환 A&R이 대답했다.
“뭐 어떡하냐, 우리 다 음악 하는 사람들인데. 곡이 설득하면 넘어가야지.”
임수환 A&R의 말은 최고의 칭찬이었다. 음악에는 답이 없지만, A&R은 답을 내놓아야 한다.
임수환 A&R의 말은 정해원이 내놓은 음악을 보자마자 답이라고 확신했다는 의미였다. 강효준이 말했다.
“우아하던데요. 곡이.”
“그니까요! 초반 컨셉 잘 잡힐 것 같아요.”
세 사람 다 흡연자인지라, 흡연 구역에 서서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눴다.
* * *
며칠 뒤, 최기문 부대표와 박희택 사장이 동시에 물러났다. 최기문 부대표는 비자발적이지만 박희택 사장은 반 정도는 자기 발로 나갔다.
최기문 부대표의 빈자리는 안 느껴지지만, 박희택 사장은 그래도 잡다하게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TRV가 잠시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차피 퍼스트라이트 계약이 종료되고 나면, 눈치 봐서 최기문 부대표가 돌아올 거라는 게 대부분 직원들의 의견이었다. 다시 엔터계에서 안 마주쳤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아버지 빽이 세서 한 대 맞은 걸로 거기까지는 무리인 것 같다. 아쉽다.
임원들은 그사이 몸을 사리느라 나를 복도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슬쩍 자리를 피했다.
어느 정도 소란이 정리된 후, 나는 X이앱을 준비했다. 그사이 있었던 일들로 햇살이들이 술렁거려서 뭐라도 안심을 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멤버들과 비교하면 내가 많이 논리정연한 편이니, 내가 대표로 햇살이들을 안심시켜 주기로 했다.
[해원♥]
그렇게 써놓고 라방을 켰는데, 오늘따라 시작부터 댓글이 안 좋았다.
[또야ㅠㅠ]
[양심 없네 설렜는데]
[X이앱 좀 그만…….]
[너 싫어하는 햇살이들 있다는 것 좀 기억해 주라ㅠㅠ]
엇.
나는 순간 굳었다가 곧 반가워하는 햇살이들이 들어오며 급하게 표정을 풀었다. 한두 명일 땐 괜찮았는데, 갑자기 우르르 쏟아지는 댓글에 좀 놀랐다.
[솔직히 못생김]
그런데 혀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결국 한마디도 못 하고 X이앱을 껐다. 그리고 끈 걸 변명하려고 무의미하게 조금이라도 핸드폰 각도를 바꿨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VVV엔터와 계약한 게 컸나……?
다시 방송을 켜야 하는데 말문이 막힌 건지, 목소리가 안 나와서, 누구라도 부르려고 멤버들에게 톡을 보냈다.
[나 X이앱 켤 건데 304호 올 사람?]
[민조 : 나 갈래! 인사할래!]
다행히 내가 작업실에 있는 것만큼 연습실에 붙어 있는 민지호가 대답했다. 덕분에 숙소의 우리 방은 툭하면 비어 있는 중이었다.
잠시 후 민지호가 304호로 들어왔다.
“형 나 왔어.”
“어.”
다행히 누가 오니까 긴장이 확 풀렸다. 내가 물었다.
“근데 우리 방 제목 뭐로 할까?”
“심심행 하트.”
그러더니 바로 제목을 적었다.
[심심행♥]
멤버들은 제목에 굳이 자기가 누군지 안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게 오늘따라 견딜 수 없이 부러웠다.
다시 X이앱을 켜니 다행히 아까 같은 댓글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댓글들을 본 햇살이들도 분명 있을 테지만, 굳이 거론하지 않았다.
민지호가 소리쳤다.
“햇살이들! 형이 X이앱 할 사람 있냐고 물어봐서 왔어!”
“작게 말해도 햇살이들 알아들어.”
“멀리 있는 햇살이도 들으라고!”
그렇게 소리치니까 정신이 돌아오며 웃음이 나왔다. 내가 말했다.
“혼자 켜려 했는데, 민조 온다고 해서 다시 켰어요. 연습실에 있다고 해서.”
“뭐 연습하는지는 비밀이니까 스포하라고 하지 마. 맨날 나랑 쭈원이 형한테 스포하래, 햇살이들이. 우리 이제 어른 돼서 안 그래.”
[어른……?]
[지호야 동갑 햇살이지만 우리 솔직히 어른 아니야…….]
