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166화
평소에는 멤버들에게 맞춰 약간 톤다운을 하는 편인데, 오늘은 뱀파이어 이야기이기도 하고 혼자니까 메이크업 시간이 오히려 짧게 걸렸다.
그 후부터, 뮤직비디오 촬영은 이박삼일 동안 꾸준히 이어졌다.
하면 할수록 일곱 명이 같이 한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건지 새삼 깨닫게 됐다.
어쩐지 안주원이 싱글 활동 중에 잠깐만 숙소 돌아와도 잠든 자식들 보듯이 멤버들 얼굴을 한 번씩 다 확인하고 자더라.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속에서 미친놈이 자라고 있나, 살짝 의심했는데 이제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바쁜 시기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낼 수 있는 멤버들이 촬영장에 들렀고, 카일룸 놈들도 들렀다.
귀찮았지만 또 후배라고 은근히 든든하고 그렇다. 하지만 자기네 뮤직비디오 촬영 중 힘들 때 당을 채워준 그 맛을 잊지 못해, 도넛을 사 온 건 좀 화날 뻔했다. 쌩신인들이 돈이 어디 있다고…….
뮤직비디오 가편집이 끝날 즈음, 솔로 음원 일정과 제목이 공개됐다.
햇살이들은 상큼하고 귀여운 곡이라고 추측하는 것 같았다.
[프루티래ㅠㅠㅠ 제목만 들어도 귀여워ㅠㅠㅠㅠㅠ]
[우리 애 안 사납게 생겼다구ㅠㅠㅠㅠ 잘 보면 과즙미가 있다구ㅠㅠㅠㅠㅠ]
……우리 햇살이들 어떻게 하지. 내가 햇살이들이 과즙미라는 말을 오용하게 만들고 말았다.
햇살이들이 귀여운 곡이라 확신해서, 실망할까 봐 걱정도 됐다. 그래도 아주 드문드문 아닌 것 같다는 반응도 있긴 했다.
[근데 프루티에 미쳤다는 뜻도 있던데…….]
[↳헐]
[↳소름돋아…….]
[↳이것도 잘 어울려ㅠㅠㅠ]
햇살이들이 약간 행복한 고구마 같아서 나는 한참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것 같다.
* * *
예정된 날짜의 오후 여섯 시,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정해원은 그로부터 다섯 시간 후, 사전 녹화 직전까지도 반응을 찾아보기는커녕, 핸드폰에 손도 대지 않았다.
본인은 평소처럼 웃고 떠들었지만, 자기 혼자 낸 앨범의 반응이 안 좋을까 봐 찾아보지 않는 것이리라, 주변 사람들은 직감하고 있었다.
반대로 강효준은 오후 여섯 시부터 계속해서 음원과 뮤직비디오의 반응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전 녹화 시간이 가까워지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인이어를 확인하는 정해원에게 물었다.
“컨디션 어때.”
정해원이 돌아보더니, 힐끔 무대 쪽을 보고 말했다.
“의외로, 괜찮아요.”
“의외로?”
“혼자 무대 올라가는 거 불안할 줄 알았는데, 우리 팬들 보이니까 다 괜찮아졌어요.”
그러더니 누가 봐도 기쁜 표정으로 웃었다.
“진짜, 햇살이들 너무 보고 싶었었거든요.”
팬들이 와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긴장이 풀어지고, 그저 행복감만 가득한 듯했다.
“나 혼자여도 다들 와주는구나. 진짜 고맙네.”
그렇게 감동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강효준은 정해원에게, 나중에 아이돌 그만두고, 프로듀싱만 하자고 흔드는 건 불가능하겠구나, 하고 다시금 확실하게 포기했다.
정해원이 무대로 달려 올라가는 순간 팬들의 뜨거운 함성이 쏟아졌다. 무대 내내 백스테이지의 스태프들 반응도 좋았다.
그렇게 녹화가 끝나갈 즈음, 강효준은 아까부터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힐끔 보았다.
[VMC 이춘형 형]
사촌형이자 VMC의 실세, 이춘형 이사에게서 온 전화였다.
보아하니 드디어 퍼스트라이트 조건부 계약에 대해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성격 생각하면 몇 대 맞아줘야 할지 모르고, 승진도 누락 되겠지만 강효준은 오히려 만족스러워했다.
정해원의 음원이 공개된 밤에 이렇게 전화가 왔다는 것은, 이춘형 이사가 퍼스트라이트 계약서를 다시 살펴보게 할 정도로 그 화제성이 좋다는 의미였으니까.
* * *
정해원의 팬인 친구 희은을 따라 공방까지 따라온, sooo_1818, 수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 진짜 아직 팬까진 아니야. 호감 정도?”
