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147화
민지호가 삐지긴 했어도 열심히 아이디를 고민해 줬기 때문에, 나는 거기서 착안해 아이디를 정했다.
‘2sun1_shine’.
인스타그램을 만들면 햇살이들이 분명히 나한테도 거기 다른 여자 있으니까 사진 올리지 말라고 해줄 테니까…… 해주겠지? 안 해주면 섭섭할 것 같은데…….
아무튼 그럴 때를 대비해서 아이디에서 박아놓고 갈 생각이었다.
회사에 연락해 보니 아무 때나 계정을 만들어도 된다고 해서, 올림픽이 끝나는 8월 11일에 열기로 했다.
원래는 일요일에 고성 투어를 가려고 했지만, 그날 날씨가 너무 좋았다. 런던에서 이렇게 쨍한 날씨가 별로 없다고 해서, 어차피 한국으로 가면 맑은 날을 실컷 볼 내가 집에서 노을이랑 놀고 누나와 매형에게 빅토리아 공원에 다녀오라고 했다.
그다음 날인 월요일에도 날이 좋아, 나는 누나 부부를 내보내고, 집에서 노을이에게 동요를 가르쳐 줬다.
아직 노래라는 게 뭔지 모를 텐데도, 노을이는 자기 이름이 들어간 동요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아무래도 음악 천재인 것 같다.
모처럼 햇빛을 실컷 쬐고 온 누나는 몸의 컨디션도, 정신의 컨디션도 좋아져서 집에 가라고 나를 진심으로 구박하기 시작했다. 서럽지만 다행이다, 흑흑.
아무튼 그다음 날, 또다시 비가 쏟아지는 화요일에 나는 워릭이라는 성으로 가는 기차에 탈 수 있었다.
누나는 차를 끌고 가라고 했지만 반대 방향 운전은 영 적응이 안 돼서 그만두기로 했다.
한국은 덥다고 난리인데, 여긴 약간 쌀쌀하기까지 했다. 나는 겉옷을 입고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야…… 좋네.”
비 오는 날 기차를 타고 있으니 엄청 설렜다. 비가 와서인지 기차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족들과 있을 때는 못 느꼈는데, 이렇게 나오니까 진짜로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성 구경을 하는 동안은 비가 좀 적게 와서, 그럭저럭 구경을 하고 나왔더니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급하게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누나 또래의 사장님이 혼자 가게를 보다가 기겁을 하고 나에게 수건을 빌려주셔서 얼굴의 물기를 닦았다. 국선아 이후로 이렇게 비를 맞아본 적이 없다 보니 찝찝한데 좀 웃겼다.
그리고 내가 커피를 시키기도 전에 사장님이 티백으로 우린 차를 한 잔 내줬다. 비 맞은 꼴이 많이 불쌍해 보였나 보다…….
나는 커피와 함께 개중 덜 달게 생긴 바나나 케이크를 골라 기다리며 뜨뜻한 찻잔을 손으로 감쌌다. 원래도 오래된 거리는 비와 안개 때문에 더 중세 분위기가 났다.
창밖으로 거리를 구경하는데 맞은 편에 보석 가게 같은 게 보였다. 나는 물 먹은 창문 너머에서 조명처럼 반짝이게 보이는 보석을 유심히 구경하다가 나는 가방을 열어서 오선보 노트를 꺼냈다.
비가 하도 와서 좀 젖긴 했지만 내지는 괜찮았다. 얼마 만에 작업을 하는 건지 기억도 안 난다.
멤버들에게 맥북과 외장하드, 작업실은 물론이고 핸드폰으로도 작업하지 못하게 미니 건반까지 뺏겼다.
평소 작업하는 모습을 자주 봐서인지 뭘 뺏어가야 하는지 기가 막히게 알고 있었다. 평소 생활에 좀 이렇게 치밀해 봐라, 이놈들…….
아무튼 거리와 카페 분위기처럼 아날로그로 돌아가서, 이어폰을 꽂고 핸드폰으로 악기를 두드려 보며 악보를 적었다.
안주원의 말처럼 뱀파이어 컨셉으로, 솔로곡과 퍼스트라이트의 곡에 어느 정도 연결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악보를 적고, 나중에 이 비 오는 거리 분위기와 신스 브라스 사운드를 만들기로 했다.
지금도 장비가 딸리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세팅은 핸드폰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부드러우면서 몽환적인 느낌을 내볼 생각이었다.
악보를 그리다가 무심코 다 마신 잔에 사장님이 다시 커피를 채워줘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오, 감사합니다.”
“무슨 작업 중이에요?”