댓글을 발견하고 내가 말했다.
“민조랑 동갑 햇살이래. 그럼 고3이겠네? 어구, 힘들어서 어떡해.”
“그러니까. 공부하다 힘들면…… ‘불을 켜’ 들어! 이 수능을 불태워!”
“야, 그 추천 진짜 괜찮다.”
“그치!”
[수능을ㅋㅋㅋㅋㅋㅋㅋ불태웤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조합 티키타카 좋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여운 애랑 귀여운 애 더하면 귀여움이 1조 배네]
다행히 반응이 엄청 좋았다. 하긴, 민지호의 X이앱은 보통 반응이 좋다. 팬들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데다가 팀에서 특히 인기 멤버기도 하니까. 민지호를 보고 있으면 씹덕상이란 게 이런 건가, 싶다. 거기에 본업도 못 하는 분야가 없는 만능 아이돌이었다.
민지호의 에너지 덕에 아까 본 댓글들에서 정신은 완전히 벗어났는데, 몸이 쉽게 안 풀렸다. X이앱을 하는 중간에 나도 모르게 목을 주무르니까 민지호가 물었다.
“형, 어깨 아파?”
“응, 운동을 안 해서 그런가.”
“스트레칭이라도 하자. 햇살이들도 다 같이 해요.”
그러더니 별안간 민지호의 스트레칭 교실이 시작되었다. 나도 얼떨결에 스트레칭을 했는데 시원하고 좋았다.
“어우, 진짜 시원해.”
“형, 척추 망가지면 백만억 원 내야 돼. 아껴.”
백만억에 터졌다. 아까 어떤 햇살이가 귀여운 애랑 귀여운 애 더하면 귀여움이 1조 배라고 했을 때도 터졌는데.
내가 소리 내서 웃으니까 민지호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은 이렇게 잘 받아주는데, 다른 멤버들은 진짜 안 받아줘! 드립 칠 재미가 없어.”
민지호가 시끌시끌하니까 오디오가 빌 틈이 없었다. 나도 더 이상 아까 같은 댓글이 없어 편하게 낄낄거리다가, 멤버들이 하나씩 더 추가되며 1시간 넘게 떠들고 X이앱을 종료했다.
햇살이들 안심시켜 주려고 켠 견데, 쓸데없는 소리만 1시간이었다. 뭐, 멤버들이 모여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만큼 팬들을 안심시켜주는 것도 없겠지만.
나는 X버스를 켜고 오늘 X이앱에서 못한 말을 다시 적기 시작했다.
[해원 : 햇살이들. 많이 걱정했죠? 멤버들도 그렇고 저도, 첫 번째는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이었어요. 일곱 명, 그리고 햇살이들과 오래, 오래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같이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어요. 그래서 선택한 회사니까]
저 너무 많이는 미워하지 마요.
[그래서 선택한 회사였어요. 많이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더 좋은 음악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언제나 정말 많이 사랑해요!]
그렇게 적어서 막 X버스에 올렸을 때 스파이, 박중운 전 매니저에게서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배신자2 : 오늘 최기문 부대표 왔던데]
[잘렸으니까 그냥 최기문. 왜?]
[배신자2 : 김주철 본부장이랑 나갔어]
어?
적의 적은 오늘의 동지라더니, 내 적 둘이 붙어먹네.
아니, 그건 그렇고.
[형은 그걸 어떻게 알아?]
[배신자2 : 주차장에 그냥 최기문 차 있어서 보고 있었지]
이 형 진짜 뭐지……. 슬슬 무서워지려고 한다.
안 그래도 슬슬 본전을 찾고도 넘친 것 같으니 그만 우려먹어야겠다, 싶기는 하던 참이었다. 사람이 그만둘 때를 알아야지.
[오늘 거 진짜 컸다 고마워 형. 이젠 진짜 안 물어볼게]
[배신자2 : 왜? 계속 물어봐]
[그것도 일이잖아]
[배신자2 : 너한테 미안한 것도 있고, 회사 X 같아서 정보 빼돌릴 때마다 뒤통수 때리는 기분이라 좋네…….]
이쯤 되면 스파이가 본업이라고 봐도 되겠다. 무급이지만.
아무튼 그냥 최기문과 김주철 본부장이 왜 만났는지는 몰라도, 나에게 부정적일 회동인 건 분명했다. 왜 만났는지, 꼭 알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스파이와 연을 끊는 건 아직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