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167화
최기문 전 TRV 부대표는 아버지의 호통에 안절부절못했다.
최동국 대표는 일본 시장을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세대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최동국 대표가 내기를 바랐는데도 아들이 날려 먹은, 정해원의 솔로 뮤직비디오 일본 순위를 확인하지 않을 리 없다.
의절하자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이제 몇 년이 지나든 TRV로 돌아가는 건, 자신이 생각해도 텄다고 생각했다.
TRV가 인수되면 혼자 한 번 제대로 준비해 보려던 엔터 회사도, 인수가 엎어지며 돈 빠져나가는 구멍이 되고 말았다.
방법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아예 눈 밖에 날 일이 생겼으니 심장이 철렁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본가에 가볼 자신이 생기지 않아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VMC쪽에 만들어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문이 형, 퍼스트라이트 VVV엔터랑 계약한 거, 조건부인 거 알았어?
“뭐?”
-몰랐지? 하긴, 이춘형 이사도 지금 알아서 브삼 난리 났다, 지금.
이러다 뒤지겠다, 싶던 최기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니까. 퍼스트라이트가 브삼이랑 계약한 게 확정이 아니라는 뜻이야?”
-그렇다니까.
그렇다는 것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VVV엔터에 가지 않는다면, 그래도 어딘가는 갈 소속사를 찾아야 할 테니까.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만 빠진다면 TRV에서 퍼스트라이트를 잡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TRV내에 정해원이 유난히 잘 따르는 직원들이 몇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특히 대부분의 프로듀싱을 함께하는 양이형과 갈라서는 것은 정해원에게도 심각한 문제일 것이 분명했다.
TRV는 그래도 꽤 규모가 있는 소속사였고, 그보다 더 큰 소속사는 대부분 전속 프로듀서들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양이형이 정해원을 따라서 TRV를 떠나, 소속사를 옮기는 것은 어디로 가든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정해원과 함께한 시간보다, TRV와 함께한 시간이 훨씬 더 길지 않던가.
다 죽어가던 최기문은 아버지에게 전할 기쁜 소식에 안도하며 집으로 달려갔다.
* * *
[오늘 사녹 후기……. 해원이 무대 올라오는데 솔직히 멀리서 주인 발견한 강아지 같더라구요ㅠㅠㅠ 햇살이들은 다 그 표정 아실 듯…… 귀여워서 혼미한데 무대 시작하니까 갑자기 섹시해져서 내가 지금 뭘 보는 건가 난 아직 이걸 보기에 어린 게 아닐까(저 성인)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첫 번째는 넋이 나가 있어서 몰랐는데 두 번째 녹화부터는 진짜로 안무도 음악도 그냥 모든 게 너무 좋아서 현기증 났어요 리허설 포함 무대 세 번 했는데 중간에 햇살이들이랑 꽁냥꽁냥 하고 안무가형들이랑은 눈만 마주쳐도 웃음 터짐 기분 진짜 좋았나 봐요ㅠㅠㅠ 진짜 반짝반짝 아이돌 그 잡채……. 하 쓰면서도 꿈 같네…… 제발 다음도 사녹 후기 쓸 수 있길ㅠㅠㅠ]
쏟아지는 사녹 후기들을 보며 regular_1228, 이재희는 한숨을 쉬었다.
사녹 광탈.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미니 팬미팅에서 이재희가 쓴 포스트잇 하나를 겨우 찾아서 읽고 깨물하트를 해주던 정해원이 어느새 혼자서도 무대에 설 수 있는 아이돌이 되었다. 한편으로 기쁘면서 아쉬우면서…….
어쨌든 응원하는 마음으로 생방송을 기다리던 중의 1시, 프루티가 일간 77위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이재희는 공방을 못 간 것을 잠시 잊고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4세대 이후, 솔로 최고 순위는 데뷔 4년차, IMX 재빈의 56위였다. IMX와의 팬덤 규모 차이를 생각하면, 77위는 굉장한 기록이었다.
“그래도 더 올라가자.”
이재희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기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생방송으로 정해원의 무대를 확인한 후, 어차피 올라가겠는데 기도까지 필요했었나, 싶은 자만심이 들었다.
그렇게 음방이 끝나고 늦은 밤, 무대 의상을 입은 사진이 X버스에 올라왔다.
[해원 : 짠! 햇살이들 맨날 보게 맨날 무대 하고 싶어요]
그걸 보고 있으니, 공방을 못 간 마음이 어느 정도.