사장님이 물어서 나는 통역기와 손짓발짓까지 해가며 케이팝 아이돌인 우리 팀이 부를 곡을 만든다고 했다.
사장님 말을 대충 번역해 보니, 내가 엄청 행복한 얼굴로 악보를 그리고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 모처럼의 작업이 행복하긴 하다.
푹 쉬어서인지 머릿속에 끊임없이 작업하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적절한 휴식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나는 작업을 계속 이어갔고, 사장님은 우리 팀을 검색해 본 후, 셀러브리티가 온 게 신기하다면서 나한테 사인을 받아 갔다.
그리고 케이크를 종류별로 선물해 주셔서 들고 나왔다. 내가 그 정도로 홍보 효과가 있진 않은데…….
카페에서 나왔을 때는 비가 그쳐서, 나는 카페에서 보이던 보석 가게로 들어가, 누나 선물을 샀다.
노을이 선물은 이미 일주일 내내 산책만 하면 뭔가 사 들고 들어왔으니까, 누나 선물도 사주고 싶었다.
우리 외할머니 또래로 보이는 사장님이 어떤 걸 사려는 거냐고 해서 내가 말했다.
“누나가 출산을 해서요, 누나 선물이요.”
손에 붓기가 안 빠진다고 우울해해서, 반지나 팔찌보다는 목걸이와 귀걸이를 볼 생각이었다.
사장님이 나랑 누나가 닮았냐고 해서, 엄청 닮았다고 했더니 날 뜯어보다가 진주를 꺼내줬다. 괜찮은 것 같아서 한 세트를 골라서 샀다.
누나가 안 좋아할 수도 있지만, 주는 나만 즐거우면 되지, 받는 사람 마음은 궁금하지 않다. 히히.
* * *
목요일 저녁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나는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방 정리를 하고 내가 있던 방 서랍장에 누나랑 매형 선물을 숨겼다.
그렇게 비가 오더니 내가 가는 날은 또 꽤 날이 좋았다. 누나는 아직 차를 오래 탈 컨디션이 아니라, 집 앞까지만 배웅을 해주러 나왔다.
노을이도 병원에서 퇴원 후 처음으로 밖을 나왔다.
나는 매형 차에 짐을 싣고, 두 주 사이에 죽순처럼 자라고 있는 노을이에게 인사했다.
“노을이 크는 거 더 보고 싶은데…….”
“아, 빨리 가.”
“어휴, 간다, 가.”
나는 투덜거리며 일어나 차에 탔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길게 인사해 봤자 눈물만 나고, 그럼 누나가 무지하게 싫어할 테니까 인사는 짧게 했다.
뭐, 워낙 씩씩한 사람이라 가족들이 돌아간 후에도 언제나처럼 잘 지낼 거란 믿음이 있다.
누나는 내가 떠나는 걸 잘 받아들이는데, 공항에 도착해서 정작 매형이 훌쩍거렸다.
“응원할게…….”
가뜩이나 덩치도 큰 사람이 공항에서 우니까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돌아본다. 되게 사연 있어 보이겠다…… 허허.
나는 매형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고 말했다.
“제가 있던 방 서랍에 선물 있어요.”
“왜! 허니가 화내!”
“비행기 탈 건데 뭐.”
나는 흐흐 웃고 손을 흔든 후 체크인을 하러 들어갔다.
체크인을 하고, 일찌감치 온 김에 혹시 선물 더 살 거 있나 살핀 후에 비행기에 타려는데, 그때부터 다시 긴장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한 번도 나를 미워한 적 없는 곳에서 지나친 안락함을 느꼈던 것 같다.
발이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집에 가야 하는데, 왜 겁이 나는지 모르겠다. 무대는 거기 있는데.
내가 자리에 한동안 서 있는 걸 알기라도 했는지, 누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벌써 집에 도착한 매형이 상의를 갈아입는 게 보였다. 누나가 내가 준 선물을 꺼내 들고 말했다.
-야, 너 이거…… 표정 왜 그래?
영상통화를 하고 화내려다가, 내 표정이 안 좋아 보였는지 물어서 내가 말했다.
“그냥. 막상 가려니까 아쉽네.”
-그럼 다시 와.
그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결혼식 하면 올게.”
-야, 나 식은 한국에서 할 거야.
“두 군데서 다 해.”
-결혼식 두 번 하면 우리 모기지 노을이까지 갚아야 돼.
그 말에 매형이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는 모기지를 가득 안고 있어.
모기지가 쓸데없이 로맨틱하게 들렸다. 어쨌든 일찌감치 집을 사서 다행이다.
