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125화
민지호가 아무래도 더위를 먹은 것 같다. 내가 우주복을 입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민조♥ : 더운 건 난데 왜 해원이 형이 더위를 먹었어!]
그리고 민지호는 나와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둘러보니 멤버들도 민지호와 비슷하게 생각한 눈치였다. 단톡방 때문에 딴생각을 하는 걸 멤버들이 알아본 모양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민지호는 안무 중에 딴생각하는 걸 두고 볼 리 없는 멤버였다.
나는 언제 회의가 가능한지를 가늠해 봤다. 일단 뮤직비디오 촬영도 하루는 더 찍어야 할 것 같고, 그 이후에 바로 카일룸 수록곡 회의를 하러 가야 한다. 나만 문제가 아니라 신지운도 바로 촬영을 해야 하니까 회의가…….
[다음 주 월요일에나 시간 나겠는데?]
[민조♥ : 안 돼!]
[리더부기 : 멤버들 스케줄 생각하면 제일 빠른 게 다음주 월요일이긴 해]
[민조♥ : 힝……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봐아…….]
박선재만 없으면 막내인 민지호의 톡이 좀 귀여워서 흐흐 웃었다.
[안쭈 : 와 퍼라 잘나가네]
그리고 안주원이 그렇게 톡을 보냈는데, 그게 왠지 모르게 좀 신경 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TRV와 돌이킬 수 없는 악연이 되었어도 안주원의 본 소속사는 여전히 TRV였다. TRV와 퍼스트라이트의 계약이 종료되어도, TRV는 여전히 안주원에게 개인 소속사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워낙 착한 놈이라 말을 안 하는 거지, 내가 부대표와 싸우는 게 사실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월요일에 회의를 하면, 나도 거기에 대해서 안주원에게 물어봐야겠다. 혹시 TRV가 계약이 남은 안주원을 못살게 굴기라도 하면, 그것도 대책을 찾아야 하니까.
그리고 우리는 다시 촬영을 시작했다.
이번 신곡, ‘별빛’은 우주를 헤매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목적지에 드디어 도착해, 우주복을 벗고 같은 공간의 공기를 마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우주에 관한 오브제만큼이나, 호흡에 관한 오브제도 많았다.
나는 지난번 활동 곡이었던 ‘다음 이야기’에서 무중력 상태를 나타내는 역할이었다. 그래서 허공에 떠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그것의 연장이었다.
우주선처럼 만든 공간 안에서 나는 와이어에 의지해 여기저기서 일상적으로 행동하는 씬을 찍었다. 수중촬영을 하는 멤버들이나, 이 더운 날 우주복을 입은 민지호에 비하면 쉬운 편이다.
그래도 위험도는 높은 편이라, 와이어와 크레인도 여러 번 체크하고 내 동선도 걸음까지 맞춰 확인했다.
그리고 촬영에 들어갔다. 나는 와이어에 매달려 책장을 넘기거나, 떠다니는 공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심심해하는 연기를 했다.
“아유, 귀여워.”
“진짜 무중력 같네, 연기해도 되겠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촬영팀은 거의 칭찬 기계들이시다. 그래도 확실히 우리가 아이돌들이다 보니, 호응이 있고 없고에 차이가 컸다. 잘한다, 잘한다, 하면 더 잘하게 되는 무대 체질들이다. 민망한 게 문제지. 메이크업 탄탄한가. 얼굴이 시뻘게졌을 것 같은데.
촬영을 하고 확인하러 가보니 감독이 말했다.
“몸 진짜 잘 쓰네, 해원 씨 액션 배우 해도 되겠다, 나중에.”
“그래요? 우왕.”
그럴 일은 없으리란 걸 감독도 알고 나도 알지만 서로 적당한 스몰토크용 소재로 사용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옆에서, 멤버들의 스턴트를 지도하러 온 스턴트 배우도 부추겼다.
“아니, 빈말 아니고 진짜로. 한 번 생각해 봐요. 몸 잘 쓰는 배우는 진짜 어디서나 귀하지.”
허허, 거 쑥스럽게 하시네.
스턴트 배우는 관심 있게 우리 멤버들을 확인 중이었다.
나를 포함해 우리 멤버들이 다들 운동 신경이 좋은 건 사실이다. 안 움직일 수 있는 한 있는 힘껏 안 움직이는 황새벽조차 더 라이징에서 여섯 개 팀 리더들끼리 팔씨름을 할 때 1등이었다. 체력이 없는 것과 팔씨름은 별개인가 보다. 물론 우리 팀에서는 중위권이고 골골거림을 맡고 있지만.
나도 순발력은 확실히 자신이 있다.