“해소되진 않네. 하, 더 보고 싶어, 짜증 나…….”
이재희가 투덜거렸다. 그저 콘서트 세트리스트에 프루티가 들어가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X이앱이 떴다.
[프루티!]
이재희가 바로 눌러보니 정해원이 손을 흔들었다.
-자려고 하다가, 아무래도 햇살이들한테 고맙단 말 꼭 하고 자고 싶어서 켰어요. 무대 올라가는데 그냥 너무…… 아, 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안 나오지.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잘 나오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정해원과 함께 버텨온 이재희는 그 표정에서 하고 싶은 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고마워요. 그냥, 진짜로. 고마워요, 햇살이들.
열심히 웃어보려다 결국 울 것 같은지 더 말을 못하고 밤인사를 한 후 X이앱을 껐다. 그리고 잠시 후 X버스에 글이 올라왔다.
[해원 : 아 맞다 사랑해요!]
잠시, 아쉬운 마음마저 사르륵 녹았다.
* * *
자신을 찾는 전화를 씹고 씹다가 그나마 덜 바빠졌을 때 사촌 형 이춘형 이사를 찾아간 강효준은 예상 그대로의 첫 마디를 듣고 있었다.
“미친 새끼 아니냐?”
VMC 차기 대표로 예견되는 이춘형 이사는 그 이후로도 온갖 험악한 욕을 퍼부어댔다. 강효준은 한 귀로 흘려 버리며 말했다.
“나도 뭔가 해야지.”
“네 실적 내겠다고 회사 뒤통수를 쳐? 지만 아는 조건부 계약을 해? 너 같은 새끼를 X발, 이제 어떻게 믿고 회사에 두니.”
“아, 미안해. 이제 안 그…….”
말하고 있는데 뭐가 얼굴로 날아와서 겨우 피했다. 뭐였나 돌아보니 문진이었다.
강효준이 허 웃고 이춘형 이사를 다시 돌아보며 물었다.
“섬망 오셨어?”
“이 새끼가 못 하는 말이 없네.”
강효준은 문진을 들어 이춘형 이사의 얼굴에 휙 들이밀었다. 이춘형 이사의 코앞에서 손을 멈춘 강효준이 말했다.
“그게 아니면 이런 거 머리로 안 던지지.”
움찔했던 이춘형 이사가 곧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이거 네가 잘못한 거야. 내가 뭔 지랄을 해도, 그래도 여전히 네가 잘못한 거라고.”
“알았다. 미안해. 진짜로 이번엔 내가 욕심이 너무 컸어.”
“그니까 난 그게 궁금한 거야. 네가 욕심이 왜 크냐? 어차피 VMC 내 거고, 네가 쌔빠지게 굴러봤자 엔터계에서는 그냥저냥, 뭐 잘하면 티케 엔터 정도 클까. 근데 알잖아. 엔터 회사는, 커봤자 X소야.”
“형님의 X소 기준이 X나 빡빡하네요.”
“너 지금 미안한 사람의 태도가 전혀 아니다.”
“미안하다고. 세 번째 말하고, 내 대가리 깰 뻔했으면 충분하잖아.”
“넌 인마, 내가 고모가 둘이었으면 X도 아니었어.”
고명딸한테 본 유일한 외손주라, 외할아버지가 특히 귀여워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긴 했다.
강효준도 그걸 믿고 까부는 데가 있다는 건 어느 정도 인정했다.
펄펄 날뛰는 이춘형 이사의 악다구니를 흘려듣고 있는데, 중간에 질문이 있었다.
“어.”
“뭐가 어야, 너 지금 내 얘기 안 듣냐?”
“아, 미안. 뭐라고 했어?”
“그 새끼한테 악편한 피디 날려줘서, VMC한테 고맙다고 딱 한마디만 시키라고.”
“아. 해원이한테?”
이게 사람 새낀가?
강효준이 생각하는데 이춘형 이사가 말을 이었다.
“너 혼자 뒤통수 친 거냐? 그 새끼도 같이 친 거잖아.”
“형이 걔 성격 몰라서 그래. 절대 안 해. 그런 거 시키면 오히려 더 지랄한다고.”
이춘형 이사가 어이가 없어 아주 웃어버리며 말했다.
“지랄하면 어쩔 건데. 지가 뭐 클라루스야?”