“노을이 사진 많이 보내줘.”
-안 그래도 그럴 거니까 지겹다고나 하지 마. 근데 웬일로 잘 골랐더라.
누나가 선물 상자를 흔들며 말하고, 옆에서 매형은 갈아입은 상의를 보여줬다.
팬미팅 굿즈로 나온 티셔츠인데, 판매 중인 프리사이즈 의류 굿즈들이 어깨부터 안 들어가서 서러워하길래, 멤버용으로 받은 것 중에 제일 큰 사이즈로 몇 벌 가져왔다.
큰 사이즈라고 해도 다들 워낙 말라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대충 맞아 보인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찐 햇살이 맞다.
“가야겠다. 빨리 비행기 타래.”
-들어가.
“응.”
결혼식을 해야 하는 시기에, 동생이 방에 처박혀 있는 바람에 누나는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을 미뤘다.
노을이가 태어날 때까지 결혼식을 못 하고 있으니 이렇게 나쁜 동생도 없다.
나는 잘 살아야만 한다. 지금까지 가족들의 속을 썩인 보상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걸음이 옮겨졌다.
나는 전화를 끊은 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비행기에 올랐다.
* * *
찾아가는 일꾼 2회차 촬영장.
멤버들은 어느 정도 지어 올린 이동식 주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침수 피해가 심각했던, 동네 하나뿐인 카페이며,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언제나 마을 어른들에게 사랑방을 제공해 주던 곳이었다.
“우리가 집을 짓고 있다니…….”
박선재가 감격하며 말했다. 최소 30년 경력의 전문가들이 옆에서 가르치고, 시키는 대로 톱질하고, 목재 옮기고 하다 보니 진짜로 한옥 한 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황새벽이 안주원에게 말했다.
“야, 미대생 진짜 유용하더라.”
“그래? 다행이네.”
수평을 맞추거나, 끌로 목재를 다듬을 때, 안주원의 눈은 거의 기계 수준으로 정확했다.
지난번 촬영에 서까래까지 다 얹고, 이번 촬영에서 기와를 얹었다. 방송이기 때문에 출연자들의 안전을 위해 와이어가 동원되었다.
처음으로 와이어를 걸게 된 신지운이 말했다.
“와이씨, 이거 힘든데? 해원이 형 어떻게 뮤직비디오마다 이걸 했냐.”
“해원이 형 와이어 좋아해. 재미있대.”
민지호의 말에 신지운이 투덜거렸다.
“하여튼 사람이 좀 이상해.”
“형이 더 이상해.”
“내가 뭐.”
쓸데없는 걸로 투닥거리며 힘을 빼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힘들기는 해도, 일하다 보니 하루가 후다닥 지나갔다.
멤버들은 저녁 식사까지 마친 후, 땀에 쩐 몸을 씻고 스타일리스트가 가져다준 편하지만 훈훈한 컨셉의 의상으로 갈아입은 후 방으로 돌아와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고작 한 명이 없는 것뿐인데, 두 주 내내 멤버들이 모여 있을 때는 이상할 정도로 허전하고 조용했다.
한효석이 말했다.
“그럼 해원이 형 언제 오는 거예요?”
그러자 안주원이 대답했다.
“모르겠네. 그냥 한 번 더 미룬다고만 하고 연락이 없다.”
미루고 또 미루다, 이제 귀국 일정까지 모르게 되니 멤버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해원이 형 진짜 안 오면 어떡해?”
민지호가 묻는 말에 멤버들이 답이 없었다. 피곤했는지 선풍기 앞에 누워있던 신지운이 말했다.
“데려와야지, 뭘 어떡해.”
“영국 가서?”
“어.”
“근데 우리가 갔는데도 안 오고 싶어 하면? 형 고집 엄청 세잖아. 데리고 나올 수 있었으면 방에 2년이나 안 있었지.”
“…….”
그 말에 신지운이 대답 없이 벽 쪽을 보고 돌아누웠다.
그렇게 방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을 때, 문밖 마당에서 황새벽이 소리치는 게 들렸다.
“어!”
황새벽이 큰 소리를 내는 건 일 년에 한 번도 잘 없기 때문에, 멤버들은 뭔가 큰 문제가 터졌다고 생각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을 열어보니 마당에 모자를 푹 눌러쓴 정해원이 서 있었다. 정해원이 두 손에 든 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멤버들, 간식 사왔는데 먹…… 야, 야. 얘 왜 이래.”
발 빠른 민지호가 제일 먼저 정해원에게 달려들어 울기 시작하고, 나머지 멤버들 역시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