팔씨름도 최소 중상위권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퍼스트라이트 내에서는 자신이 없다. 멤버들의 성장발육이 끝나기 전인 국선아 때 이후로는 팔씨름을 안 해봤고, 앞으로도 어떻게든 회피할 생각이다.
누가 도전해 오면 설마 작곡을 해야 하는 내 소중한 손모가지를 뽀갤 생각이냐고 공갈협박하며 드러누워야겠다. 히히.
* * *
VVV엔터 강효준 A&R은 자주 VVV엔터에 오가야 하는 정해원에게 신입 로드 한 명을 붙여주었다.
강효준은 직접 매니지먼트팀에 가서, 전 퍼스트라이트 매니저였던 박중운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구체적으로 뭐, 커피 호불호, 차내 온도, 습도 이런 것도 다 알려줘요. 부탁할 게 있어서 잘 보여야 하니까.”
“저, 그냥 제가…….”
박중운이 슬쩍 찔러보려 하자 강효준이 인상을 썼다.
들을 가치도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박중운으로서는 상당히 절실했다. 이렇게 VVV엔터에서 없는 사람처럼 지내는 것이 심히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쨌든 정해원이 핸드폰에 ‘배신자2’로 저장해 놨던 걸 ‘스파이1’로 바꿔줬다는 걸 보면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용서를 받은 것 같았다.
박중운이 재차 설득했다.
“해원이한테 한 번 물어나 봐주시면 안 될까요? 걔가 남들한테 자기를 맞추려는 성향이 세서, 오히려 손이 많이 가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걸 알려주라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어느 아티스트가 미쳤다고 유출범한테 운전을 시켜요? 차에서도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할 텐데.”
아예 물어도 안 보겠다는 거였다. 게다가 틀린 말도 아닌지라 박중운은 더 우겨보지 못하고 침울해하며 물러났다.
* * *
[주간 히트곡 메이커 L급]
[등록된 작업실에서 체력 저하가 20% 줄어듭니다(1/1)]
[현재 상태 10(+1)/100% (10% 이하에서 슬립모드가 시작됩니다)]
엇.
나는 경고창이 뜨자마자 바로 작업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바로 일어나서 몸도 좀 풀고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마신 후 침대에 누웠다. 어느 정도 자다 보니까 VVV엔터 매니저가 나를 깨웠다.
“해원 씨, 슬슬 출발하셔야 하는데요.”
“아…….”
나는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대충 모자를 눌러쓰고 나가려다가, 아이돌 자아가 발목을 잡아서 잠깐 거울을 확인했다. 그리고 샵 직원이 추천해 줘서 요즘 잘 쓰고 다니는 컬러 립밤을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차에 타서 핸드폰을 꺼내니 박중운 매니저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스파이1 : 강효준 팀장이 예능 출연 물어볼 듯]
그리고 무슨 예능인지 구체적으로 알아 왔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 궁금하지만 불법에 연루될 것 같으니 오늘도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VVV엔터에 도착해서, 나는 계획대로 A&R팀과 수록곡 회의를 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 회의를 통해 미니 앨범에 들어갈 다섯 곡을 확정했다. 타이틀 하나와 수록곡 둘까지가 내가 만든 곡이고, 거기 VVV엔터 소속 프로듀서의 곡 두 개가 더 들어가게 됐다.
아무튼 그렇다면 드디어.
“끝!”
카일룸 멤버들이 문제만 안 일으키면 이번 미니 앨범 작업은 끝! 끝! 끝! 도비…… 아니, 작곡 노예 이즈 프리!
자유를 맛보며 신이 나게 회의실을 달려나가는 나를 강효준이 불렀다.
“행복한 시간 방해해서 미안한데, 잠깐 시간 괜찮아?”
물론 그 자유는 지금부터 강효준이 물어볼 저 예능을 거절하지 않을 때의 얘기다.
원래 전곡 작곡을 시키려고 간 보던 강효준이 한발 물러난 건, 스파이가 알려준 예능 때문일 것이다. 미리 듣지 않았으면 내 건강 생각해서 일 줄여준 줄 알고 좀 감동할 뻔했다. 이 회사 놈들이 날 그렇게 생각해 줄 리 없지…….
나는 미리 전달을 받았기 때문에 여유를 가지고 VMC 빌딩 사내 카페에 앉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내려다보니 전망이 꽤 좋았지만, TRV에 있는 내 예전 작업실만은 못했다.
“예전 작업실 전망이 진짜 좋았는데.”
내 말에 강효준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두 모금 만에 마시고 말했다.
“나중에 TRV를 사.”
“못 사요.”
“너 지금 성장 속도로 보면 삼십 대 정도엔 사겠는데.”