강효준은 한숨을 쉬었다.
강효준이 성장하며 봐온 바로, 크게 있는 집 자식 중에 지나치게 어려움 없이 자라 자기에게 공격이 들어오는 것 같으면 몇 배로 갚으려 드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있었다. 이춘형 이사도 그런 편이었다.
거기에 유학 생활을 해서 자기가 깨어 있는 줄 알기까지 한다. 그 부분이 전자보다도 피곤했다.
이춘형 이사가 정해원과 붙으면, 언뜻 바위와 달걀 싸움이 될 것 같지만 정해원은 보통 달걀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튼, 새로 사업 시작하는 자신도 못지않게 피곤해질 것 같았다.
사실 이럴 때를 대비해 써먹을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써먹을 나이가 너무 지나서 그렇지…….
강효준이 자괴감을 느끼는 표정으로 말했다.
“형, 자꾸 치사하게 굴면 외할아버지한테 이른다. 나 괴롭힌다고.”
“…….”
집안의 절대 권력자 얘기가 나오자 이춘형 이사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더니 별안간 다시 욕을 퍼붓고 강효준을 쫓아냈다.
그렇게 4본부로 돌아온 강효준에게 4본부 A&R팀, 임수환 A&R이 달려왔다.
“이제 어떡해요?”
“뭘 어떡해요. 이제 보고서 올리고 까이고 올리고 까이면 또 올리고 하는 거지.”
4본부에 새로 본부장이 들어와 앉았다. 이춘형 이사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일본 활동을 담당하던 소영훈 본부장.
강효준이 말했다.
“괜찮아요, 있는 게 체력인데. 계속 쓰지 뭐.”
“아, 팀장님 지금도 잠을 안 자는데…….”
“더 줄이죠, 뭐.”
강효준이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처음 정해원과 조건부 계약을 약속할 때부터 다 예상 범위의 일이라, 별로 상관없었다.
예상 밖의 일이라면 정해원과 그 팀을 위해서 회사까지 차리게 될 줄은 몰랐다는 것 정도였다.
* * *
혼자 활동하는 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었다. 좋은 점은 멤버들이 없다는 거고, 나쁜 점은 멤버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자가 너무 커서 전자의 좋은 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멤버들과 대기실 좁다고 티격태격하면서 낑겨 있는 게 벌써 그리웠다.
나는 이번에는 신지운이 촬영 갈 때마다 자기 없이 재미있게 놀지 말라고 한 걸 이해했다.
[나 없이 재미있는 거 하지 마 맛있는 것도 먹지 마]
[신지운 : 거봐 저렇게 된다고]
[새부기 : 야 그래도 맛있는 건 먹어야지]
[안쭈 : 근데 일곱 명이 다 모여야 제일 재미있긴 해]
[막내♥ : 그건 맞아]
그러다 문자가 도착한 것을 확인했다. 스파이1이었다.
퍼스트라이트가 조건부 계약한 건이 터져서, 난리가 났다는 모양이었다. 얘기 들어보니 뭐 막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스파이1 : 아무튼 그래서 4본부 분위기 당분간 좋지 않을 듯]
카일룸 앨범 준비하느라 밤샐 땐 솔직히 좀 힘들었는데, 이렇게 들으니 강효준에게도 어려운 길이었던 것 같다.
약간 늦게 대기실로 들어온 강효준의 표정은 그래도 여느 때처럼 무덤덤 그 자체였다.
“형 괜찮아요?”
“……스파이 진짜 누구냐?”
“이제 알 때 됐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더 묻기에는 강효준도 피곤해 보여 그냥 여기서 대화를 끝내기로 했다. 그러자 오히려 강효준이 물었다.
“더 안 물어봐?”
“거기 질문할 체력까지 카일룸 프로듀싱에 쓸게요.”
“다른 직원들도 너처럼 대답해 주면 내가 훨씬 행복할 것 같다.”
강효준이 투덜거렸다.
짧게 쉬는 시간 동안 햇살이들과 놀려고 핸드폰을 들었는데, 때마침 양이형에게서 문자가 왔다.
[양이형 : 야 최기문이 전화하더니 나더러 회사랑 계약 유리하게 하고 싶으면 너한테 TRV 재계약 권유하라더라]
[양이형 : X나 웃기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그걸 보고 어이없어 웃고 있으니 강효준이 힐끔 보고 흐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건 좀 웃겼다.”