“친구야. 너 이제 부정기도 아니고, 그냥 사랑이야. 이 치열한 걸 뚫고, 이 밤에 나랑 사녹을 보러 왔잖아.”
“아니, 아무래도 음악은 잘 만드니까.”
그렇게 입덕이다, 아니다로 투닥거리는 사이 오후 6시. 정해원의 솔로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fruity’라는 제목으로 팬들이 유추한 것과 전혀 딴판의 시작이었다.
평소의 머리색보다 더 어두운 검은색으로 염색한 정해원은 하얀 눈 위에서 검은색 정장과 롱코트를 입고, 은색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무언가 쏘려는 듯 총을 들었다가, 한숨 쉬며 내린 후.
뒤에서 미사보가 머리에 씌워지며 전신을 잡고 있던 화면에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희은이 자기도 모르게 정지를 시키고 말했다.
“홍 감독님 또 얼굴 꽉 차게 잡으셨네.”
원래 사진 작업과 영상 작업을 하는 희은이 평가한 후, 말을 이었다.
“잠깐만, 나 심호흡 좀 하고 계속 보자. 정해원 얼굴 너무 심한데. 피사체가 페르소나인 게 이런 거야?”
“잘 멈췄어. 이해해, 이해해.”
수정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희은은 진정하고 다시 뮤직비디오를 플레이했다.
[Are you afraid?]
유명한 뱀파이어 로맨스 영화를 오마주한 대사가 흘러나왔다.
[NO]
대답과 함께 눈을 뜨고 보이는 공간은 긴 테이블이 있는 무채색의 현대미술관 같은 공간이었다.
테이블 앞에 앉은 정해원 앞에 놓인 그릇에 빨간색 보석들이 놓여 있었다.
그중 하나를 손으로 집어 입에 넣었을 때, 뒤에서 여자 댄서들의 손이 정해원의 목을 감싼 후 안무씬으로 넘어갔다.
[하얀 눈과 검은 밤이 내리는 길]
[그저 너를 떠올리게 해]
[black and white or red]
[black and white or red]
[all red all red]
[무채색의 공간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도주로마저 너를 닮아 되돌아온걸]
[(문을 닫아)]
[나에겐 사랑이며 너의 유일한 열이야]
[과일 향이 난다면 달콤하게 기억해줘]
[원한다면 못 줄 게 어디 있어?]
[빨간 잔을 가져가 나는 희망을 마시고]
[내 추억엔 아픔만 남겨줘 그냥 빨갛게]
[하얀 눈과 검은 밤이 내리는 길]
[그저 너를 기다리게 해]
[black and white or red]
[black and white or red]
[all red all red]
프로인 희은이 보기에 돈 들인 티가 물씬 나는 뮤직비디오였다. 느와르와 판타지가 섞이는 지점을 위해 소품 하나하나 특별히 신경 써서 어렵게 구했을 것이 보였다.
뮤직비디오는 현악기 소리가 흐르는 음악과 찰떡같이 달라붙어 있었다. 화려한 군무씬도 완벽하게 어우러진, 홍 감독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뮤직비디오는 정해원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을 확인하는 장면으로 넘어갔다가, 초반과 달리 코트와 재킷 없이 다시 눈길을 맨발로 걸었다.
화면에서 점점 멀어지는 장면에서 뮤직비디오가 끝나고, 뮤직비디오가 끝날 때까지 숨 쉬는 것도 잊고 집중하던 두 사람은 바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헉헉 숨 안 쉬어져]
[햇살이들 살아 있니……?]
[미쳤나 X나 섹시하다 해원아? 해원아?]
[해원이 마지막에 뱀파이어 된 거야? 근데 거울 왜 그렇게 슬프게 봐ㅠㅠㅠㅠㅠ]
[↳뱀파이어 사랑하는데 이제 자기도 뱀파이어 돼버려서 피 못 주잖아…….]
[↳↳미친 소름 돋는다]
[↳↳그래서 이제 추위도 안 타는 거지]
[↳↳이건가봐ㅠㅠ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
[처음에 뱀파이어 죽이려다가->사랑해서 못 죽이고 먹이->뱀파이어 이거인 듯]
[↳ㅠㅠㅠㅠㅠㅠㅠㅠ]
[눈물 나네 내가 정해원을 얕봤나봐 이런 거 가져올 줄 몰랐다구 지금 보니까 내 기대치가 낮았던 거였어 하 미안해 해원아 이렇게 큰 선물 가져올 줄 모른 나는 햇살이 자격이 없다…….]
[↳햇살이 진정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햇살이 잘못 아니야 우리 해원이 탓을 하자!!!]