그러더니 배가 고픈지 케이크 진열대를 보며 물었다.
“뭐 좀 먹을래?”
“형 드시고 저 커피.”
“어.”
강효준은 케이크 두 조각과 커피를 사 왔는데, 조각 케이크도 포크로 한 번 잘라서 반씩 먹어치웠다. 약간 하마 같다.
아무튼 그렇게 먹고 나서 나에게 말했다.
“듣고 바로 싫다고 하지 말고, 고민 좀 해봐.”
“뭔데요.”
“이번에 KQS에서 올림픽 특집으로 예능을 기획하고 있거든? ‘RUSH’라고. KQS 다큐멘터리 방영 시간에 대신 편성할 거야. 거기서 올림픽 응원가 범주의 노래를 기획하고 만들려고 하는데 거기 프로듀서 자리를 하나 VMC가 얻어놨어.”
MC들이 여러 명의 유명한 프로듀서들을 만나며 각자 원하는 스타일의 응원가를 구체화하고, 그 프로듀서들 중 두 명과 음원을 내게 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KQS랑 VMC 사이좋아요? 별로지 않아요?”
내가 묻자 강효준이 덤덤히 대꾸했다.
“방송국끼리 사이 나빠봤자지, 뭐.”
“……그래서 VMC가 빼놓은 자리에 제가?”
“응. 프로듀서로 출연해서 우리 애들 얼굴도 꽃 배경으로 깔아주고.”
본인이 키우는 애들 자부심이 대단하다. ‘꽃 배경’이라니…… 물론 성격 모르는 사람이 보면 꽃 배경이긴 하지.
나는 커피를 쭉 들이켜고 말했다.
“그거야말로 전 국민 대상이잖아요.”
“응.”
“삐끗하면 쌍욕 먹고.”
“안 삐끗하면 되지.”
“거기 내로라하는 프로듀서들 들어올 텐데, 아이돌이 끼면 그냥 무조건 욕먹죠.”
“해원아. 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천재야. 너 작업하는 거 나가면 욕을 먹을 수가 없어.”
“우리 신곡도 홍보해도 돼요?”
“그건 네가 조율해야지.”
공중파, 전 연령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에서 신곡 홍보.
이번 우리 ‘별빛’ 활동의 최대 적은 말할 것도 없이 ‘파리 올림픽’이었다. 그것도 요 몇 년, 전 세계가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모처럼 거창하게 열리는 화합의 장이었다.
5월인 지금부터 두 달 넘게 남은 올림픽을 겨냥한 파리 여행 예능, 여행 판매 상품, 올림픽 선수들이 출연하는 각종 방송으로 TV 채널들에 빈틈이 없었다.
우리도 열심히 준비하고는 있지만, 내심 올림픽 끝나고 컴백 시기를 잡아야 했었나, 난처해하는 중이었다.
그 올림픽에 얹어서 신곡 홍보…… 나쁘진 않은데…….
“어차피 작곡가 내정이죠? 그거.”
“응. 내정이야.”
MC들의 취향으로 고르는 듯이 보이는 두 명의 프로듀서는 당연히, 내정을 해놓았을 것이다.
“전 그냥 출연해서 어그로만 좀 끌고 빠지면 되는 거죠?”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시청자 게시판이랑 커뮤니티가 도배되지 않는 한 내정대로 가지.”
농담인 줄 알고 웃었는데 강효준은 웃지 않았다.
아무튼 그럴 일이야 없을 거고, 게다가 KQS 방송국이 더 라이징을 찍으며 날 좀 좋아하게 됐으니 편집도 믿을 수 있다.
거기다 이걸 찍는 대가로 카일룸이 다음 앨범을 준비할 때까진, 작곡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 아닌가? 거기에 우리 신곡 홍보? 은근 꿀인데?
“저 퍼라 신곡 홍보 빌런 컨셉으로 가도 돼요?”
“욕먹기 싫다며.”
“쌩으로 욕먹는 게 싫은 거죠, 얻는 게 있으면 괜찮아요.”
최근 들어 알게 됐다. 악플보다 더 힘든 게 있다는 걸.
좀 더 생각해 보면 국선아 때도 마찬가지긴 했다.
물론 악플을 보는 것 자체도 괴로웠지만, 정말로 나를 힘들게 만든 건 무대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떠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도 될 수 없고, 어떠한 관객도 나를 환영하지 않으리라는 절망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 방에 갇히지 않았을 것이다.
강효준이 대답했다.
“너만 할 생각이 있으면, KQS에 그 컨셉 전달할게.”
“그럼 할게요.”
그렇게 얼떨결에, 나도 올림픽 특수에 올라타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