[↳↳맞아 해원이도 우리가 우리 탓하는 것보다 해원이 탓 하는 걸 좋아할 거야(당당)]
[아니 정해원 퍼포먼스 잘할 건 알았는데 노래 뭐야? 왜 잘해?]
[↳그니까! 음색 좋잖아…….?]
[↳이형 작가님 인스타 올라왔는데 해원이가 하면 자신감 없어서 마음에 안 든다고 보컬 다 날릴 것 같아서 자기가 밤샘 작업했대]
[↳↳이형이 형ㅠㅠㅠㅠㅠㅠㅠ]
[↳↳진짜 형 밖에 없어요ㅠㅠㅠㅠㅠㅠ]
[애들 또 쭈어니 때처럼 X버스 주르륵 왔따ㅋㅋㅋㅋㅋㅋㅋㅋ]
[민조 : 하…… 이 천재만재성을 어떻게 해야하지……. 앗 프루티를 만들면 되겠다!]
[민조 : 천재아이돌 정해원 프루티 만관부♥]
[지우니 : 명곡일세 명곡이야]
[새벽 : 안무 보니까 정해원 코어 좋더라 쟤도 맨날 앉아서 작업하는데 왜…….]
[안주원 : 해원이가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많이 사랑해주세요]
[↳막내 : 해원이 형이 제일 좋아하는 거 햇살이들 사랑♥]
[↳효석 : 진짜 햇살이들 사랑만 먹고도 살 것 같은 형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닠ㅋㅋㅋㅋㅋㅋㅋ우리보다 더 자랑스러워하잖아ㅋㅋㅋㅋ]
[그와중에 새벽이 코어 부러워하는 거 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X버스까지 확인한 후, 수정과 희은은 의자에 늘어졌다.
“기 빨린다…….”
“이거…… 잘되겠지?”
“잘 안되면 케이팝이 잘못한 거지.”
수정이 그렇게 중얼거리다 급하게 말했다.
“좀 이따가 정해원 무대 봐야 돼? 나 맨정신으로 못 보겠는데.”
“어, 사실 나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두 사람은 진지하게 한 잔 마시고 들어갈까를 고민했지만, 그건 진짜 아닌 것 같아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잠시 뒤 사전 녹화 입장 후, 정해원이 무대로 올라왔다.
검은색에 화려한 장식이 달린 의상을 입은 정해원은 팬들을 보자마자 열에 버터 녹듯이 표정이 풀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두 손을 열심히 흔들어 인사했다.
카운트가 들어가고, 정해원이 안무에 활용하는 소파에 누웠다. 팬들을 발견하고 풀렸던 표정이 바로 음악에 맞춰지고, 댄서들이 커튼처럼 앞을 가렸다.
프루티의 첫 번째 무대가 시작되었다.
무대를 위한 무대. 퍼포먼스를 위한 퍼포먼스.
입덕부정기의 수정은 무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확실히 보컬보다는 퍼포먼스를 강조한 무대였다.
그럼에도 작사, 작곡, 편곡을 모두 자기 손으로 끝낸 사람의 무대였기 때문에, 음악성에 트집을 잡기 어려웠다. 천생 무대 체질,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아이돌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팬들은 3분 동안 넋이 나가 있었고, 끝난 후에도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 *
정해원의 솔로 앨범이 외부에서 나온다고 할 때까지도, TRV는 조용한 편이었다.
직원들 사이에 정설로 퍼진 소문에, 최기문 부대표는 오히려 좋아했다고 했다.
솔로를 내고 대중의 싸늘함을 제대로 느껴 보면 기가 죽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다 음원이 공개된 직후부터, 회사가 뒤집혔다.
“이야, 이것까지 차트인을 시키네. 진짜 그냥 자기 취향껏 만든 것 같은데.”
“이걸 자기가 회사에 가져다줬는데, 깠어?”
정해원이 올해 워낙 차트인을 많이 시켰으므로, 거기까지는 예상 범위였다.
이미 스트리밍 사이트의 이용자들 머릿속에 정해원은 ‘신곡을 내면 한 번은 들어볼 작곡가’로 분류되어 있었다.
하지만 프루티의 뮤직비디오가 해외 여러 지역의 인기 동영상에 올라간 건 예상 밖이었다. 특히 일본을 포함한 몇 개의 아시아 국가에서는 상위권에 랭크되기까지 했다.
그 당사자인 TRV 부사장은 오히려 불안을 넘어 그냥 해탈한 듯이 허허 웃고 다녔다.
미리 최동국 대표에게 원흉인 최기문 부대표를 팔아넘기고, 미리 욕 한 바가지를 먹고 나니 되레 마음이 편안해졌다.
반면 최기문은 아버지 최동국 대표로부터 당장 본가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